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67화
청운은 사로잡은 구혼지마 안겸을 대리고 신안을 출발했다.
경공을 펼쳐서 간다면 종남산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험준한 산맥만 아니라면 한나절 만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포로를 데리고 가다 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청운 일행이 막 진령의 깊은 계곡에 들어섰을 때였다.
저만치 앞쪽 숲속에서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다. 일부가 나무에 가려지긴 했지만 이십 명은 될 듯했다.
그들을 바라본 청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바로 옆에 있던 혈황도 그들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놈들 같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청운도 이제는 신비세력에 노룡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신비세력은 노룡회 외에도 두 개의 하부 세력을 더 거느리고 있었다.
안겸은 바로 그중 하나인 신혈교(神血敎)의 신혈사에게 지시를 받고 종남을 공격하는 무리에 합류한 것이었다.
아마 저 앞에 나타난 자들은 바로 신혈교의 무리일 가능성이 컸다.
[숨어 있는 자들도 있구나. 생각보다 숫자도 많은데?]
-걱정되세요?
어딘지 불안한 표정을 짓는 혈황의 말에 청운은 담담히 물었다.
그런 청운을 힐끔 바라본 혈황이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네 녀석이 변변치 않아서 그래. 내가 얘기 안 해줬던가? 나 때는 말이다….]
혈황이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청운은 수천 명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곳에 홀로 들어가서 박살 냈다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거리 때문인지 이렇다 할 위협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비세력 놈들이라면 경시해서는 안 되었다.
“아무래도 반가운 손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백 소저는 뒤로 물러서 있으십시오.”
백청청도 앞에서 나타난 자들을 본 터라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함께 싸워요.”
“뒤에도 적이 있을지 모르오. 앞에 있는 자들은 내가 맡을 것이니 포로를 지켜주시오.”
“하지만…….”
백청청이 고집을 피우려 하자 백영상이 나섰다.
“그렇게 하겠네. 저자는 우리가 지킬 테니 걱정 말게.”
“알겠습니다.”
청운은 백청청을 백영상에게 맡겨 놓고 앞으로 나섰다.
“가가 힘내세요! 뒤에 제가 있으니까요!”
백청청이 뒤에서 응원을 보냈다.
숲속에서 나타난 자들은 이십여 명쯤 되었다.
청운이 다가가자 한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진무사 이청운인가?”
“그렇소. 나를 기다린 거요?”
“맞아. 덕분에 날도 더운 날 전력으로 경공술을 펼쳐봤지.”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중년 사내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청운은 그 중년 사내를 살펴보았다.
‘흠, 혈황 님 말씀대로 긴장해야겠는데?’
생김새만으로 따지면 백면서생이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이 절정을 넘어선 고수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하지만 내재된 기운은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강하게 느껴졌다.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개 발에 땀나도록 달려온 거요? 그냥 조용히 처박혀서 숨죽이고 있지.”
“그냥 놔두기에는 아는 것이 많은 놈이어서 데리러 왔지. 물론 입도 막아야 할 것 같고.”
중년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섬뜩한 느낌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청운은 사내의 말속에서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당신도 종남파를 공격했을 때 있었나?”
“좋을 대로 생각해.”
“이름이 어떻게 되지?”
“이름? 왜? 내 정체가 알고 싶나? 어차피 죽을 놈인데 이름은 알아서 무얼 하게? 그냥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한테 물어봐.”
“숨어 있는 친구들도 나오라고 하지 그래. 한꺼번에 상대해줄 테니까.”
청운은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때, 청운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적이다! 조심해라!”
“그자를 잘 지켜요!”
예상했던 대로 숨어 있던 자들이 백가장 무사들을 공격한 듯했다.
하지만 청운은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중년 사내의 몸에서 미증유의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와 별 차이 없겠는데?’
청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생각보다 상대가 강했다. 혈황의 말대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지도 몰랐다.
그때 중년 사내가 살기를 일으키며 말했다.
“저쪽도 시작했는데 우리도 해야지?”
“언제 시작하나 했지. 덤벼라!”
“크하하하! 좋아! 내가 여기까지 왕림했는데 쉬운 상대면 너무 섭섭하지! 쳐라!”
파바바바밧!
중년 사내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무기를 꺼내든 그들은 곧장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챙!
청운도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았다.
파지징.
검신에 강력한 기운이 모여들더니 형체를 갖추었다.
청운이 검을 들어 원을 그리자 검의 잔상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환우무상검.
청운의 몸 주위로 여덟 자루의 검이 생겨나더니 쏟아지는 검기를 휩쓸었다.
따다다다당!
청운의 검에서 뻗어나간 검강은 검기를 수수깡 자르듯이 잘라버렸다. 단 한 줄기의 검기도 청운의 검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상대의 검기를 차단한 청운은 재차 검을 뻗어서 반격을 가했다.
두어 명이 검세에 휩쓸려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어딜!”
후웅!
구경하던 중년 사내가 양손을 휘저었다.
그의 손에서 백색의 하얀 기운이 구슬처럼 뭉쳐서 솟구치더니 청운의 검세와 뒤엉켰다.
콰콰콰쾅!
거대한 폭발과 함께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폭사했다.
순간적으로 청운의 시야가 흐려졌다.
‘이런!’
생각지 못한 상황에 청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곁에 있던 혈황이 다급하게 외쳤다.
[위!]
청운은 본능적으로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상뇌!’
슈슈슈슉!
청운의 검에서 세 줄기의 검강이 솟구쳤다.
번개처럼 뻗어 나간 검강은 찰나에 허공을 휘감았다.
콰과꽝!
무언가 검강과 부딪치며 폭발했다.
그 직후 청운은 몸을 날려서 그 자리를 피했다.
콰앙!
청운이 있던 자리에 강력한 충격이 전해졌다. 조금만 머뭇거리거나 늦었으면 일격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혈황이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외쳤다.
[조심해라! 광천마의 광원폭마권이다!]
처음 듣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혈황의 음성에 노기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놈이 펼친 무공이 혈황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혈황이 청운의 의문을 풀어주려는지 빠르게 외쳤다.
[광구(光球)를 폭발시켜서 상대의 눈을 멀게 하는 조잡한 무공이다. 혈황진기로 눈을 보호하고 싸워라!]
청운은 혈황진기를 끌어올려서 눈을 보호했다.
우웅!
청운의 눈에 푸르고 붉은 막이 은은하게 서렸다.
시야가 밝아진 순간 눈앞에 거대한 빛 덩어리가 보였다.
슈슉! 슈슈슉!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빛의 구체가 날아들었다.
청운은 곧장 쌍장을 쳐 냈다.
쾅!
굉음과 함께 청운과 중년 사내가 두어 걸음씩 물러섰다.
우뚝 멈춰선 청운은 오른발을 들어서 강하게 바닥을 찍었다.
쿵!
콰콰콰쾅!
땅거죽이 솟구치며 광채와 부딪쳤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뒤로 훌쩍 물러선 중년 사내가 조롱하듯 말했다.
“실력이 대단하다더니, 헛소문이었나? 왜 이리 힘을 못 써?”
조롱하는 중년 사내의 음성에도 청운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곁에 있던 혈황이 눈을 부라렸다.
[잔재주나 펼치는 광천마 후예 주제에 어디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청운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혈황이 분노한 것 같았다. 부르르 몸을 떠는 그의 몸 주위로 붉은 혈기가 생성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광천마라는 자에게 원한이 있으신가 보네.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걸 보니.’
“크하하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나?”
예의 사내가 청운을 조롱하며 공격했다. 신혈교 무사들도 진법을 펼치며 청운을 몰아붙였다.
하나하나가 절정 수준에 이른 자들이었다.
청운은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 와중에도 중년 사내는 계속 입을 놀렸다.
“스승에게 쥐새끼처럼 피하는 것만 배운 것이냐?”
슈슈 슉!
가시처럼 날카로운 빛 덩어리가 청운의 몸으로 쏟아졌다.
청운은 잔상을 남기며 몸을 빼내서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땅에 내려섰다.
중년 사내 역시 거리를 두고 앞에 내려서며 조롱하듯이 말했다.
“비루먹은 강아지 새끼도 아니고, 쯧쯧, 네놈 스승이 누군지 얼굴 한 번 봤으면 좋겠구나.”
그 말에 곁에 있던 혈황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에게는 방법이 없는 걸.
피하느라 말 한마디 안 하던 청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 스승님을 보고 싶다고?”
순간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아서 밀렸을 뿐이었다. 상대가 강하긴 하나 일대일이라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상대를 양보하기로 했다.
저런 자에게는 최대한 괴로움을 주고 싶은데 자신은 마음이 약해서(?) 심하게 손을 쓰지 못한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뭐야? 보여줄 수 있어? 황궁무고에서 얻었다는 비급이 품 안에 있나 보지?”
“소원이라면 만나게 해주지.”
중년 사내의 두 눈은 탐욕으로 가득 차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후후후. 그래, 네놈을 죽이고 네놈이 가진 비급을 챙기는 것도 괜찮겠어.”
청운은 슬쩍 혈황을 불렀다.
-혈황 님, 원한이 있는 자의 후예 같은데, 대신 싸워보실래요?
[크크크, 오랜 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목숨은 붙여 놓으십시오. 알아볼 게 많으니까요.
[알았다!]
혈황이 환하게 웃으며 청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둘이 겹친 순간, 한 줄기 맑은 소리가 청운의 몸에서 울렸다.
중년 사내는 흠칫 놀라며 청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응?”
무언가 달라진 듯 느껴졌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청운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듯했다.
처음의 부드럽고 얌전하던 학사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청운의 전신에 지독한 어둠과 절대자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중년 사내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숨이 막혀왔다.
주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머, 뭐야? 내가 물러났다고?’
신혈교 삼태사 중 하나인 자신이 기세에 밀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에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후아아아악!
중년 사내, 조완은 심법을 운용해서 기운을 외부로 뿜어냈다.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주위를 휘돌았다.
“죽여 버리겠……!”
그때 한 줄기 차가운 목소리가 중년 사내의 귓전을 때렸다.
“나를 보고 싶다고?”
내공을 이용한 음성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말이었다.
그러나 조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헉!”
멈칫한 그는 청운을 바라보았다. 청운에게서 붉은 기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두 눈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듯했다.
“광천마 따위의 후예가 나를 보고 싶어 했단 말이지?”
“어, 어떻게 조사님을……?”
조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자신의 근원을 아는 자는 본교의 몇 명뿐이다. 그런데 저 애송이 놈이 어떻게 자신이 광천마의 후예라는 것을 알아본 걸까.
조완은 안력을 돋워 청운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청운의 몸을 휘어 감고 있는 듯했다.
‘응? 뭐지?’
그는 내공을 두 눈에 집중시켜서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혀, 혈룡?”
중년 사내는 두 눈을 부릅떴다.
문득 전설처럼 전해지는 어떤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혈룡이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쳐라.”
스승님께 들었던 이야기였다.
스승님께서는 사조님께 들었다고 했다. 사조님은 또 그 위의 사조님께 듣고…….
본능적인 공포가 조완의 평점심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쳐! 어서 저놈을 공격해!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