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화
백청청은 문희를 몰래 두들겨 패려다가 백영상에게 꼬리가 밟혔다.
그 바람에 며칠 동안 잔소리만 귀가 터지게 들었다.
여차하면 본가로 되돌려 보내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까지 했다.
그 와중에 청운이 종남에 간다고 하자, 얼씨구나 하고 따라나선 것이다.
백영상은 그런 백청청을 혼자 놔둘 수가 없어서 호위대와 함께 따라나선 것이고. 실제로는 종남산과 화산도 구경하고, 가능하면 장안까지 구경할 꿍꿍이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길을 나선 청운은 곧장 길을 서쪽으로 잡고 빠르게 이동했다.
청운은 처음에만 해도 백가장 사람들을 떨치려 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꾸었다.
그들이 무림맹 내부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밖에 있는 것이 더 조용할 듯했다.
특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백청청을 무림맹에 남겨놓는 것은 폭약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불구덩이 옆에 놓아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청청이 신비세력 놈들에게 당할까 봐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고.
물론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 * *
무림맹 산서지부에 한 장의 밀지가 도착했다.
밀지를 받은 산서지부장 추풍일도(追風一刀) 유상기는 한참을 고민하고는, 그의 두 동생인 유상부와 유상곤을 불렀다.
부름을 받고 달려온 둘은 유상기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인상을 구겼다.
“형님, 이번이 마지막이겠지요?”
“그래. 약속한 세 번 중 이번이 마지막 세 번째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셋째 유상곤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형님, 그자를 믿을 수 있습니까?
“…….”
유상기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수없이 생각해본 질문이었다. 그러나 명쾌하게 답을 내지 못했다.
유상기는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삼십여 년 전 막 무림에 출도했을 때 한 사내를 만나서 겨루게 되었다. 그 사내에게 삼형제는 보기 좋게 패했다.
그런데 사내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뛰어난 무공을 알려줄 테니 차후에 세 가지 일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내는 추풍객이라 알려진 정파 고수였기에 셋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에게 무공을 사사한 후 세 형제는 무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났을 때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파인을 제거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일을 마치면 무공을 하나 더 알려주겠다고 했다.
삼형제는 좀 더 강해지고 싶은 생각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장원 하나를 세상에서 지웠다.
그로부터 십 년 후, 또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마도의 첩자라며 제거하기를 요구했다. 무언가 찜찜했지만, 그의 명성과 무공에 대한 욕심에 일가족을 습격했다.
그리고 또다시 십 년이 흘렀다.
지난 십 년간 삼형제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가 지시하고 자신들이 제거한 이들이 사파나 마교의 인물은 분명하지만, 사악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사악하기는커녕 몰래 남들을 도와주는 선행을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유상기는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끝내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따라야지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제 생각도 둘째 형님과 같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이대로 모든 걸 내려놓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았다. 어찌 되었든 삼류 무인이었던 삼형제가 지금은 무림맹 지부장을 맡고 있으니 말이다.
큰형인 유상기는 탁자 위에 내려놓은 밀지로 시선을 두었다.
한 줄기 글귀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종남파의 복수를 위해서 사도맹 하진지부를 쓸어버려라]
밀지의 핵심 내용이었다.
자신도 종남파가 습격당한 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대의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었다.
정파가 마도문파를 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더구나 사도맹 하진지부는 악랄한 짓을 자행하기로 유명했다.
“좋아, 하자.”
* * *
황하(黃河) 상류의 하진(河津)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다.
“급류를 뚫고 올라가면 용이 된다.”
바로 등용문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 하진에 있는 용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석양이 질 무렵. 급류가 굽이치듯이 몰아치는 용문에 일단의 무리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숫자는 백여 명, 그들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건 어둠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선두의 사내는 몸을 낮추며 성벽처럼 우뚝 솟은 장원을 응시했다. 무림맹 산서지부장인 유상기였다.
추풍객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사도맹 지부가 있는 용문의 하진까지 달려왔다.
백여 명의 무사가 유상기의 뒤에 늘어서서 숨을 죽인 채 명령을 기다렸다.
“공격을 시작하면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라. 최대한 강하게 치고 빨리 빠진다.”
유상기의 말에 중간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상기는 눈을 빛내며 앞을 노려보았다
“가자!”
그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백여 명의 무림맹 산서지부 무인들이 뒤를 따랐다.
다음 날 세상에는 한 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사도맹 하진지부가 간밤에 괴한의 습격으로 모두 죽었다.”
종남파 이어 이번에는 사도맹지부가 습격을 받은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이미 사신단과 정파 무림인들이 화산파로 출발한 후였다.
* * *
사신단은 청운이 출발하고 하루가 지나서 무림맹을 나섰다.
그들은 천 리나 되는 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로부터 이틀째 되던 날 오후, 그들은 마침내 화산파가 있는 화산 초입에 도착했다.
사신단이 화산파에 도착했을 때, 청운은 종남의 산문을 통과했다.
청운과 금의위, 동창, 백가장 사람들까지 모두 이십여 명이나 되는 일행은 산문을 지키는 종남파 무인의 안내를 받아서 경내로 들어섰다.
처참하게 부서진 건물을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치우고 있었다.
개중에는 척마대와 멸사대도 있었고, 이곳저곳에서 도와주기 위해 달려온 정파의 무사들도 있었다.
청운은 일단 종남파의 장문인과 장로들부터 만나기 위해 안쪽에 있는 천도관으로 향했다.
웅천과 정 소감만 동행했다.
나머지에게는 적절한 일을 배정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시오. 백 소저는 안 해도 되니 주위나 한번 둘러보시고.”
백청청이 무슨 말썽을 피울지 몰라서 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백청청은 자신을 생각해서 그리 말한 줄 알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공자. 저도 돕겠어요.”
“아니, 그냥 구경이나…….”
“호호호, 제가요, 이래 봬도 건축 쪽에 제법 일가견이 있어요. 그렇죠, 할아버지?”
백영상은 청운의 속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이 애가 다른 건 몰라도 손재주는 있다네.”
청운은 그녀를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종남파는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말리는 것도 뭔가 이상했다.
‘안 해도 되는데…….’
청운이 종남파 수장들을 만나러 간 동안 백청청은 백가장 무인들과 함께 주변을 돌아보았다.
백청청이 백영상과 호위대에게 말했다.
“도와줄 만한 일이 있는지 찾아봐요. 어려울 때 진심으로 도와주면 우리 백가장에 대한 인식도 바뀌지 않겠어요?”
백영상도 그때만큼은 백청청이 제법 대견해 보였다.
“그러자꾸나.”
“저는 이쪽을 살펴볼게요. 할아버지는 저쪽을 살펴보세요.”
한편, 청운은 종남 제자의 안내를 받아서 천도관에 들어갔다.
그나마 겨우 화를 피한 천도관 안에는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척마대주 노해광과 종남의 장로 일청자도 있었다.
“어서 오시게, 진무사.”
“원시천존, 오셨는가?”
노해광과 일청자가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청운을 반겼다.
청운도 그들이 반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포권을 취했다.
“많은 제자들이 죽어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허험, 생각해줘서 고맙네.”
일청자는 헛기침을 한 후 종남파 장로와 원로들을 소개해주었다.
“여기 이분은 일광자 사형이시네. 그리고 이쪽은…….”
대략적인 인사가 끝나자 청운이 물었다.
“적은 밝혀졌습니까?”
노해광이 그간 조사한 부분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다 보니 아직 확신을 할 수가 없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도인들이라는 거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청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사도맹 놈들이 분명하네.”
청운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지금 가슴에 불이 담긴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사도맹이 아닐지 모른다고 해봐야 불만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정말 사도맹이라 해도 철저히 조사해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추궁할 명분이 섭니다.”
“당장 사령회 놈들을 쳤으면 하네만, 맹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지금쯤 사신단이 화산에 도착하고 있을 겁니다. 아마 곧 이곳으로 오든, 아니면 뭔가 다른 계책을 마련하고 있겠지요.”
일광자가 탐탁지 않다는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화산으로 간단 말인가? 바로 이곳으로 오지 않고?”
“온다 해도 수백 명이 생활할 수 있는 상황이 아직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준비를 갖춘 다음에 오겠지요.”
“으으음…….”
사실이니 일광자와 일청자 등 종남파 사람들은 바로 반론을 펴지 못했다.
“그보다는 일단 적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내는 게 중요합니다. 이곳을 공격한 놈들 중 정체가 밝혀진 자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청운이 천도관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백청청은 백영상과 헤어져서 호위무사 두 명과 함께 종남파 경내를 돌아다녔다.
한참을 돌다가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열 살 전후의 아이가 혼자서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를 힘겹게 헤치고 있었다.
온몸에 흙먼지가 가득했는데, 아이의 볼에 몇 줄기의 굵은 눈물 자국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저 안에 누군가 있나 보네.’
백청청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성큼 발을 옮긴 그녀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혼자 뭐 해?”
“히익.”
아이는 깜짝 놀라더니 곧장 허리를 숙여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자허예요.”
“반가워. 나는 청청이야. 백청청.”
백청청은 자허를 안심시키기기 위해 싱긋 웃어주었다.
그러고는 잔해를 둘러보며 자허에게 물었다.
“여기에 누가 있어?”
“네, 스, 스승님이 계세요.”
자허의 말라버린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직 치우지 못한 잔해 속에 자허의 스승이 있는 것 같았다. 복구하는 손길이 아직 이곳까지 미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누나가 치워 줄게. 잠깐 뒤로 물러나 봐.”
청청은 자허를 호위무사에게 맡기며 자세를 잡았다.
양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며 살짝 앉아서 단단하게 한 후 쌍장을 모았다.
우웅! 우우웅!
백청청의 단전에서 강한 울림이 들렸다. 그녀의 의지에 화답하듯이 단전에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기운이 쌍장으로 흘러들었다.
휘릭!
합장한 손을 이리저리 비틀더니 그대로 양쪽으로 활개 치듯이 활짝 벌렸다.
찌이이잉!
백청청의 양손에서 눈부신 빛이 무너진 건물 잔해로 쏟아졌다.
은은한 빛은 잔해를 어루만지듯이 감쌌다.
쿠그그그긍!
무언가 비틀리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너진 잔해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응?”
회의를 마치고 천도관을 나오던 청운은 거대한 기의 울림에 깜짝 놀랐다.
익숙하면서도 강력한 울림에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찼다.
청운의 뒤를 이어 다른 이들도 바닥을 차며 날아올랐다.
청운은 곧 강력한 울림이 들린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백청청이 무너진 잔해를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