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화
콰과과쾅!
둘이 다시 한데 엉키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보법을 봉쇄당한 황보진도가 결국 팽도천의 도를 피하지 못했다.
서걱.
“크윽”
황보진도의 허벅지 안쪽이 살짝 베어졌다.
주춤 물러서는 황보진도의 어깨 위에 팽도천의 도가 놓였다.
“팽도천 승!”
사방에서 환호와 박수 소리가 울렸다. 둘이 보여준 대결은 박수를 받을 만큼 대단했다.
청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쳐줬다.
청운은 대전을 관람하다가 제갈해미가 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소식을 전한 건 개방 방주 염악이었다.
“자네에게는 아쉽겠지만 해미 소저가 패했네.”
“결국 그리되었군.”
청운은 친분이 있는 제갈해미가 떨어질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상대가 문희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과 비무를 하며 실력이 늘었다고 해도 상대가 좋지 못했다.
그 속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선녀문의 소문주라면 제갈해미가 상대하기 버겁다고 생각했었다.
염악도 예상했는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대단했네. 아무리 오봉 중 한 명이라지만 해미 소저의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숨겨둔 한 수가 있었지 뭔가. 마지막에 문희의 옷자락을 베었는데 문희가 깜짝 놀라더군. 끌끌.”
“아쉽게 되었군. 내공이 받쳐줬으면 승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 안 보고도 아네?”
청운은 염악의 반문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제갈해미는 내공이 부족했다. 함께 비무하면서 항상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조금만 내공이 더 깊었어도 지금보다 배는 강해질 거라고 알려줬었다.
무공이 아닌 내공 부분은 청운도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영약이라도 먹으라고 권했지만, 고개를 젓는 것이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청운의 지인 중 첫 번째 탈락자가 생겼다. 그리고 그 지인을 떨어트린 인물이 공교롭게도 문희였다.
청운이 염악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었나?”
“누구? 자네 친우들이라면 모두 승리했네. 해미 소저만 떨어졌어. 이따가 개 다리라도 하나 들고 가서 위로해주게.”
“하하, 내 자네 의견도 생각해보지. 아무튼 고맙네.”
* * *
“대인, 소인이옵니다.”
청운은 반갑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정 소감이 돌아온 것이다.
며칠 보지 못했는데 몇 달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정 소감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다.
“위염천의 가족은 모두 무사합니다. 함께 구한 이들도 말씀하신 곳으로 옮겼습니다.”
“고생했네. 몸은 불편한 곳이 없는가?”
“니에, 모두 무사하옵니다.”
“다행이군. 잘 처리했네.”
청운은 정 소감을 치하하고 지난 며칠간의 상황을 말해준 다음 명령을 내렸다.
“선녀문의 소문주 문희를 주시하게. 무공이 뛰어난 자이니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는 말고.”
“니에, 소인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정 소감은 눈을 차갑게 빛냈다.
* * *
육십사강이 치러지는 아침이 밝았다.
비무대 주변에는 많은 무림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운이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육십사강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 둥둥둥!
이제 진짜 강자들이 겨룰 차례였다.
대전은 생각보다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전통의 강호인 구파일방과 세가연합은 역시 강했다. 이름 있는 거대 문파의 제자들 역시 이름값을 했다. 이미 모든 제자가 떨어진 곳도 있었고, 여러 명의 제자가 육십사강에 오른 곳도 있었다.
하지만 변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갑자기 강해진 자들 때문이었다.
강호에는 진리처럼 되어버린 격언이 있다.
“삼 푼의 힘을 숨겨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무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면 장수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를 실천한 자들이니 그들이 부정한 방법을 이용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은 예선전과 다른 무공수위를 드러내며 승리하기 시작했다.
“반오 승!”
백의성검(白衣聖劍) 반오라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자가 이번에도 승리를 했다. 그것도 화산의 검을 꺾고.
파란이 계속 이어진 건 아니었다.
기세를 올렸던 신흥 강자들이 기존의 강자를 만나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강호풍 승!”
그 시작을 알린 건 오룡의 일원인 청성파의 창천백룡 강호풍이었다.
조금 전 마지막 남은 청성파 제자가 패했다. 연달아 올라온 강호풍은 사제의 패배를 만회하려는지 시작과 동시에 상대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압했다.
연이어 오룡의 일원인 소림사의 무적청룡 광표가 또 다른 인물을 용조수로 마무리했다.
“광표 승!”
“팽도천 승!”
“남궁룡 승!”
오룡들이 연달아 승리했다. 사람들은 역시 오룡이라며 칭송했다.
그러나 오봉은 그러지 못했다. 오봉 중 삼봉이 출전해서 이미 한 명이 떨어졌고, 방금 다른 한 명이 또 떨어졌다.
오봉 중 남은 건 화산파의 설봉 진설란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녀는 이미 승리를 하고 삼십이강에 합류한 상태였다. 화산파와 오봉의 체면을 진설란이 세웠다.
그렇게 이틀에 걸친 비무가 끝나고 삼십이강이 결정되었다.
오룡오봉 중 여섯.
구파와 오대세가에서 열둘.
거대 문파에서 넷.
이천이문에서 넷.
그리고 새로운 강자 여섯 명이 삼십이강에 오르게 되었다.
구대문파와 세가 등 전통의 강자 중에서 체면을 구긴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
* * *
무림대회 십 일째. 삼십이강전이 벌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이 많이 보였지만 무림대회의 열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자로 치부되던 중소 문파의 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자 그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컸다.
“우와! 백의성검 반오 님이시다!”
“비산검을 꺾은 쌍수신협이 저기 있다!”
군웅들은 저마다 자신이 응원하는 자들을 연호하며 그들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비무를 위해서 비무대 위로 한 젊은 도사가 올라왔다.
그는 등 뒤와 가슴에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수놓인 전통적인 무당파의 도사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무당신룡이다!”
“우아아아아!”
현 무림의 천하제일검이 무당파 출신의 검왕이다. 차기 천하제일검으로 불렸던 옥선진인 역시 무당파 출신이고. 얼마 전 신비세력에게 한쪽 팔을 잃고 패관에 들긴 했지만.
다음 대 천하제일검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무당 제자가 바로 지금 올라온 무당신룡 정천이었다.
그에 맞설 사람은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선녀문의 문희였다.
조금은 일찍 만난 두 강자의 경기가 삼십이강의 시작을 알렸다.
“여시주에게 선공을 양보하리다.”
“사양하지 않겠어요.”
문희가 검을 가슴 높이로 올리더니 신형을 날렸다.
마치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듯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나비가 아니라 벌의 침처럼 매서웠다.
정천은 빙글빙글 돌며 검을 뻗어서 문희의 공격을 파훼하고 거꾸로 허점을 노렸다.
쉐엑!
날카로운 소리가 문희를 향해 쏟아졌다.
문희가 상체를 살짝 흔들더니 검을 들어서 정천의 검을 튕겨냈다.
팅! 티딩!
문희는 연이어 정천에게 이 검을 뿌렸다.
그러고는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정천의 품을 파고들었다.
정천은 살짝 반보 물러섰다가 빙글 몸을 돌리며 주저앉았다.
스팟.
정천의 머리 위로 문희의 검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오우!”
구경하던 군웅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터더더덩!
둘은 한차례 가까이서 검을 부딪치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떨어졌다.
뒤로 물러선 정천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문희의 검에서 스승인 옥선진인과 대련을 하면서 느꼈던 단단함이 느껴졌다.
믿어지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비등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천은 무당파의 수많은 고수와 대련을 밥 먹듯이 했었다. 검 한번 부딪쳐 보면 상대의 강함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망설이고 있는 정천을 보며 문희는 미소를 지었다.
‘놈, 제법인데.’
자신의 숨겨진 힘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역시, 오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계속 노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먼저 움직인 건 문희였다.
팟!
가볍게 바닥을 차며 앞으로 나갔다.
검을 앞으로 찌르며 정천의 목젖을 노렸다.
정천 역시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상대가 강자라고 꼬리를 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챙!
문희의 일검을 쳐 낸 정천은 문희의 드러난 가슴을 향해서 검을 찔러넣었다. 쑥 들어오는 검을 문희가 상체를 빙글 돌리며 흘려보냈다.
동시에 군웅들이 탄성을 흘렸다.
“오우!”
문희가 자세를 다 잡기도 전에 정천은 무당파 비전 검법인 태청검법(太淸劍法)을 꺼내 들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자라면 기회가 있을 때 승부를 봐야 한다고 배웠다. 그 배움을 그대로 실천했다.
챙챙, 채앵!
정천은 비전 절초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지켜보는 이들이 감탄사를 연신 터트렸다.
“역시 무당이군.”
“백 년 내로 무당의 검을 꺾을 수 없겠어.”
모두가 정천과 무당을 칭송했다. 그러나 청운은 알고 있었다.
‘위험해.’
분명 정천이 문희를 압박하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할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천이 검을 찔러 넣을 때, 문희의 검이 잔상을 남기며 미끄러지더니 그대로 정천의 목젖 앞에서 멈춰 섰다.
정천을 연호하며 응원하던 사람도 문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던 자들도 모두 천 년 바위처럼 굳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극적인 역전에 얼어버렸다.
“문희 승!”
심판이 외치자 군웅들이 그제야 문희를 부르짖으며 열광했다.
“우와아아아!”
“문희! 문희!”
“선녀문 최고다!”
모두가 문희를 환호했다. 그러나 청운만은 차갑게 두 눈을 빛냈다.
첫 비무부터 오룡 중 비천신룡이 패했다. 그러나 상대가 신비문파인 선녀문의 소문주이기에 이변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정천이 아깝게 패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다음 경기에서였다. 점창의 고수가 신흥 고수인 사홍림에게 패했다. 그리고 다음 경기도 신흥 고수에 의해서 모용세가의 고수가 패했다.
일이 이쯤 되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새로운 고수의 등장은 정파 무림 전체로 보면 반가운 일이지만, 기존 세력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구파나 전통의 세가끼리 겨뤄서 패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들이 원한 건 자신들의 제자가 위에 있고 그다음 새로운 고수가 그 뒤를 받치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판이 자신들의 의도와는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자들이 아직 넷이나 남은 상황. 그들이 전부 십육강에 오르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다.
“우와! 역시 오룡이다!”
“청성의 강호풍이 이겼다!”
창천백룡 강호풍이 신흥 고수를 이기자 군웅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무림명숙들은 환호할 수 없었다. 그가 겨우 이겼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삼십이강전의 절반이 치러지고 점심이 되었다.
청운은 거처에서 정 소감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칠 즈음 정 소감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누군가와 전음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청운은 정 소감이 볼일을 볼 때까지 말을 걸지 않고 식사에 열중했다.
청운이 식사를 마치자, 정 소감이 차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대인, 일이 생겼사옵니다.”
“일?”
“문희를 감시하라고 붙였던 사람이 행방불명되었사옵니다.”
“감시자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예, 대인. 표식이 문희가 사용하는 별채 근처에서 끊겼다고 하옵니다.”
동창 무인은 움직일 때 표식을 남긴다. 그런데 그 표식이 문희의 별채 근처에서 끊겼다면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소인이 한번 가봐야 될 것 같사옵니다.”
“흠, 문희의 무공이 상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나?”
청운이 느낀 문희의 무공은 상당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정 소감의 무공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 소감은 물러서지 않았다.
“니에, 문희가 강한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흠, 자네 부하가 실종되었으니 책임감이 들겠지.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네. 함께 가세.”
“그,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소인이 알아서 처리하겠사옵니다.”
“마침 식사도 다 했으니 어서 가보세.”
청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 소감은 싫지는 않았지만, 청운에게 미안했다. 어찌 되었든 청운이 움직였으니 자신은 따라야만 했다.
두 사람이 청운의 거처에서 나서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또 어딜 가는 거지?’
청운과 정 소감은 표식이 끊긴 곳을 살펴보고는 문희가 사용하는 별채로 이동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별채 앞에는 문희의 시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진무사님을 뵈옵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청운을 맞이했다. 그녀는 청운 뒤편에 있는 정 소감에게 눈인사를 한 후 청운에게 말했다.
“대인,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볼일이 있어서 왔네.”
“소문주님께서는 지금 안 계시옵니다. 그러니 다음에 다시 방문해 주시지요.”
뒤편에 있던 정 소감이 발끈하며 나섰다.
“감히 누구 앞을 막는 것이냐? 당장 물러서지 못할까!”
정 소감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다그쳤다. 하지만 시비는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녀도 그리하고 싶지만, 주인이 안 계셔서 손님을 받을 수 없사옵니다.”
“뭐야? 감히 진무사이시며, 오호평천대장군이신 분의 앞을 막다니. 네년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