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음양장 지객당에 앉아 있던 청운은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입 안 가득 그윽한 차향을 음미하고 있을 때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자 좋구나.]
청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혈황을 보았다.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네 녀석 말대로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 지하에 있는데, 입구를 지키는 자들이 있어서 네가 은밀하게 들어가기는 어렵겠더구나.]
청운은 혈황에게 음양장 안을 둘러보고 수상한 곳이나 물건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청운이 차를 마시는 동안 혈황은 음양장을 구석까지 살폈고 지하로 연결되는 문을 발견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여러 가지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경비무사들이 은밀하게 숨어서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놈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때려잡고 지하도 살펴봐야죠.
지금 들쑤셨다가는 눈치채고 도망칠지도 모른다.
잘못하면 혁련휘 짝이 날 수도 있다. 금의위를 통해서 놈은 추적하고 있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흔적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혈황에게 말했다.
-지하에는 뭐가 있던가요?
[이런저런 물건이 있었다. 전리품 같더구나. 아마 놈이 살행을 하고 챙긴 물건들 같았다.]
-취미가 그리 좋은 놈은 아니군요. 다른 것은 없던가요?
[글쎄, 한쪽에 서류도 있던 거 같던데…….]
그때였다. 혈황이 고개를 획 돌리며 미간을 좁혔다.
[응?]
-왜 그러십니까?
청운은 혈황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혈황은 지객당 창문 너머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
-예?
[청청이가 사고를 치고 있는 것 같다.]
청운은 혈황이 보고 있는 쪽을 보더니 인상을 와락 구겼다.
공력을 끌어올려서 바라보니 가공할 기운의 파장이 느껴졌다.
‘또 무슨 짓을……!’
응양장을 나선 청운은 객잔으로 달려갔다.
저 앞에, 백청청이 쉬고 있는 객잔 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 굉음이 들렸다.
쿵!
쩌저적!
창운은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혈황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그 녀석, 청청이 일이라면…….]
비천무영신법을 극성으로 펼친 청운은 객잔을 바라보며 눈을 치켜떴다.
객잔 한쪽이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무너진 객잔 안쪽에 서 있는 백청청과 호위무사들이 보였다.
그런데 호위무사들이 백청청을 보호하듯이 붙잡고 있었다.
무언가 급박해 보이는 모습.
청운은 내공을 더 끌어올리고 속도를 높였다.
순간, 앞으로 쭉 날아간 청운은 곧장 부서진 곳을 통과해서 객잔 안에 내려섰다.
“소저, 괜찮소?”
“가가.”
청운이 나타나자 호위무사들이 백청청 곁에서 떨어졌다.
청운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백청청의 낭패를 당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멀쩡하던 옷이 여러 군데 찢어져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곳은 가슴 부위에 난 네 개의 구멍이었다.
“설마…… 역천마지?”
청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역천마지의 흔적이 백청청의 가슴에 찍혀 있단 말인가?
백청청은 청운이 자신의 가슴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가슴을 밑에서 받쳐 더욱 부각시켰다.
“보기가 좀 안 좋죠?”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청운이 황급히 사과했다.
“아! 미, 미안하오. 그런데… 괜찮소?”
“예… 괜찮아요.”
백청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청운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기쁘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찢어지게 놔둘 걸 그랬나?’
그런 마음마저 들었다.
그때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험험, 진무사. 청청이는 멀쩡하니 걱정 마시게.”
백영상이었다.
“저 녀석은 옷 속에 몸을 보호하는 호신갑을 입고 있다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백 소저와 싸운 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 있네.”
청운은 백영상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얼굴이 엉망으로 된 자가 꼬꾸라져 있었다.
죽지 않았음에도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니 혈도를 제압당한 듯했다.
그런데 피부가 무척 검었다.
제갈신기가 보여준 강호인명록상의 구혼지마 안겸처럼.
아니나 다를까, 백영상이 말했다.
“자네가 찾는 구혼지마 같네.”
청운이 보기에도 구혼지마 안겸이 분명해 보였다.
“청청이가 잡았지.”
“큰일을 했군요. 그런데 얼굴이 왜……?”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저대로 두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을 듯했다.
그때 한줄기 전음이 청운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놈을 제압하고 나서 청청이가 방심을 했네. 그 순간 놈이 기습을 했지. 그래서 가슴의 옷자락에 구멍이 뚫린 것이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기습에 당한 이후 백청청이 안겸을 어떻게 다뤘을지 눈에 선했다.
‘자업자득이군.’
청운은 고개를 돌려서, 얼굴이 상기된 백청청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몸을 살짝 튼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청운은 피식,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참고 백청청에게 말했다.
“소저 덕분에 구혼지마를 잡았구려. 정말 잘하셨소”
“별거 아니에요.”
오랜만에 칭찬을 들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칭찬은 고래뿐만 아니라 여우도 춤추게 만들었다.
* * *
청운은 다시 음양장으로 향했다.
백영상과 백청청 등 백가장 사람들도 함께 갔다.
몸이 엉망이 된 안겸도 끌고 갔고.
그들은 음양장에 도착하자마자 장원 안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제법 숫자가 많았지만, 청운과 백가장 고수들의 상대는 아니었다.
반각도 되지 않아서 음양장을 정리한 청운이 백영상에게 말했다.
“장로님, 이곳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안에 들어가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알겠네. 걱정 말고 다녀오게.”
“저도 함께…….”
백청청이 나섰지만 백영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여기에 얌전히 있어.”
백청청은 백영상이 볼 수 없게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삐죽이더니, 청운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청운은 곧장 혈황이 발견한 지하로 향했다.
[따라와라.]
혈황은 거침없이 청운을 안내했다.
지하에는 기관장치뿐만 아니라 경비무사도 있었다.
청운은 앞을 막는 자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뿐만 아니라 돌로 된 벽에 손을 쑤셔 넣어서 기관장치까지 파괴했다.
와지직!
후두두둑.
쿵!
곧 석문으로 막힌 통로의 막장이 나왔다.
[저 안에 석실이 있다. 문을 날려버려라!]
청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장력을 날렸다.
쾅!
석문이 박살 나며 안쪽 모습이 드러냈다.
무언가를 들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자들이 보였다.
“동작 그만!”
우르르릉.
청운의 사자후가 지하 석실을 뒤흔들었다.
안에 있던 자들이 귀를 막고 괴로워했다. 두어 사람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청운은 지풍을 튕겨서 그들을 모두 제압했다.
청운은 석실 안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병장기가 보였다. 다른 쪽 벽에는 서가가 있었다.
많은 두루마리와 서책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바닥에 두루마리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서가에서 빼낸 것인 듯했다.
그때 청운의 눈이 다른 벽으로 향했다.
“중원전도?”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지도가 보였다.
정밀한 지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많은 지명이 어지럽게 적혀 있고 간간이 작은 천이 붙어 있었다.
-혈황 님, 저기 지도에 붙어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도에 붙어 있는 작은 천에 용 룡(龍) 자가 적혀 있었다.
* * *
장안 성내에 자리한 금의위 위소에 도착한 웅천은 청운의 밀지를 보이며 협조를 구했다.
“대인, 진무사께서 금의위들을 점검하라 명하셨사옵니다.”
웅천이 내민 밀지를 펼친 사내는 내용을 읽어보더니 인상을 굳혔다.
사내는 이곳 서경 금의위 위소를 관장하는 진자광 천호였다. 그는 용력이 뛰어난 맹장으로 위명이 높았다.
진자광이 밀지를 접으며 웅천에게 물었다.
“진무사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은밀히 움직이고 계셔서 소장도 잘 모르옵니다.”
“흠, 일단은 알겠네. 하지만 진무사께서 직접 오시지 않으면 금의위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네.”
진자광의 말에 웅천은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무슨 연유에서이옵니까?”
“진정 몰라서 묻는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인가?”
“몰라서 여쭙는 것입니다.”
진자광은 자신을 똑바로 보며 말하는 웅천 백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인상이 구겨졌다. 그래도 금의위 사이에서 웅천의 위명을 아는지라 대답을 해주었다.
“이곳은 서경이네. 병력을 움직이려면 서경왕부의 허락이 있어야 하네.”
“천호, 천호께서 오군도독부 출신이어서 금의위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곳 명령권이 진무사에게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면 잘 알고 있네.”
“그걸 아시는 분께서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웅천은 진자강의 황당한 자세에 담담히 물었다. 진자강 역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오왕야 성격을 몰라서 그러나? 진무사께서는 왔다 가면 그만이지만 나와 부하들은 어쩌란 말인가? 나중에 닥쳐올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네. 그러니 이를 해결해줄 수 없는 이상 나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는 말게.”
“……알겠습니다.”
웅천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진자강이 아무리 위명을 날린 장수라 해도 법과 권력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련한 관리일 뿐이었다.
진자강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은지 웅천에게 말했다.
“자네에게 이런 말해서 미안하네. 요즘 오왕야가 이곳 위소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질적이네.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있어서 조심하고 있네.”
“고충이 있으신 것을 몰랐습니다. 진무사께서 이런 일이 있으실 줄 알고 서경왕부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지켜보시지요.”
“그런 일이 있었나? 역시 삼원을 하신 분이라 다르군.”
“예, 일이 잘 안 풀려도 진무사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병력 준비는 해주시지요.”
“흠, 알겠네. 내 자네를 믿어보지.”
굳어 있던 진자강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 * *
한편, 웅천이 금의위 위소에 들렸을 때 정 소감은 서경왕부를 방문했다.
서경왕부의 주인인 태친왕 주하경은 황제의 다섯 번째 동생이었다.
주하경은 일찍이 신동이라 불릴 만큼 영특해서 선황제가 무척 아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뒤를 받쳐주는 힘이 약하면 황태자가 될 수 없었다.
반면 현 황제는 첫째이면서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선황제는 일찍이 주하경에게 팔괘의 서쪽 방위인 태(兌)를 내려서 태친왕이라 부르고, 서경왕부를 열어서 서쪽을 지키게 했다.
황태자는 황제가 된 후, 재주가 있고 바짝 엎드려 충성을 다하는 다섯째를 그 자리에 그냥 두었다.
황궁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왕부 안.
커다란 중앙 대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환관 무복을 입은 사내가 그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왕부를 찾아온 정 소감이었다.
그 모습에 주위에 도열해 있던 왕부 관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환관이라면 허리를 살짝 구부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와서 허리를 한없이 꺾어야 하거늘.
저리도 당당하다니.
당장 불러서 치도곤을 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에 불편한 심기를 삼켰다.
정 소감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다소 마른 듯 보이는 중년 사내를 향해 부복하며 예를 갖추었다.
“왕야, 소인 동창의 정 소감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