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화
월광선녀로 변장하고 있던 백청청은 흠칫했다.
문희가 자신을 알아볼 줄이야.
하지만 문제는 문희가 아니었다.
관람석에서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뭐? 청청이라고?”
워낙 큰 소리로 외쳤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노인. 그는 백가장의 삼장로인 백영상이었다.
백영상은 경공을 펼쳐서 비무대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는 면사로 얼굴을 단단히 가린 백청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백청청이 고개를 살짝 돌려서 백영상의 눈을 회피했다.
“이놈! 네가 제정신이냐?”
“헤헤, 할아버지, 그게 아니…….”
“닥쳐라! 얌전히 구경만 한다더니 무림대회에 참가를 해? 뭘 잘했다고 변명을 하느냐? 어찌 허락 없이 대회에 참석한 것이야?”
백영상의 꾸지람에 백청청은 풀 죽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백영상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일을 가주가 알면 어찌 될 것 같으냐?”
“하, 할아버지, 비무는…….”
“그만!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회초리를 들 테니 그리 알고 당장 따라와!”
백청청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비무대 위를 내려왔다.
이번 일의 원흉이랄 수 있는 문희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끌려가는 백청청을 마주했다.
“어머,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입 닥쳐.
백청청이 전음으로 다그쳤다. 하지만 문희는 즐겁다는 듯 더 크게 웃었다.
“호호호, 참 안됐네요.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문희의 비아냥거림에 백청청은 화가 치밀었지만 달리 그녀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뭐 하느냐?”
백영상이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서 경기가 멈췄다.
결국 심판진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월광선녀 기권패입니다. 사홍림 부전승!”
심판은 비무대를 떠난 백청청을 대신해서 사홍림의 승리를 외쳤다.
뜻하지 않은 문희의 방해로 인해서 백청청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덕분에 마지막 경기인 화산파의 기대주 청양과 점창파 장문인의 아들인 진송의 대결이 바로 이뤄졌다.
팽팽한 대결이 예상되었는데, 뜻밖에도 십여 초 만에 청양이 승리했다.
그렇게 무림대회가 파란을 겪으며 막바지를 향해 달려갈 때, 섬서성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혈풍이 불었다.
* * *
장안의 남부에 위치한 종남산은 한중과 관중을 사이에 두고 길게 뻗은 진령산맥에 속한 명산이었다.
예부터 종남산은 수많은 도문과 불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구파의 하나인 종남파가 가장 세가 컸다.
그런데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짙게 우거진 진령산맥을 따라서 일단의 무리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움직이는 자들의 숫자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종남파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도착해서 숨을 골랐다.
“오늘 종남을 천하에서 지운다.”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자들은 말없이 눈빛만 빛냈다.
“시작해.”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 수백 명이 일사불란하게 종남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긴급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종남파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곧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종남산에 메아리쳤다.
* * *
팔강전은 오전에 두 경기, 오후에 두 경기로 치러졌다.
첫 경기는 강호풍과 영호천이 싸웠다. 강호풍이 칠십이파검을 꺼내 들고 선전했지만 영호천의 검에 무릎을 꿇었다.
두 번째 경기는 팽도천과 남궁룡의 경기였는데 팽도천이 부상을 털어내지 못해서 기권했다.
그 바람에 남궁룡이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사강에 올랐다.
세 번째 경기는 문희와 화산파 제자 청양의 경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양은 문희의 상대가 아니었다. 칠십여 초 만에 화산의 매화검이 꽃잎을 떨어트렸다.
마지막 경기는 천일영과 사홍린의 경기였다.
사홍림은 처음부터 상대의 눈을 속이는 환검을 꺼내 들고 천일영을 공격했다. 그러나 천일영은 사홍림의 환검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지 십여 초 만에 승리를 따냈다.
“천일영 승!”
심판이 천일영의 승리를 알리자 군중들이 환호했다.
와아아아아!
하지만 무림맹 고위 간부와 정파의 각 수장들이 모여 있는 곳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구파일방과 명문 세가의 제자나 자제 중에는 남궁룡만이 사강에 올라갔을 뿐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젊은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무림맹 쪽에서 누군가가 급박하게 달려왔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달려온 그는 곧장 무림맹의 수뇌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어찌나 다급해 보이는 표정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곧장 제갈신기에게로 가서 작게 접힌 전서를 건넸다.
“조금 전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전서를 건네받은 제갈신기는 전령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후다닥 전서를 펼쳤다.
그리고 곧 장문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맹주를 돌아다보았다.
“맹주.”
“무슨 일이오?”
“종남파가…… 혈겁을 당했다 합니다!”
“뭐요?”
종남파가 피로 물든 소식은 무림대회의 분위기를 바닥까지 가라앉혔다.
양조생이 제갈신기에게 명령을 내렸다.
“군사, 일단 척마대와 멸사대를 보내 종남을 지원하시오.”
“예, 맹주.”
“그리고 긴급회의를 할 것이니 당주급 이상의 간부들은 모두 영웅관으로 모이라 하시오.”
회의를 소집한 지 이각 후, 영웅관에 무림맹 주요 간부와 정파의 수장 백여 명이 모였다.
청운 역시 참석했다.
제갈신기가 먼저 맹주가 내린 명령에 대해 보고했다.
“맹주, 척마대와 멸사대가 방금 전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종남의 일청자 장로가 종남의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갔습니다.”
일청자로서는 사문인 종남파가 혈겁을 당했다 하니 자세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으음, 일단 종남의 사정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소.”
“화산에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내일이면 정확한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 그동안 흉적을 상대할 준비를 해놓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때 화산파 장로인 송화가 물었다.
“군사, 전서에 종남을 공격한 적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소?”
“정체불명의 적이라는 것과 마도의 무사로 보인다는 것만 적혀 있었습니다.”
“마도의 무사라면…… 혹 사도맹이 아니오?”
“그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지가 않습니다만, 화산에서 연락이 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에는 다른 장로가 말했다.
“군사! 무림맹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종남을 공격할 만큼 간덩이 부은 놈들이 사도맹 아니면 어떤 놈들이겠소이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옳소이다! 어쩌면 사령회 놈들이 공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지요.”
하지만 제갈신기는 그의 말을 바로 수긍하지 않았다.
“세상에 무림맹을 적대시 하는 자들이 사도맹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설마…… 마교를 말하는 거요?”
누군가의 그 말에 웅성거리던 자들이 조용해졌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정파 무사들의 가슴을 짓누른 이름이 바로 마교였다.
“꼭 마교라는 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사도맹일 수도 있겠지요. 제 말은 정확한 것을 알지 못하면 자칫 엉뚱한 적과 싸울 수 있다는 겁니다.”
“글쎄요, 물론 마교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활동을 안 한 지 오래되었잖습니까? 그들이 갑자기 종남파를 공격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사도맹은 종남파를 공격할 이유가 충분하지요.”
청운은 그 말을 하는 노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점창파 장로인 종산국이었다.
그는 위염천이 밝힌 노룡회의 간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해서 놔두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종남 혈겁의 범인을 사도맹으로 몰아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도맹과 싸움이라도 붙일 생각인가?’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컸다.
무림맹과 사도맹이 전쟁을 벌이면 신비세력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정말 종남파가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면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흥!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제갈신기도 쉽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도맹의 짓이라고 단정을 하면 문제가 커진다.
당장 사도맹과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상황에서의 공격은 자칫 큰 실수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합니다. 자세히 조사를 한 후에 적을 특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운의 전음에 그도 동조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네.
-계획을 조금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무림대회를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군.
제갈신기는 청운과 전음을 나눈 후 양조생에게 말했다.
“맹주, 아직 무림대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일단 사강이 정해진 만큼 사신단을 만드는 건 무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흐음, 그건 그렇지.”
“결선에 진출한 네 사람에게 각기 한 개 단을 맡기는 것으로 무림대회를 정리하고, 적을 상대할 준비를 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양조생은 무림맹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장로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아미타불, 빈승은 찬성입니다. 비록 우승자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신단을 이끌 수장을 선발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남궁세가도 찬성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종남이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무림대회를 계속 진행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불만이 있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은 젊은 고수들이 단주의 요직을 차지할 판이었다.
하지만 종남이 혈겁을 당한 터라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었다.
제갈신기는 적당한 때에 결정을 지어버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신단 결성을 바로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청운이 말했다.
“적이 종남파를 쳤다면 화산파도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사신단을 화산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갈신기가 맞장구를 쳤다.
“흠, 진무사의 말씀이 옳네. 안 그래도 화산파에 지원을 보낼 생각이었네. 맹주, 허락해주시지요.”
양조생이 영웅관에 모인 간부와 군웅을 보며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일단 사신단을 조직한 후 화산으로 지원을 보낼 것이오! 군웅들께서도 많은 도움이 있기를 바라겠소이다!”
웅혼한 그의 목소리가 영웅관을 울렸다.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감 모가 비록 실력은 비천하나 협의를 위해 화산으로 가겠소이다!”
“장 모도 함께 가겠습니다!”
“우리 가서 종남파의 복수를 해줍시다!”
“종남파를 친 놈들은 분명 사도맹 놈들일 것이외다!”
“그놈들이 아니면 누가 있단 말입니까?”
제갈신기와 청운은 그들의 주장을 더 이상 막지 않았다.
막는다 해서 들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도의 편을 든다며 성토만 당할 게 뻔했다.
영웅관의 회의는 그렇게 ‘마도를 무찔러서 종남파의 복수를 하자!’로 끝이 났다.
* * *
사신단이 급하게 만들어졌다.
무림대회에 참여했던 많은 무사들이 협의를 외치며 나섰다.
총인원 팔백여 명. 각 단마다 이백 명의 무사들이 배정되었다.
청룡단은 남궁룡이,
백호단은 천일영이,
현무단은 영호천이,
주작단은 문희가 맡았다.
각 단은 다시 십 개 조로 나누어지고, 이십 명이 한 조를 이루었다.
그날 밤.
청운은 제갈신기를 찾아갔다.
“노룡회 놈들 짓이라고 보나?”
“그들이 아니고서야 종남을 칠 세력이 없지 않습니까?”
제갈신기가 마교 운운했지만, 수십 년간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마교가 갑자기 종남을 쳤다는 것도 이상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 있네.”
“이상한 일이라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