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153화 (153/257)

# 153

153화

제갈신기에게 자신의 계획을 간단하게 설명한 청운은 포권을 취했다.

“제가 오래 안 보이면 의심할지 모르니 그만 대회가 벌어지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리하게.”

청운은 위염천의 혈도를 몇 군데 누른 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적과 아군을 속이기 위해서 위염천을 시체처럼 보이게 위장시킬 생각이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제갈신기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대파 장로들이 잡아먹으려고 목에 핏대를 세울 게 뻔했다.

그렇다고 속사정을 밝힐 수는 없었다. 간자를 잡아내는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무림맹은 사고에 관한 발표를 곧바로 하지 않았다. 일의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제갈신기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독향을 태운 흔적을 지우기까지 했다.

조사를 위해 달려온 책사들의 조사가 난항을 겪었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결정적인 증거가 빠졌다. 추리만으로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당장 발표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덕분에 발표가 늦춰졌다.

그러는 사이 ‘지하 뇌옥의 죄수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낸 것인지, 시체를 옮기는 것을 지켜본 자들이 소문을 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침상에 한 사내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죽음에서 돌아온 위염천이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위염천 곁에는 청운과 제갈신기, 그리고 정 소감이 서 있었다.

셋은 침상에 누워 있는 위염천을 내려다보았다. 시체처럼 시퍼렇던 얼굴에 혈색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위염천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곁에 있던 청운이 재빨리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드시오?”

위염천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시야가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자신을 부른 인물이 뿌옇게 보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위염천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청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진무사?”

“이제야 정신이 드셨군.”

위염천은 눈알을 굴려서 주위를 살폈다.

뇌옥에 있어야 할 자신이 침상에 누워 있으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위염천에게 청운이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된 것이오.”

“크크, 당신 말대로 결국 버려졌군.”

“내 그러지 않았소? 놈들에게 자네는 쓰고 버리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위염천은 입을 꾹 닫은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청운이 허공을 보는 그에게 물었다.

“시간이 없소. 그대 가족을 구하려면 거짓 없이 대답을 해야 하오.”

그러고는 기다렸다.

위염천은 반각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말해 봐. 뭘 알고 싶지?”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결심을 굳힌 위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자신을 버렸다. 어젯밤 청운이 말한 대로, 자신이 죽었든 살았든 가족을 죽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자신이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알고 있다.”

“위치를 알려주시오. 당장 구하지 않으면 천추의 한을 남길지도 모르오.”

“낙하를 따라서 삼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란 포구가 있다. 그곳 옆을 지나는 산맥 안쪽에 제법 큰 마을이 있는데…….”

위염천은 위치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청운이 정 소감을 보며 말했다.

“준비는 되었는가?”

“니에, 하옵고 금의위를 대동할까요?”

“그리하는 게 좋겠네. 이곳에 있는 금의위가 움직이면 낌새를 눈치챌지 모르네. 가는 길에 낙양위소의 석 천호에게 지원을 청하게.”

“니에, 소인이 반드시 구해내겠사옵니다.”

정 소감은 콧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드디어 청운에게 자신의 진가를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정 소감이 나가고 남은 건 청운과 제갈신기였다.

청운은 다시 물었다.

“그대가 아는 무림맹 간자와 노룡회에 관해서 알려주시오.”

위염천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눈을 돌려서 청운을 바라보았다.

“가족을 구해오면 말해주지.”

“곧 출발할 거요.”

“나는 정파나 황궁의 위선적인 약속을 믿지 않아. 그러니 가족을 구하지 못하면 내 입도 열 수 없을 거야.”

위염천은 완강했다. 어차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니 목숨으로 위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청운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우선 간자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알려주시오. 그리고 우리가 가족을 구해오면 그때 나머지 정보를 알려주면 되지 않겠소?”

“…….”

위염천은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위염천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본 청운이 다시 재촉했다.

“그래도 그대 목숨을 살려주지 않았소?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구조대도 보냈고. 정파와 황궁의 위선이 싫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은혜를 모르는 건 뭐라고 해야 하오?”

위염천의 눈빛이 더욱 세게 흔들렸다.

결국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럼…… 한 가지만 더 약속해라.”

“말해보시오.”

“내 가족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다오.”

청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일이라면 무엇보다 자신 있었다.

“내 말했지 않았소? 내가 제법 부자라고. 그건 걱정 마시오.”

위염천을 쉬게 하고 밖으로 나온 청운은 굳어진 제갈신기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위염천이 두 명의 이름을 말했다. 제갈신기는 그중 한 명의 이름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 고민하실 건 없지 않습니까? 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으니까요.”

청운은 고민하는 제갈신기에게 말했지만, 알고 있었다. 그자의 말이 사실일 거라는 것을. 단지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둘은 말없이 걸었다.

* * *

청운은 비무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일 처리를 하느라 오전에 있었던 예선전을 살피지 못했다. 이미 본선에 진출할 자들이 절반 이상 뽑혔다. 남은 자들도 이틀이면 모두 결정된다.

자리에 없던 청운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개방 방주 염악이 전음을 보냈다.

-무림맹이 시끄럽던데, 무슨 일이야?

-자네가 알고 있는 대로네.

이미 소문이 돌고 있었다. 염악이 모를 리 없었다. 단지, 결과만 있고 내용이 빠져 있었다.

정보를 취급하는 개방의 방주답게 염악은 계속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청운은 즉답을 회피했다.

결국 염악이 질문 방법을 바꿨다.

-에이, 왜 이리 딱딱해? 그러지 말고 쬐끔만 알려주면 안 되겠나?

-어려운 일은 아니지. 내가 부탁한 정보를 가져온다면.

청운은 딱 잘라 말했다. 청운이 원하는 걸 염악이 모를 리 없었다.

-어떤 정보? 혈사천교?

청운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남들이 본다면 경기장에서 예선전을 치르는 자들의 무공을 보며 끄덕이는 것으로 보였다.

염악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전음을 보냈다.

-노인네 살살 꼬드기고 있어. 어찌나 개고기와 술을 좋아하는지 내 등골이 다 휘고 있네.

-돈이 필요한가 보군. 내 인편으로 넉넉히 보내주겠네.

-푸헬헬, 고맙네. 역시 친구는 부자 친구가 최고지.

염악의 구겨졌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동시에 비무대 위에서 겨루던 자들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패한 자가 개방 제자였다. 개방 방주라는 자가 제자가 패했는데 흐뭇하게 웃었다.

어느새 다가온 구지신개가 거침없이 뒤통수를 갈겼다.

퍽!

“악! 왜 때려요?”

“이 자식아! 제자가 패했는데 웃어?”

“예? 아니, 스승님. 그게 아니고요.”

염악은 눈을 힐끗 돌려 청운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청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오후의 경기도 무난하게 치러졌다.

이변을 바라는 자들도 있었지만, 오늘은 이변이 없었다.

그렇게 비무대회가 끝나고 무림맹은 중대 발표를 했다.

“무림대회를 망치기 위해서 침입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일망타진해서 잡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간수 두 명과 붙잡은 자들이 독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현재 조사 중인 만큼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을 확인시켜 주는 정도였다.

일부에서 더 많은 정보를 원했지만, 그 이상은 조사 중이라는 말로 일축했다.

이 때문에 불만을 터트리는 자들이 많았다.

“이 자식들은 뭐만 하면 조사 중이래.”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시간 끄는 거 아냐?”

“뻔하지. 조작하는 걸 거야. 지들이 관리를 잘못하고는 죽은 자들에게 덤터기를 씌우려는 거지.”

“하긴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인가? 내 더러워서 퉤!”

“가세! 술이나 한잔하러.”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사부에도 불만과 압력이 들어왔다. 그러나 제갈신기는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대답했다.

“조사 중이오.”

“뭐요?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시는 게요?”

“총군사! 정녕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자꾸 이러시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제갈신기를 찾은 자들도 뚜렷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저 조사를 진행한 조사관과 참관했던 사천당문 무사들만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이 역시 제갈신기는 막지 않았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들도 다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어디 마음껏 까불어 봐라. 조만간 네놈들의 숨통을 끊어 줄 테니.’

제갈신기는 외압에도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태양보다 더한 분노가 잠들어 있었다.

* * *

작은 연못에 딸린 정자 위에 한 여인이 붉은 비단옷을 늘어트린 채 연못에 담긴 달을 보고 있었다.

섬세하고 매혹적이며 정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인은 달빛을 받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평생 머릿속에 간직할 만한 선녀 같은 얼굴을 한 여인은 면사를 벗은 문희였다.

희고 고운 목덜미를 달빛이 어루만지며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별채를 두르고 있는 반장 높이의 담을 따라서 시커먼 무언가가 죽 솟아 있었다. 솟구친 물체는 사람의 머리였다.

“오오, 벗었다.”

“저 모습이 과연 사람의 모습이란 말인가?”

문희는 항상 이맘때 별채에 딸린 연못의 정자에 올랐다. 하루에 한 번 그녀는 면사를 벗었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수많은 남자가 기를 쓰고 훔쳐보는 것이다.

“밀지 말라니까.”

“조용히 해! 들킨다고.”

문희는 달빛과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며 누군가에게 전음을 보냈다.

-놈들의 발표가 사실이냐?

-예, 모두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시체는?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문희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어디선가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문희는 몸을 돌리며 전음을 보냈다.

-진무사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해라. 그리고 저 밖에 있는 멍청이들의 포섭은 잘되고 있겠지?

-물론이옵니다. 구선녀가 나선 일이오니 심려 마시옵소서.

-하긴, 그 아이들이라면 믿을 수 있지.

문희는 사뿐사뿐 구름을 걷듯이 정자를 나섰고 별채로 들어갔다.

그녀가 모습을 완전히 감췄을 때 숨죽였던 이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난 이 한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이오.”

한 사내의 한숨 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한숨이 이어졌다. 전염병처럼 탄식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 매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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