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화
정 소감의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청운만 없었다면 당장 출수했을지도 모른다.
청운은 그런 정 소감을 말렸다.
“되었네. 진정하게.”
“니에, 송구하옵니다.”
청운의 말 한마디에 정 소감은 순한 양이 되었다.
그 모습에 시비는 청운이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청운은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듣자 하니, 이곳 별채의 정자가 그리 운치가 있다고 하더군. 들어서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운치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네. 그런 곳에서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시상이 떠오르지.”
청운은 두 눈을 스르르 감고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분위기를 잡았다.
시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청운이 원하는 것은 정자에 오르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마저 거부하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그럴 경우 어떤 책임이 뒤따를지 알 수 없었다.
“내 부탁함세. 자네들도 함께 가면 될 것 아닌가.”
청운이 재차 부탁하듯 말하자 시비도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
“알겠사옵니다. 그럼 소녀를 따라오십시오.”
청운은 시비들의 안내를 받아서 뒤편 정자로 향했다.
이때 청운은 힐끔 한곳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나 바쁜 거 알지? 이번 일 도와주면 대회 끝날 때까지 귀찮게 안 하기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청운은 이곳에 오기 전에 급히 혈황을 찾았다. 혈황은 투덜거리면서도 청운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별채 어딘가에 동창 무인이 혈황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정자에 올라선 청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연못이 정자와 잘 어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혈황이 돌아왔다.
[이 안에는 없다.]
-없다고요?
[그래. 네가 말한 동창 무인은 이 안 어디에도 없다.]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서 묻었나? 하긴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겠지.’
청운은 곧장 정자를 내려서며 말했다.
“정말 좋은 곳이군. 다음번에는 내가 이곳 별채를 써야겠어.”
흡족한 미소를 띠며 허락한 시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청운이 별채를 나서려는데 급히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이제 오는군.’
별채의 주인인 문희였다.
문희는 가까이 다가와서는 그윽한 눈으로 청운을 보며 말했다.
“대인께서 별채를 방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조금 늦었네요.”
벌써 가냐는 소리에 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별채 뒤뜰에 있는 정자가 운치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와본 것이오. 그래, 대회는 잘 치르셨소?”
“네, 운이 좋아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가셔서 차 한잔하시지요.”
“급한 용무가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소.”
청운이 딱 잘라서 거부하자, 문희가 눈웃음치며 말했다.
“대인, 아무리 급해도 차 한잔하실 시간은 있지 않을까요?”
“없소.”
청운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약이 오른 문희는 더욱 청운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대인, 그러지 마시…….”
탁!
“뭐 하는 짓이냐?”
청운의 팔을 붙잡으려던 문희의 손이 중간에 막혔다. 그녀의 손을 붙잡은 사람은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있는 정 소감이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문희는 뜻하지 않은 방해꾼을 맞이하고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어머, 잘생긴 정 소감님 아니세요.”
정 소감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던 문희였다. 그러나 그녀의 끈적이는 목소리에 정 소감은 온몸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 선녀문은 남자만 보면 아무에게나 엉덩이를 흔드느냐?”
“네? 어, 엉덩이요?”
직설적인 정 소감의 표현에 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 소감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꺼져라. 처맞기 싫으면.”
문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청운도 입을 슬쩍 벌렸다.
한 번도 정 소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순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한 성격 있는 것 같았다.
“이보게, 정 소감…….”
“대인께옵서는 잠시 물러서 계시옵소서. 소인이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년을 치도곤 내야겠사옵니다.”
화가 단단히 났는지 정 소감은 청운이 말리는 데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원한다면 선녀문을 향해서 금군이 쳐들어갈 수도 있었다. 아니, 정원 태감이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실제로 군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문희는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뭐 이런 놈이……?’
생각 같아서는 일장에 정 소감을 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안색을 바꾸고 배시시 웃었다.
“흐응, 우리 정 소감님께서 왜 이리 화가 나셨을까?”
“내가 냄새나는 엉덩이 흔들지 말랬지?”
정 소감은 버럭 화를 냈다.
문희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허, 보자 보자 하니까 겁이 없구나. 엉덩이? 흔들어? 어디서 감히 환관 나부랭이가!”
후화악!
문희가 화를 참지 못하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정 소감도 물러서지 않고 구화보전을 운용했다.
둘이 기세를 올리자 주변에 광풍이 몰아쳤다.
쉐에엑!
문희가 정 소감을 향해서 장력을 발출했다.
“환관이면 환관답게 굴어야지!”
정 소감도 물러서지 않고 처음부터 구음조를 꺼내 들었다.
“이 구미호 같은 계집! 용서치 않겠다!”
파바바방!
청운은 난감했다. 여기서 싸움이 벌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지금도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나서려고 할 때 하늘에서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응?”
청운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보았다.
거대한 손 그림자가 곧장 문희를 향해서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든 문희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필 정 소감이 공격을 해오는 터라 피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이를 악문 그녀는 한 손으로 정 소감을 막고, 다른 손에 내공을 불어넣으며 하늘로 향했다.
콰앙~!
“아윽!”
폭음과 함께 문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쏘아낸 기운은 거대한 손 그림자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가공할 기운이 그녀의 몸을 튕겨냈다.
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휘잉.
한 줄기 강풍이 흙먼지를 날려 보냈다.
뒤로 주르륵 물러선 문희는 눈을 부릅뜨고 앞을 노려보았다.
휘리릭.
누군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백청청이었다.
“정 소감, 괜찮아?”
백청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정 소감에게 다가가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 모습에 청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내 문희를 보았다.
그녀는 이미 면사가 날아간 상태였다. 옷 역시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문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를 악문 그녀는 표독스럽게 백청청을 노려보았다.
“또! 또 네년이냐?”
“흥, 어쩔래? 그러기에 내가 그랬지. 함부로 남의 남자한테 엉덩이 흔들지 말라고. 처맞기 싫으면.”
“머, 뭐라?”
문희는 끌어오르는 화를 참기 힘들었다. 다시 기세를 올리려던 문희는 무슨 이유에선지 슬픈 얼굴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흑.”
그러더니 슬픔에 찬 얼굴로 눈물을 길게 늘어트리며 뛰어갔다.
그 모습에 백청청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 소감, 봤지? 저년 여우짓 하는 거?”
“니에, 분명히 꼬리가 아홉 개는 될 것이옵니다.”
“맞아. 내가 언젠가는 저 여우의 꼬리를 확 잘라버리고 말 거야. 그러니 저 여우가 또 헛짓거리 하면 나한테 말해.”
백청청은 가슴을 탕탕 치며 정 소감을 위로했다.
청운은 어이가 없었다.
저 두 사람이 언제부터 저리 가까워졌지?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백청청이 문희를 공격한 이상 엉뚱한 문제가 생길지 몰랐다.
‘아니지,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군.’
청운은 씩씩거리는 백청청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 * *
문희가 사용하는 별채에서 있었던 소란은 금세 무림맹에 퍼졌다. 어찌나 소문이 빠른지 청운이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기도 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청운이 비무를 구경하러 가자 염악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이, 문희의 거처에서 한바탕했다며?
-소문이 벌써 났나?
-이상할 정도로 소문이 빨리 퍼졌어.
청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굳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그때 염악의 전음이 다시 들렸다.
-조심하게. 문희라는 여자, 아무래도 수상해.
-그래? 뭐가 수상한데?
청운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그 여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달라졌다는 말이 들리거든.
-무슨 말인가?
-뭐랄까? 혼이 빠졌다고 할까?
순간 청운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문자가 있었다.
염악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찜찜해. 아! 그리고 오후 첫 번째 경기는 천검문 둘째야.
-천일영 말인가?
-그래. 그리고 자네가 부탁한 삼백년 전 비사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노친네가 왜 알려고 하냐고 오히려 물어본다니까? 좀 더 시간을 주게.
-급할 것 없네. 대신 소상히 알아봐 주게.
청운이 염악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경기가 시작되었다.
염악의 말대로 천일영이 영웅건을 두르고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상대는 놀랍게도 진설란이었다.
‘진 소저도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군.’
진설란이 오봉 중 설봉의 자리에 있지만 천일영의 상대는 아니었다.
청운의 생각대로 삼십여 합이 흘렀을 때 결판이 났다.
“천일영 승!”
청운은 천일영이 십 초 안에 끝낼 수 있었는데도 시간을 끌어준 것을 알고 있다. 진설난에게 몇 차례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는데도 공격하지 않았다.
‘화산파의 체면을 세워준 것인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경기가 속행되었다.
남아 있는 오룡 셋은 모두 승리하고 십육강에 합류했다.
이천이문도 승리했다.
그들 외에 전통 세력의 제자나 자제 넷, 신흥 청년고수 넷이 최종적으로 올라갔다.
후기지수 중 최고라고 알려진 오룡 중 넷이 올라갔으니 구파와 세가는 체면을 세웠지만, 잔칫날에 빠져버린 문파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남의 잔치에서 손뼉만 치다가 돌아가게 생겼으니…….
* * *
열두 개의 커다란 화강암 기둥이 받치고 있는 대전.
그 대전의 중앙 태사의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얼굴에 검은 천을 두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대전 바닥에는 열두 명의 인물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태사의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노룡회에 문제가 많다고?”
음부에서 올라오는 목소리가 있다면 이럴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울림이 커다란 대전을 메아리쳤다.
한 사내가 더욱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준비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있고, 많은 거점과 교도들이 안타깝게 신의 품으로 돌아갔사옵니다. 당장 노룡회에 신벌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천황이시여! 진무사라는 애송이의 방해가 있었던 건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노룡회에서 혈룡단이라는 훌륭한 영단을 만들었사옵니다. 신교의 힘을 몇 배 강하게 만든 전공이 있음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다른 사내가 말을 받아서 빠르게 변명했다.
중앙 태사의에 앉아 있던 사내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톡톡톡.
소리가 울릴 때마다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자들의 심장이 소리에 맞춰서 쿵쾅거렸다.
툭.
일순간 손가락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태사의의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노룡회 회주가 누구지?”
“현재 공석이옵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태사의 옆에 한 사내가 공손하게 서서 대답했다.
“공석? 무슨 일 있었나?”
“예, 감히 천황께 거짓말을 해서…… 죽이셨습니다.”
“아! 내가 죽였군. 생각이 나는 것도 같아.”
생각해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딱히 큰일도 아니었다. 조금 전에도 한 녀석의 머리를 날려버렸지 않은가.
건방지게 자신이 말하고 있는데 고개를 들다니.
그래도 궁금했다.
“그런데 그놈이 무슨 일로 거짓말을 했었지?”
“소교주를 들이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아하! 생각나는군. 나를 감쪽같이 속여 놓고는 내 말에 토를 달았었지.”
천황은 수많은 여인을 취했지만 자식이 없었다. 저주받을 무공 때문에 여자가 버티지를 못하거나, 버틴다 할지라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 때문에 후손이 없었는데, 몇 년 전 후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노룡회의 회주가 그 사실을 숨기고 헛소리를 했다.
화가 난 천황은 그 자리에서 노룡회 회주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그런데 그놈이 왜 나에게 후손이 있다는 것을 숨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