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화
“어서 오너라. 그래, 내게 볼일이 있다고?”
“니에, 황제 폐하의 밀명을 받고 움직이고 있사온데, 태친왕 전하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이리 달려왔사옵니다.”
“흠, 도움을 받고 싶다?”
“니에.”
정 소감은 본론을 꺼내기 전, 태친왕 곁에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양 태감을 슬쩍 바라보았다.
마침 양 태감 역시 곁눈질로 정 소감을 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얽혔다.
양 태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 소감은 그걸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왕야께서 기분이 안 좋으시군.’
환관들에게는 그들만이 사용하는 수신호가 있다. 모시는 분의 기분이 나쁜지, 기쁜지 미리 알려주는 신호였다.
양 태감은 방금 태친왕의 기분이 나쁘다는 신호를 보냈다.
정 소감은 얼굴에 가득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과장되게 말했다.
“태친왕 저언하! 소인 평소 전하를 한번 뵙는 게 소원이었사옵니당!”
정 소감이 동문서답을 했지만 태친왕은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정 소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
정 소감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구화보전을 운용했다.
구화보전을 운용하면 몸에서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온다. 상대를 홀리는 효과는 없지만,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숨어 있었다.
“영민하신 저언하의 용안을 이렇게 뵙게 되다닝! 소오인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당!”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 같은 표정과 간드러진 목소리가 대전을 가득 메웠다.
아무 반응 없던 태친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허허, 짐을 그리도 보고 싶어 했다니, 이런 만고에 충신이 있나!”
대전에서 지켜보던 대신들이 입을 쩍 벌렸다.
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아니, 코 맹맹한 소리로 칭찬 좀 했다고 만고의 충신 소리를 듣다니.
그렇다고 당장 나서서 분위기를 깰 수도 없었다.
정 소감이 오기 전까지, 왕야에게 모종의 일로 주야장천 깨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에게 정 소감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하! 정 소감에게 상을 주시옵소서.”
“그러하옵니다! 저언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정 소감을 칭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흡족한지 태친왕은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소감은 겉으로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우리 동창에서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있는 거 같아…….’
* * *
화산파는 무림인들로 북적거렸다.
경내는 물론이고 화산 인근에도 화산파를 돕기 위해서 많은 무림인이 몰려온 상태였다.
화산파 수뇌부와 무림맹의 간부들, 그리고 무림 인사들은 매일 모여서 회의를 했다.
회의를 주재하는 인물은 제갈세가의 제갈신우였다.
천뇌 제갈신기의 사형이며 무림맹 장로 중 영향력이 큰 사람 중 하나.
덕분에 그의 말은 화산파 장문인에 버금갈 정도로 무게가 있었다.
제갈신우는 무림 인사들을 둘러보다가 정보를 담당하는 군사 월평에게 물었다.
“사령회 움직임은 어떤가?”
무림맹 산서지부가 사도맹의 하진지부를 공격해서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다고 했다.
속은 시원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사도맹이 더 날뛸 테니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만 한다.
아마 사도맹이 공격해온다면 제일 먼저 사령회가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예, 저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회주 도문척이 무사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곧 어떤 행동이 있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 의외군. 그들이 바로 달려오지 않고 웅크리다니.”
제갈신우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때 무림맹 간부 하나가 말했다.
“속임수가 분명합니다, 장로! 놈들이 어떤 놈들입니까? 본 맹이 몰려오자 잠시 꼬리를 말았을 뿐, 곧 이빨을 드러낼 것입니다.”
“맞습니다, 장로! 놈들을 믿으면 안 됩니다!”
“개구리도 멀리 뛰기 전에 웅크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놈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군웅들이 너도나도 소리쳤다.
제갈신우가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 말게. 노부는 그들을 절대 믿지 않는다네.”
그의 말에 회의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가 다시 말했다.
“종남파의 사안이 아니어도 마도는 반드시 없애야 할 자들이네. 산서지부도 그래서 놈들을 친 것일 게야. 어쨌든 놈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움직이면 되는 일이네.”
몇몇 사람의 눈빛이 빛났다.
마도 무리를 그대로 놔두는 게 분하던 차에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화산파 장문인인 현허도장이 입을 열었다.
“일단 사신단 중 하나를 보내서 코앞부터 정리하는 게 어떻겠소?”
제갈신우는 현허진인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장문인, 코앞이시라면… 위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이다. 본진을 치지는 않는다 해도 일단 주변은 정리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위남에는 사령회의 분타인 영마장이 있다.
그들은 현재 사령회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군웅들이 현허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갈신우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현허진인이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화산파 제자들이 속한 청룡단이 출전하기를 바라나 보군.’
이 기회에 화산의 명성을 높여보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일단 현허진인의 뜻에 따라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청룡단을 보내도록 하지요.”
“흠, 좋은 생각이오.”
“그리고 위남에 대한 순찰 임무를 수행 중인 주작단으로 하여금 보조하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벌어지던 그 시각.
요희가 이끄는 주작단이 화산을 내려가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사신단이 하루씩 교대로 순찰을 돌았는데 오늘은 주작단 차례였다.
* * *
화산과 위남 사이의 작은 마을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인들 때문에 술렁거렸다.
십여 명의 여인들은 모두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곱고 아름다웠으며 늘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중앙에 있는 백색 비단을 입은 여인의 외모는 압도적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남자 중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어찌 저리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선녀가 인세에 강림한 걸까? 아니지, 선녀보다 더욱 아름답지 않은가?”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
말이라도 한번 걸고 싶었지만 사내들은 그녀들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여인들이 하나같이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용기를 내서 말을 건 자도 있었지만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흘리는 기도를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객잔 중앙에 자리한 그녀들을 향해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다가갔다.
하나같이 험악한 분위기의 사내들이었는데 모두 병장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곧장 걸어가서 여인들 바로 앞에 섰다.
“어이쿠!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왔다더니, 정말이었네.”
선두의 덩치가 좋고 강인한 턱을 지닌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하자, 뒤에 있던 사내들이 좋다고 낄낄거렸다.
“형님, 간밤에 커다란 뱀이 온몸을 감싸길래 흉몽인지 알았더니, 하늘에 올라 용이 될 선녀들이 제 몸을 휘감았나 봅니다.”
“낄낄. 우리 성님 오늘 땅꾼이 되는 것이여?”
“형님, 몸보신 한번 제대로 하겠습니다. 저희도 한 사발씩 주십시오.”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떠들어 대도 여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모습에 기분이 상한 듯 선두의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섬서십삼객이다. 나는 그 첫째인 여산대협 곽상이고, 보다시피 여기 있는 대협들은 내 동생들이지.”
사내의 소개에 사내들이 환호하며 떠들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곽상은 여인들이 자신들의 기세에 눌려서 얼어붙었다고 생각했다.
신이 난 곽상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고 식탁 중앙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겁먹을 것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안 그러면 모두 겁탈을 해버릴 테니까.”
곽상은 좌우를 둘러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중앙에 앉아 있던 문희가 피식 웃음 지으며 곽상을 보았다.
그 모습에 곽상은 속삭이듯이 문희에게 말했다.
“아아!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어차피 전부 먹어줄 테니까. 크하하하.”
곽상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무림맹 무사들이 화산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정보 수집이나 하겠다고 나선 길에 뜻밖의 횡재를 했다. 하나같이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들이었다. 전부 끌고 가서 첩으로 삼든 노리개로 삼든 데리고 놀 생각에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때 문희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여산대협이라……. 사령회 소속의 여산변견이 동내 똥개들을 거느리고 돌아다닌다던데. 혹시 아나?”
곽상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뭐야! 이년이 감히 우리를 놀리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호오, 요즘 개는 말도 잘하네.”
챙!
곽상이 검을 뽑아 들었다.
신호라도 되는지 그의 동생들도 무기를 들었다.
“네년! 주둥아리를 잘못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제압해!”
사내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려 할 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장한 십여 명이 일어나서 다가왔다.
처음에는 평범한 자들 같았는데, 걸음을 옮기면서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어디서 감히 단주께 망발이냐!”
고함과 함께 몇 사람이 섬서십삼객이라 칭했던 자들을 공격했다.
“뭐야, 이놈들은?”
곽상이 버럭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온 자들도 몸을 돌려서 다가오는 자들의 공격에 맞섰다.
파바바방.
투캉! 채재쟁
곽상과 그의 일행들 무공도 약하지 않아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단주인 문희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은 주작단 단원들은 전력을 다해서 그들을 몰아붙였다.
결국 섬서십삼객이라 칭했던 자들은 이십여 수만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졌다. 개중 서너 명은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섬서십삼객이 모두 쓰러지자, 주작단 제일조장 강기문이 문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단주, 모두 잡았습니다.”
“수고했어요, 강 조장. 마침내 마도의 졸개가 미끼에 걸려들었군요.”
문희가 환하게 웃어주자 강기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현천문의 일대제자로 어려서부터 기재 소리를 들을 만큼 무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무림대회에 출전한 그는 육십사강에 올랐는데, 그 덕분에 주작단 조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 만족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문희를 단주로 모시는 조장 자리 아닌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자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앉아 있던 문희가 일어났다.
“감히 백주에 여인을 희롱하고 겁탈을 말하다니. 역시 사파 놈들은 용서해서는 안 돼요.”
서슬 퍼런 문희의 말에 붙잡힌 사내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설마 눈앞의 선녀같이 생긴 여인이 무림맹 인물인지는 상상도 못 했다.
“강 조장, 이자들을 심문해서 정보를 최대한 캐내세요.”
“예, 단주.”
“아마 사도맹의 졸개일 가능성이 커요 마도인을 다루는 데 인정을 둘 필요는 없으니 고문을 해도 좋아요.”
곽상은 반각도 되지 않아서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불었다.
그는 위남 근처에 있는 영마장의 순찰 당주였다.
화산파에 모인 무림인들의 움직임을 염탐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곽상의 이야기를 다 들은 문희가 강기남에게 말했다.
“다른 조를 모두 부르세요. 영마장을 공격하겠어요.”
“영마장을 말입니까?”
“그래요. 이 기회에 근처에 있는 마도 놈들을 정리하는 게 좋겠어요.”
평소의 강기남이었다면 잠깐쯤이라도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희에게 넋이 반쯤 빠진 그는 오히려 의기가 솟구쳤다.
“알겠습니다, 단주. 마도 놈들을 칠 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강 조장이 선봉에 서주세요.”
“예, 단주!”
강기남이 힘차게 포권을 취하고 돌아섰다.
그의 등을 바라보는 문희의 입가에 요사한 미소가 맺혔다.
‘호호호호, 싸울 거면 화끈하게 싸워야지, 왜 눈치만 봐? 하여간 정파 놈들의 위선은……. 어디 내가 멍석을 깔아줄 테니 마음껏 싸워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