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도상이 현허진인을 보며 대답했다.
“단주와 함께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했습니다. 다행히 혈마들을 모조리 죽이고 혈륜궁을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허. 주작단만으로 사천혈륜궁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불까지 질렀다고?”
현허진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도상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예,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무량수불. 궁주는? 그 피에 굶주린 자는 어찌 되었나?”
“그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현허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그자가 어떤 자인데 고작 주작단만으로 상대할 수 있었겠나.’
어쨌든 눈엣가시 같던 사천혈륜궁이 주작단에 의해 무너졌다.
회의장 안에 모인 이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무척 기뻐했다.
“주작단과 문 단주가 큰일을 했습니다그려.”
“맞습니다. 놈들의 숨통을 끊었으니 이제 섬서 남부에서 사파의 힘이 한층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모두가 들떠 있을 때 제갈신우만큼은 더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무사,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마도사파와의 전쟁을 막아보겠다며 천운이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일이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사도맹에서 알게 된다면 그냥 넘기지는 않겠지.’
종남파를 공격한 곳이 사파가 아니라면 협상의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사천혈륜궁을 공격한 곳은 무림맹 사신단 중 주작단이었다.
그 사실을 사도맹에서 알게 되면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다.
제갈신우는 그 차이를 알기에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때 현허진인이 넌지시 말했다.
“장로, 이번 일도 무림맹에 보고를 해야겠지요?”
“예, 그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현무단도 위남으로 보내도록 하지요.”
“정말이십니까?”
현허진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혼지마의 증언으로 인해 사파와 싸움을 보류시킨 사람이 제갈신우였다.
그런데 그가 증원군을 보내자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장문인,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사파와의 전쟁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량수불. 알겠습니다.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현허진인이 제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제갈신우는 착잡한 마음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백우선을 내려다보았다.
‘공명 선조님께 죄스럽군. 남이 만들어놓은 함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니.’
절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공명의 후예인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자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니. 기분이 더러웠다.
‘아무래도 신기 녀석과 가문에 도움을 청해야겠어.’
이대로 넘기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제갈세가가 듣도 보도 못한 자들에게 끌려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 * *
한편, 도문척과 마주 선 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혼자서 수천, 수만 명을 상대할 수는 없다. 청운 역시 혼자서 사령회 전체와 싸울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빌어먹게 흐르고 있었다.
도문척과 사령회 고수들 역시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진무사! 싸움을 멈추게 하고 싶으면 힘으로 우리를 굴복시키게!”
한 소리 외친 도문척이 몸을 날렸다.
파밧!
도문척의 신형이 순간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청운은 슬쩍 상체를 틀며 검을 휘둘렀다.
챙! 채재쟁!
연달아 시퍼런 불꽃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청운의 몸도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허공에서 굉음이 들렸다.
콰과광!
어느새 도문척과 청운이 허공에 나타나더니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슈욱!
도문척의 검이 청운의 다리를 향해서 나아갔다. 청운은 빙글 재주를 넘으며 검을 피하고는 곧장 도문척의 가슴을 향해서 검을 찔러 넣었다.
챙!
도문척 역시 그냥 당하지 않았다. 몸을 비틀며 청운의 공격을 빗겨냈다.
청운은 찌르기가 실패하자 허공을 차듯이 밟으며 몸을 띄웠다.
팡!
위로 솟구친 그는 정점에서 빙글 재주를 넘더니 머리를 아래로 향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리리리릭!
검을 아래로 뻗은 그가 회오리바람 돌듯이 빠르게 돌며 곧장 도문천을 향해서 떨어져 내렸다.
“젠장!”
도문척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허공에 떠 있다 보니 몸이 자유롭지 못했다.
위기에 처한 그는 전력을 다해서 청운의 검을 받아냈다.
쾅!
굉음과 함께 그의 몸이 훌훌 날아갔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답게 땅에 처박히지는 않았다.
겨우 땅에 내려선 그는 주르륵 물러선 후 멈춰 섰다.
목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내상을 입은 듯했다.
한편, 도문척에게 강력한 공격을 가한 청운은 삼 장쯤 떨어진 곳에 내려서서 도문척을 바라보았다.
“계속하겠다면 저 역시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많은 피를 볼 생각을 하셔야 할 겁니다.”
도문척은 불만이 많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청운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지미, 누가 이렇게 강한 줄 알았나?’
게다가 무림맹 놈들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까지는 자신과 사령회의 장로들이 고수들을 붙잡고 있어서 그나마 몰아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힘들 듯했다.
그런데 마침 청운이 그에게 말했다.
“부하들과 영마장으로 물러나십시오. 저희 역시 오십 리 밖으로 물러서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자신도 크게 불만이 없었다.
도문척은 청운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바로 대답했다.
“……좋다. 승자의 말에 따라야겠지.”
도문척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을 향해서 외쳤다.
“영마장으로 물러선다! 사상자들을 챙겨라!”
“존명!”
비록 밀리기는 했어도 도문척을 우습게 보는 이는 없었다.
가공할 무공을 펼친 청운과 당당히 맞선 도문척이었다.
사령회 무사들은 사상자를 수습하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청룡단과 백호단도 뒷수습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청운은 그 중간에 오연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아무래도 사도맹주를 빨리 만나봐야겠어.’
청운은 청룡단, 백호단과 함께 오십 리를 물러나서 진을 쳤다.
부상자도 많고 죽은 이들도 많았다.
만약 자신이 없을 때 사령회가 공격해온다면 버틸 수 없을 듯했다.
‘이제는 화산으로 모두 돌아가는 것도 좋지 않아.’
사천혈륜궁이 피로 물든 이상 마도사파도 조용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금 전력을 화산으로 돌려보내면 위남에서 화산 사이는 사령회가 장악하게 된다.
청운은 서찰을 써서 전령을 화산파로 보냈다.
* * *
어둑한 새벽녘. 여명이 떠오르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을 때였다.
깊은 수마에 빠진 화산파에 다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땡땡땡!
조용하던 경내가 여기저기서 들썩거렸다.
종소리는 화산파에 위기가 닥쳤거나 큰일이 생겼을 때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현허진인은 늦은 밤까지 일을 처리하다가 늦게 잠이 든 상태였다.
그런데 위급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울리자, 의관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화산파 제자 하나가 그에게 달려가서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장문인, 자객이 들었습니다.”
“자객? 무슨 말인가?”
“구혼지마 안겸과 그를 지키던 백가장 호위들이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원시천존…….”
현허진인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도호를 외웠다.
안겸은 단순한 포로가 아니었다. 그의 입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니!
게다가 백가장의 호위무사들마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가보자.”
마음을 추스른 그는 화산파 제자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갔다.
사건현장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
현허진인이 나타나자 경비를 서고 있던 화산파 제자들이 예를 취했다.
현허진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고 서둘러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가슴이 핏물로 범벅된 안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걸 보니 잠을 자다가 당한 듯했다.
그리고 몇 사람이 바닥에 쓰러진 채 죽어 있었는데, 그들이 백가장의 호위무사들인 듯했다.
‘괴이하군. 싸운 흔적이 없어.’
현허진인은 단번에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 시신에 다가간 그는 상흔을 살펴보았다.
상흔을 살펴보던 그는 눈빛을 빛냈다.
‘일격에 당했다.’
호위무사들의 이마에 동전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저항한 흔적이 없는 걸 보니 단숨에 당한 듯했다.
‘백가장 호위무사들은 분명히 절정 경지의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반항도 못 하고 당하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약간의 소란만 있었어도 경비무사들이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 시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싸움이 벌어진 것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안면이 있는 자의 소행일 확률이 높다는 말인데….’
그가 나름대로 추리를 하며 상황을 꿰맞추어 갈 때,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백영상과 제갈신우를 비롯한 무림맹 인사들이었다.
“이, 이런……!”
백영상은 호위무사들의 죽음에 두 눈을 부릅떴다.
제갈신우 역시 주위를 살펴보더니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현허진인은 자신의 안일한 대처에 자책했다.
‘증인이 사라졌다. 진무사 말대로 호위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거늘.’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사라졌지 않은가 말이다.
이번 일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두렵기까지 했다.
본격적인 조사는 날이 밝은 후부터 시작되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침입한 흔적은 없는지, 하나에서 열까지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화산파 경내의 이곳저곳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화산파에 들어와 있는 무사들까지도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의심 가는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절정고수 셋이 반항도 못 하고 쓰러졌지 않은가 말이다. 그 정도 무위를 가진 인물은 현재 화산에도 몇 명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의심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정파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다.
* * *
정오 무렵, 문희와 주작단이 화산파로 돌아왔다.
보무도 당당하게 돌아온 그들은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동안 있었던 마도사파와의 싸움을 자랑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제갈신우는 그들의 행동이 탐탁지 않았다. 주작단의 허락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서 마도사파와의 싸움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갈신우는 회의장에 들어와서 전과를 보고한 문희에게 말했다.
“문 단주.”
“예, 장로님.”
“어쩌자고 명령에도 없는 행동을 한 것인가?”
착 가라앉은 제갈신우의 음성에도 문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명령대로 움직이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적도들의 움직임에 맞추다 보니 개별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장에 나간 장수는 상황에 맞게 재량권을 갖는다.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 맞게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일선 지휘관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다.
일선 지휘관은 너무 우직한 것도 좋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자유분방한 것도 좋지 않다.
만일 문희가 전공을 새우지 못했다면 문제가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눈부신 전공을 세웠으니 강하게 나무랄 수도 없었다.
제갈신우는 더 나무라지도 못하고 입을 닫았다.
‘이 일은 나보다 진무사가 나서서 해결하는 게 좋겠군.’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자신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었다.
* * *
구혼지마 안겸이 죽었다는 소식은 전서구를 통해서 곧장 청운에게 알려졌다.
“뭐요? 안겸이 죽어?”
“예, 대인! 뿐만 아니라 백가장의 호위무사도 셋이나 죽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