# 180
180화
청운의 추상같은 목소리에 모두가 움찔했지만, 그들의 눈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진무사! 아무리 그대가 황실의 일원이고 무공이 고강하다고 해도 너무한 것 아니오.”
“옳소! 누구도 하지 못한 전과를 올린 문희 단주님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다니! 당장 사과하시오!”
“맞소! 그대가 올리지 못한 전공을 문희 단주님과 우리가 올리니 배가 아픈 것이오?”
여기저기서 청운을 성토했다.
하지만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주작단원들은 하나둘 입을 닫았다.
주위가 조용해졌을 때 청운은 문희를 바라보았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눈빛이었다.
문희가 이를 갈듯이 말했다.
“진무사,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왔어요. 그런데 이런 대우를 받다니.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거예요.”
“그냥 안 넘기면?”
“뭐, 뭐예요? 당신 미쳤어요!”
문희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그러나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문희에게 시선을 고정하더니 말했다.
“하나 묻지. 누가 그대 마음대로 마도문파를 공격하라 했느냐?”
“전장에 나가면 지휘관 재량으로…….”
“닥쳐라!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죄를 덮으려고 하느냐!”
“뭐라고요? 죄?”
“그렇다! 누가 그대들이 한 행동을 보고 전과라 하던가? 분명 주작단의 임무는 정찰이었다. 그렇다면 적을 만난다 할지라도 위에 보고하는 게 먼저다. 내 말이 틀렸느냐?”
청운의 쏟아지는 말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억울했다. 적을 만나서 싸운 것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청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흥! 아직도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른다는 표정들이군.”
“……그래요. 정찰을 하다 보면 적과 싸울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흥!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청운의 다그침에 문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청운은 사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적이 먼저 공격해온다면 당연히 맞서 싸워야겠지. 하지만 가만히 있는 적을 공격하라고 누가 그러던가?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이 있으면 말해봐라!”
“…….”
“당연히 없겠지! 천둥벌거숭이 같은 그대들이 영마장을 공격하고 사천혈륜궁을 공격한 바람에 지원을 나갔던 무사 수백이 죽었다.”
“억지예요. 사파가 정파를 먼저 공격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예요. 종남파의 복수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누가 종남을 공격한 게 사파라고 하더냐? 증거가 있더냐?”
“…….”
문희는 청운의 대답에 입을 닫았다. 이곳에 와서 종남을 공격한 인물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청운은 문희의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당장 일장에 쳐 죽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그는 오른편 앞에 서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눈이 큰 사내를 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묻지. 누가 그대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는가? 맹주인가? 아니면 총군사? 아니면 제갈신우 장로? 영마장을 공격한 후 옥산에는 왜 갔는가? 누가 시킨 것이지?”
청운의 눈길을 받은 눈이 큰 사내가 움찔하며 대답했다.
“그, 그것이 문희 단주께서…….”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청운은 고개를 돌려서 문희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단원들이야 단주의 명령에 움직였겠지. 결국 공격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단주라는 건데,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내 이번 일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니까.”
“…….”
문희의 고운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질 때 누군가의 음성이 장내를 덮었다.
“진무사야말로 무슨 권한으로 무림맹 주작단 단주를 핍박하는가?”
청은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사내가 몇몇 무인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청운은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천검문의 둘째이며 현무단 단주인 천일영이었다.
천일영은 구원자라도 되는지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와서 청운 앞에 섰다.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비틀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황실 나부랭이가 감히 무림맹 사신단을 핍박하는 것이냐?”
“뭐라? 화, 황실 나부랭이?”
“왜? 아니꼽나? 알량한 권력을 믿고 무림맹을 핍박하다니 관리라는 자가 기본이 안 되어 있군.”
천일영의 건방진 발언에 청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이 자식 뭐지?’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당장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워했다. 말 한번 섞어보지 않은 사이건만 원수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청운이 혼란스러워할 때 천일영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무사 나리. 주제넘은 행동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군. 우리는 네놈이 거느린 비리비리한 관리가 아니야.”
“……그렇군. 내가 잠시 본분을 망각했어.”
청운이 순순히 인정하는 듯하자 모두가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청운은 여전히 무언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겨우 목구멍으로 삼키는 듯했다.
그 모습에 천일영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콧대를 세웠다.
그러나 청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놈 말이 맞아. 생각해보면 그냥 힘으로 눌렀어야 해. 그럼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청운이 혼잣말하듯이 흘린 말에 천일영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두 눈이 커졌다.
“뭐? 지금 무림맹과 한번 해보자는 것이냐?”
“잘 아는구나. 무림맹의 사신단 단주 따위가 감히 오호평천 대장군이며 진무사인 나에게 뭐라고? 가소로운 놈들 같으니라고.”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모두가 잊고 있었다. 청운이 가진 권력의 힘을.
그동안 청운은 순리대로 일을 처리했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운이 이제 권력을 앞세우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청운은 멈추지 않고 천일영을 몰아붙였다.
“앞으로 무림맹이든 뭐든, 무림의 행사에 네놈이 말한 비리비리한 관리의 힘을 보여주마. 어떤 자가 감히 황제 폐하의 대리인인 나에게 그따위 말을 할 수 있는지. 네놈과 나의 차이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청운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가 이번에는 입을 닫고 서 있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림맹이 무림의 안녕을 꾀하지 않고 싸움만 일삼는다면 어찌 정의를 세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암중에 숨어 있는 흉악한 자들은 나 몰라라 한다면 나 역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야.”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쥐죽은 듯한 적막이 흘렀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청운이 몸을 돌리며 마지막 한마디를 더 던졌다.
“사신단 단주도 권력이라고 까분 것이라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천일영.”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떠나가는 청운을 잡아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청운의 기에 눌려서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 인물도 있었다.
고위 관리의 힘을 무시할 무림인이 중원에 몇이나 되겠는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나 다름없는 청운에게 맞설 수 있는 인물이 과연 천하에 몇이겠는가?
돌아서서 떠나가는 청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에 백청청이 안절부절못했다.
청운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행동한 일이 의아했다.
‘이상한 일이군. 왜 화가 난 것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냥 화가 치밀었었다.
어쩌면 죽지 않아도 될 수많은 사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무언가 이유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청운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채 백청청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 *
청운과 사신단 사이에 있었던 일은 금세 화산파에 퍼졌다. 그 소식을 들은 제갈신우가 화들짝 놀랐다.
그만큼 청운이 가진 권력의 힘을 잘 아는 자도 없을 것이다.
예부터 제갈세가는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금도 고위직을 비롯한 일반관리로 임명되어 활동하는 세가 사람들이 많았다.
청운이 가진 권력의 힘은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황족이라 할지라도 즉결처분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권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권력을 휘두른다면 관리가 되었든, 장군이 되었든 몸을 사릴 것이다.
이미 오군도독부의 고위 장수 목을 여럿 친 그가 아니던가.
한 성을 총괄하는 도지휘사도 그의 눈 밖에 나서 둘이나 목이 떨어졌다.
하물며 감히 제국에서 그에게 맞설 인물이 누구겠는가!
그런데도 청운은 자신을 비롯한 나이 많은 사람들을 예의로써 대했다. 학문을 닦은 학사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가 권력을 사용하는 데 망설이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제갈신우는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진무사의 역린을 건드렸단 말인가?”
막아야 했다. 그가 무림맹에 강짜를 놓기 시작하면 신비세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두려워서라기보다 시달릴 것이 걱정되었다.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겠어. 지금 처리할 문제가 산더미인데, 하필이면 진무사의 성질을 돋우어서 핏대를 세우게 만들다니. 쯧쯧.”
제갈신우는 그길로 회의장으로 향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요즘 자신의 입지가 조금 불안한 느낌을 받던 터였다. 잘만 처리하면 자신의 흔들리는 입지를 공고히 할 좋은 기회였다.
‘그래, 전화위복이 될 수도…….’
곧 긴급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제갈신우는 절대무적의 신공을 익힌 고금제일고수가 되어서 입으로 무림맹 인사들을 박살 냈다.
당연히 반박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제갈신우의 논리와 장로라는 권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제갈신우는 본보기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지 문희와 천일영을 불러서 엄청난 막말을 퍼부었다.
이놈, 저놈, 같잖은 놈, 새파란 애송이 등등…….
둘은 고개를 숙인 채 듣기만 했다.
결국 문제를 일으킨 문희와 천일영에게 근신 처분이 내려졌다.
화산에서 일어난 촌극은 곧장 전서구와 인편을 통해서 무림맹에 전해졌다.
그런데 이번 일로 인해서 청운을 싫어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남이 가진 권력을 질투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 * *
회의가 끝났을 때 종남에서 전서구가 한 마리 도착했다.
제갈신우는 전서구에 달린 전서를 빼서 읽어보고 급히 청운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청운은 백가장 인물들과 함께 있었다. 늘 그렇듯이 백청청도 청운 곁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고.
“미안하게 되었네. 아이들이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런 실수를 한 것 같구먼. 마음 넓은 자네가 이해하게나.”
제갈신우가 대신해서 사과하자, 청운도 마지못한 표정으로 사과를 받아주었다.
제갈신우는 그제야 표정이 풀어져서 청운에게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 그보다 조금 전에 연락이 왔네. 사도맹 맹주 철사자의 위치를 알아냈네.”
청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결국은 사도맹이 움직인 건가?
“사황성에서 나온 철사자가 수하들과 함께 진령산맥을 넘었다고 하네. 하루 전에 오장원에서 모습이 발견되었다더군.”
“사도맹 본대가 그와 함께 움직였습니까?”
“아니네. 본대는 자오도를 따라서 이동하고 있다 하니, 머지않아 종남산 아래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하더군.”
청운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내심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젠장! 하필이면 자오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