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강서성의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 운성은 그리 크지 않은 읍성이었다. 수백 년 전 광산이 발견되면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하더니 강서성을 대표하는 곳으로 변했다.
운성의 남부에 위치한 커다란 장원에 한 마리 검은 매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매가 아니었다. 짙은 검은색 깃털은 윤기가 흘렀고 매의 눈과 부리가 금색을 띠고 있었다.
천산비응.
천산에서 자라는 영과를 먹고 산다는 전설의 매였다.
천산비응은 유려한 몸짓으로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땅을 향해서 내려앉았다.
후두두둑.
“어이구 이놈! 잘 있었느냐.”
천산비응은 나이가 지긋한 선풍도골 노인의 왼손에 내려앉았다. 노인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천산비응이 목을 비틀었다.
노인은 천산비응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발목에 걸려 있는 작은 원통으로 손을 가져갔다.
툭, 소리와 함께 원통의 입구가 열렸다.
노인은 원통 안에서 돌돌 말린 작은 종이를 꺼냈다.
“어디 보자꾸나. 무슨 일이 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전서의 내용을 읽던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을 때 그의 눈에서 지옥불이 솟구쳤다.
“감히!”
와직.
노인은 곱게 폈던 전서를 와락 구겼다. 천산비응이 움찔 놀랐지만, 노인의 손길에 얌전해졌다.
노인은 구겨진 전서를 들고 어디론가 향했다.
노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백가장주가 쉬고 있는 집무실이었다.
무언가 서류를 보고 있던 백가장주는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오는 노인을 힐끔 보더니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대주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끄응.”
백철군은 노인의 앓는 소리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대주라 불린 노인은 백가장에 몸을 의탁한 백야의 주인이었다.
백철군은 무언가 할 말이 잔뜩 있는 백야대주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가주, 이걸 보시오.”
대주는 움켜쥔 손을 펼쳐서 구겨진 전서를 백철군에게 보여주었다.
백철군은 허공섭물을 펼쳐서 구겨진 전서를 끌어당겼다. 전서는 날개라도 달렸는지 백철군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백야대주를 힐끔 본 백철군은 전서를 빠르게 읽었다.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가 곧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펴졌다.
“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호위대가 많이 상했군요.”
“호위대의 무공은 모두 절정이오. 그런데도 절반이 부상이라고 하지 않소?”
전서는 백영상이 보낸 것이었다.
호위를 더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백철군은 흥분한 표정의 백야대주를 달래기라도 하려는지 차분하게 말을 했다.
“대주, 이 요청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난번 호위대 파견도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걱정하지는 마세요. 청청이가 화산파로 간다고 하니 당장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가주, 종남이 혈겁에 무너졌소. 화산도 안심할 수 없소이다. 더군다나 호위대 절반이 상처를 입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하려고 이리 태평이신 게요?”
백철군의 대답에 대주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백철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청청이 곁에 그 녀석이 있습니다. 적어도 청청이를 지켜줄 실력은 되는 녀석입니다.”
“가주, 어찌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하시는 게요? 청청이는 하나밖에 없는 가주의 금지옥엽이며 백가장의 적통입니다. 그 진무사인지 개뼈다귀인지 모를 애송이에게 청청이를 맡기다니요? 당장 아이들을 파견해야 합니다.”
백야대주는 펄쩍 뛰었다. 백철군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는 강하게 백철군에게 요구했다.
“당장, 호위대와 의원을 파견해 주시오.”
“하아, 일단은 알겠습니다. 절차가 있는 것은 아시지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제가 다른 분들께는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에잉!”
백야대주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여기서 더 백철군에게 요구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백철군의 집무실을 나섰다.
백철군 역시 속이 좋지 않은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밖으로 나온 백야대주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만년빙굴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냉기를 뿜어내던 대주가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적월.”
스르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시커먼 형상이 생겨났다.
백색 옷에 백색 두건을 두른 자였다.
그는 나타남과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충!”
대주는 적월이라 불린 사내를 보더니 무엇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구나.”
“…….”
적월은 고개를 숙이며 대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철군과 대주가 한 말을 처음부터 지켜봤다. 그러나 자신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 백가장의 주인과 백야의 주인이 결정할 문제였다.
백야대주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림 없을 것 같은 그의 두 눈이 살짝 흔들렸다.
“난 말이다, 네 나이 때 유유자적한 삶이 싫었다. 그래서 내가 대주가 되면 밖으로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백야대주는 옛일을 생각하며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았다. 회한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수염을 잡으려던 아이의 눈을 보게 되었다.”
“…….”
“그 맑은 눈동자와 아름다운 미소가 지난 이십 년간 내 발목을 잡았지.”
“…….”
백야대주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적월이 처음과 같은 자세로 있었다.
백야대주의 두 눈에서 한광이 폭사되었다.
“가서 너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담아서 보고하라.”
“존명!”
스르륵.
적월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홀로 남은 백야대주는 다시 은은하게 빛을 뿌리고 있는 달을 보았다.
* * *
청운은 백영상과 대화 후에 다시 회의장을 찾았다.
청운이 다시 돌아오자 의아한 듯 제갈신우가 물었다.
“쉬지 않고 왜 온 것인가?”
“예, 장로님. 다름이 아니라 요상결에 능통하신 분이 계신지 알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부상이 심하다는 백가장 무인 때문인가? 의약당주 말에 의하면 요양을 잘하면 나을 수 있다던데, 급한가 보군.”
청운은 제갈신우의 물음에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예, 사정이 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려운 일은 아니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제갈신우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지 물었다.
청운은 제갈신우가 자신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모두가 듣는 상태에서 말할 수 없어 제갈신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종남파를 공격한 자입니다. 사도맹이 종남파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할 증인입니다.
-흠, 역시 그렇군.
제갈신우는 청운의 확답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한쪽에 앉아 있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을 보며 말했다.
“성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한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성의라 불린 노인은 도사복을 입고 있는 만수성의였다.
청성파 출신인 그는 무림맹에서 의약당 부단주를 맡고 있는 실력자였다. 더욱이 그는 요상결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청운은 성의와 함께 안겸을 치료하기 위해서 회의장을 나섰다.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제갈신우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장로님, 부상자가 누구입니까?”
“진무사가 전음으로 뭐라고 하던가요?”
제갈신우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내일이면 밝혀질 일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회의장에 모인 인물들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지만 제갈신우가 입을 닫자 더 묻지 않았다.
청운은 만수성의와 함께 안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만수성의는 백영상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겸을 살핀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히 치료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환자에게 좋은 영단을 쓴 것 같군요.”
“예, 백가장의 비전영단을 사용했습니다.”
백청청이 대답했다.
만수성의는 백청청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고개를 돌려 청운에게 말했다.
“완치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데까지는 이삼 일이면 될 것 같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겸이 깨어나지 않아서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었다.
만수성의는 곧장 치료를 시작했다.
청운은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백영상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장로님, 이제부터 이삼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백영상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청운에게 물었다.
“안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다면 분명히 습격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으음, 살수를 보내거나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수도 있겠구려.”
얼마 전에 종남파가 습격을 받았었다.
종남파가 화산파에 비해서 떨어지는 실력이라 할지라도 같은 구대문파에 속할 만큼 강한 문파였다. 화산파라고 해서 안전하다는 확신은 없었다.
“물론입니다. 그러니 안겸에 관한 경비를 강화해 주셨으면 합니다.”
“인원이 부족하지만 그리하겠소.”
* * *
다음 날, 청운은 제갈신우를 만났다.
제갈신우가 청운에게 물었다.
“진무사, 만수성의께서는 아직도 그자를 치료하고 있는가?”
“예, 경과가 좋습니다. 장로님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인사치레는 되었고. 그보다 얼마나 걸린다고 하던가?”
“성의께서 이삼 일이면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흠, 잘되었군, 그런데…….”
제갈신우는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우선을 살랑거린 그가 청운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을 빨리 열어야 할 것 같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놈들이 움직였네.”
“놈들? 혹, 사도맹이……?”
“그렇다네.”
끝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사도맹에서 무인들을 파견했다면 무림맹에서도 본진을 파견할 것이다.
‘정사대전이 벌어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증인이 있으니 양측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갈신우가 청운에게 말했다.
“사도맹이 장안에 들어선다면 그때는 우리들 힘으로 막지 못할 수도 있네.”
“어느 정도 인원이 오는지 알 수 있습니까?
“파악 중이네. 그런데 사도맹주가 올 수도 있다는 첩보가 있었네.”
최악이다. 사도맹주가 움직였다면 그에 걸맞은 인원이 몰려올 것이다.
“위남 쪽도 사령회의 정예들이 대거 몰려온 것 같네. 청룡단과 후발대만으로 힘들지 몰라서 백호단을 마저 보냈네.”
“백호단을 위남에 보냈다고요?”
“그렇다네.”
“자네가 반대해도 어쩔 수 없네. 그냥 물러서기에는 이미 많은 피를 흘렸어.”
청운은 제갈신우를 보았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증거가 있건 없건 사파와 끝장을 보겠다는 표정.
하지만 그리 흐르게 놔둘 수는 없었다.
“사도맹 쪽과 싸워봐야 미지의 적만 이로울 뿐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사도맹과 싸울 수만은 없습니다.”
“안 싸울 수도 없지 않은가. 이미 위남 같은 경우는 우리가 물러서려고 하면 분명히 뒤를 칠 것이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청운이 제갈신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제가 사도맹 쪽을 만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