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175화 (175/257)

# 175

175화

“자네가 사도맹주를 만나겠다고?”

“예, 필요하다면 제가 직접 만나서 그를 설득해보겠습니다.”

제갈신우는 청운을 바라보았다.

청운은 단순한 강호의 무사가 아니다. 금의위 진무사이며, 오호평천대장군이기도 하다.

어쩌면 청운이 나서서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미 흘린 피는 어쩌란 말인가.’

많은 이들이 죽었다. 적의 계략에 의해서건 복수를 위해서건, 지금도 정파와 마도사파가 싸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제갈신우는 청운을 보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말은 충분히 알겠네. 하지만 이제 와서 싸움을 멈추자고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네.”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그럼 알면서도 나서겠다는 말인가?”

“예.”

청운은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제갈신우는 그런 청운이 이해가 안 되는지 다시 물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더 많은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하하, 대의명분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보게. 예를 들어서 놈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든가 말이네.”

청운이나 제갈신우는 학사이자 책사다. 머리를 쓰는 인물들은 무공으로 패해도 머리로 패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자신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제갈신우는 청운도 자신과 같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청운의 입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단호한 말이 흘러나왔다.

“대의를 위해서입니다.”

제갈신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쯧쯧, 고리타분한지는 알았지만, 어찌 이리 신기 녀석과 닮았단 말인가.’

제갈신기도 젊을 때는 대의를 외쳤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실과 타협을 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도 대의명분을 중시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의에 앞서 가문이 먼저였다. 대(大)제갈세가의 안녕이 중요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제갈신우는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청운이 싫지는 않았다.

젊어서인지 몰라도 아직은 풋풋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하지 못하는 당당함이 있었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어쨌든 구혼지마 안겸에 대한 일은 회의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네. 지금도 위남으로 더 많은 무사들을 보내야 한다고 난리이니.”

“별수 없지요. 그들을 설득하려면.”

청운은 안겸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대의에 앞서 명분이 필요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사파와 신나게 싸우는 중이니 말이다.

‘놈들은 분명히 암습을 할 것이다. 불안하지만 백 장로님과 백가장 호위들을 믿어보는 수밖에.’

자신이 안겸 곁을 지킨다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자신이 위남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청운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제갈신우를 따라서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회의장에 모인 군웅들은 청운으로부터 신비세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놀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말도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사파 놈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벌였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맞습니다. 설혹, 그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령회가 칠성도문에서 벌인 혈겁은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장안에 있는 칠성도문의 혈사가 알려졌다. 장안에서 도망친 정파인들이 화산파에 들어오면서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인 것 때문에 말이 많았다.

여자들을 간살하고 어린아이마저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청운이 군웅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칠성도문의 문주인 칠성도제께서도 복수를 잠시 뒤로 미루셨습니다. 그러니 전면전은 잠시만 보류하시지요.”

“칠성도제가?”

“흥! 그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인가?”

군웅들 중 몇 명이 토를 달았다.

“확인해보면 알 일, 제가 왜 거짓말을 한단 말입니까?”

“혹시 또 아나? 시간을 벌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지.”

“거짓이라면 두 번 다시 무림맹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군웅들은 그 말에 서로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청운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저 역시 잔악하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습니다. 당연히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허나 지금은 무익한 피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군웅들은 그의 말을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이보시오, 진무사! 우리가 가만히 있는다 해서 놈들도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어림없는 일이지요. 암요!”

“당장 위남으로 고수들을 보내서 놈들을 쓸어버려야 합니다.”

한 장년이 불만을 토로하자 봇물 터지듯이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쏟아졌다.

청운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파 무사들은 마도 사파와 싸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청운이 가능한 한 막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을 듯했다.

결국 청운은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제가 위남으로 가서 저들을 만나겠습니다. 협상할 수 있는 전권을 주십시오.”

“자네가 사령회 회주를 만나겠다는 건가?”

무림맹의 장로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청운이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를 만난 후 사도맹주도 만날 생각입니다.”

“오래 기다릴 수는 없네.”

“저 역시 협상을 오래 끌 생각은 없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청운에게 모였다. 그중 일부는 입꼬리를 비틀며 비릿하게 조소를 지었다.

청운은 회의가 끝나자 제갈신우와 현허진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일단 군웅들은 그가 협상할 동안 기다려 주기로 했다.

“제가 떠나고 나면 안겸을 암살하려는 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비를 철저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량수불, 알겠네. 경비를 강화하지.”

“진무사,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위남 일이나 잘 처리하게.”

“예, 그보다 사도맹주의 위치가 파악되면 곧장 알려주십시오.”

“그리하겠네.”

청운은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위남으로 떠나야 했다. 지금으로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 * *

청룡단은 위남에서 오 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사령회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오룡의 무공은 그들의 위명이 허명이 아님을 보여줬다. 그들과 함께하는 청룡단은 과연 무림맹의 정예라 할 만했다. 자신들보다 서너 배가 많은 사령회 고수들을 맞이해서 한 치의 밀림도 없이 잘 싸웠다.

수라대와 혈랑대 수백을 베었다. 피해가 누적되자 적극적으로 공격하던 자들이 잠시 주춤했다. 그렇다고 공세로 전환하기에는 여전히 수적으로 열세였다.

수적 열세는 반나절 만에 메워졌다. 백호단과 화산에 있던 무사 중 일부가 도착한 것이다.

그럼에도 숫자에서 우세한 건 아니지만 전처럼 큰 차이는 아니었다.

청룡단과 백호단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개인적인 실력으로는 그들이 더 강했기에 일직선으로 도륙하며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사령회에도 지원군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밀고 들어오는 청룡단과 백호단, 정파의 무사들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다행히 그들의 실력은 혈랑대만 못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실력만 믿고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상당한 피해를 입은 정파 무사들은 일단 다시 뒤로 물러났다.

사령회에서도 공격을 자제하고 수비에 주력했다.

그 바람에 싸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 * *

청룡단과 백호단은 군웅들과 함께 처음 위치까지 뒤로 물러나서 전열을 정비했다.

한 시진 정도 숨을 고르고 부상자들이 상처를 어느 정도 손보자, 백호단 단주 영호천이 말했다.

“다시 공격합시다.”

“천 단주, 놈들의 지원군이 온 것 같은데, 괜찮겠소?”

남궁룡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영호천도 물러서지 않았다.

“남궁 단주 말대로 사령회의 지원 무사들이 늘어나고 있소.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면 지원대가 온다 해도 사령회를 몰아내기 어렵소. 그리고 지금 사기가 말이 아니오. 최소한 중앙까지 들어가서 대치하고 있어야 사기가 떨어지지 않소.”

영호천과 남궁룡의 말을 듣고 있던 군웅 중 두어 사람이 끼어들었다.

“옳은 말이오. 어차피 놈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사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들을 치려면 더 숫자가 늘어나기 전에 쳐야 합니다.”

남궁룡은 모두가 공격하자고 하는데 자신만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계획을 철저히 세운 다음에 시작합시다.”

영호천이 바닥에 지도를 그리면서 자신이 생각한 작전을 설명했다.

“앞서 공격은 너무 단순했습니다. 이번에는 척후를 먼저 보내서 상황을 자세히 살펴가며 전진합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적들을 분산시킨 후 각개격파 하도록 하지요.”

남궁룡도 영호천의 전술을 듣고 동의했다.

“좋은 계획입니다. 그렇게 하지요. 아무래도 저희가 먼저 와서 이곳의 지리를 조금이라도 더 잘 아니 척후는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작전회의를 마치고 군웅들을 점검했다.

남궁룡은 제일 먼저 발 빠른 자들과 은신술을 아는 자들을 뽑아서 척후대를 조직했다.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청룡단원이 백육십여 명, 백호단이 백칠 명쯤 되었다.

영호천과 남궁룡은 그들을 넷으로 나누었다.

청룡단이 이조, 백호단이 이조.

청룡단은 좌우를, 백호단은 정면과 후위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정파의 무사들은 상황에 따라서 지원을 하기로 했다.

전열을 정비한 군웅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영마장을 향해 전진했다.

무림맹이 다시 움직이자 사령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림맹이 위남에 들어설 때까지 공격하지 않았다. 좀 더 안으로 끌어들여서 한 방에 보내버릴 작정이었다.

척후가 먼저 앞서 가며 사령회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다행히 적의 함정은 없었다.

사령회의 공격이 시작된 것은 영마장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을 때였다.

“정파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줘라!”

와아아아아!

* * *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한 시진 이상 쉬지 않고 싸웠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영마장이 코앞이었다.

청룡단과 백호단, 정파의 군웅들이 영마장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주! 마도 놈들이 세 방향에서 빠르게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

남궁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령회 본진이 왔나 보군.’

세 갈래로 오고 있다면 포위하겠다는 심산인데…….

‘지금 인원으로 그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남궁룡의 머리가 생각과 동시에 절레절레 흔들렸다.

우세한 상황이라 하나 차이가 크지 않다. 사령회 본진이든 아니든 삼면에서의 공격이 더해지면 현재 인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피해를 보면 수비조차 힘들어져.’

마음을 정한 남궁룡은 영호천 쪽을 향해 소리쳤다.

“천 단주! 놈들이 오는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일단 물러납시다!”

영호천은 이마를 찌푸렸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알겠소이다! 모두 물러선다!”

“물러서라!”

청룡단과 백호단, 정파의 무사들은 서둘러서 뒤로 물러났다.

도주도 쉽지 않았다. 사령회 무사 중 일부가 후퇴하려는 무림맹 무인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우리가 막을 테니 물러서시오!”

남궁룡이 소리치고는 사령회 무사들을 상대했다.

그때 앙천광소와 함께 한 사람이 날아들었다.

“우하하하! 여기서 제왕검형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섬뜩함을 느낀 남궁룡은 공격을 멈추고,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으음…….”

그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곤룡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커다란 검을 들고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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