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151화
“천검무제는 삼백여 년 전 홀연히 세상에 나오신 분이시네, 그전까지는 천검문이라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지. 그런데 혈사천교와의 싸움에 나서서 엄청난 신위를 보였다고 하더군.”
세상이 어려워지면 기인이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의 부름에 응한 그들은 숨겨뒀던 무공을 꺼내 들고 사마외도를 무찔러왔다.
천검무제도 그런 기인 중 하나라는 말이었다.
청운은 정작 알고 싶었던 부분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검무제께서 상대했다는 혈사천교에 대해서 알려주게.”
“혈사천교? 아주 흉악한 놈들이었다고 하더군.”
염악은 ‘흉악하다’는 한마디로 혈사천교를 표현했다. 그 말에 발끈하는 이가 있었다.
[뭐야? 이 자식이!]
-참으세요. 일단 이야기부터 들어보죠.
혈황이었다. 청운은 혈사천교에 대해서 염악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혈황을 찾았다. 혈황도 청운의 말을 듣고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왔다.
염악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사실 노친네가 무공 가르치다가 심심하다고 들려준 이야기야.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더라고. 아! 그리고 이 이야기는 무림 금기야. 어디 가서 흘리면 안 돼.”
“그건 걱정하지 말게. 어서 아는 것을 이야기해주게.”
염악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삼백 년 전 무림은 사파 세상이었네. 그 중심에 혈사천교가 있었고. 그들이 장장 삼십 년을 지배했다고 들었지.”
“그 정도였나?”
“마교와 정파는 숨도 못 쉬었다네. 그때 뜻있는 기인이사들이 한데 힘을 모아서 사파의 혈사천교와 싸워서 승리했다고 하더군. 그때 두각을 나타낸 분이 천검무제시고.”
천검무제라는 별호도 이 싸움에서 얻었다고 한다.
염악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듣고 싶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청운이 운을 띄웠다.
“혈사천교가 어떻게 망했는지 알아?”
“조금 전에 알려줬잖아. 정파 기인들이 나서서 쓰러트렸다고.”
“아니, 자세하게 말이야.”
염악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노친네라면 알지도 모르지.”
“구지신개 님 말씀인가?”
“그렇지. 그런데 안 알려줄 거야. 무림 금기라고 하셨으니. 그나마 술 한잔 드시고 엉겁결에 알려주신 거야. 나도 궁금해서 몇 번 물어봤는데, 무엇 때문인지 말을 잘 안 하셨어.”
아무래도 염악은 정말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청운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염악에게 말했다.
“아무리 무림 금기라지만 자네는 개방의 방주 아닌가?”
“알아봐 달라고?”
눈치 하나는 귀신이었다.
하긴 그래야 밥 얻어먹고 살겠지.
덕분에 청운도 말하기가 편했다.
“내가 꼭 알아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쩝, 자네 부탁이니 한번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큰 기대는 말게.”
염악이 떠나자 혈황이 화를 내듯이 물었다.
[천교를 공격한 놈들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그랬느냐?]
-그건 천천히 물어도 됩니다.
[왜?]
-염악은 자세한 걸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방금도 천검무제 한 명만 언급했고요. 아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여차하면 제가 구지신개를 직접 상대할 생각입니다. 아니면 천뇌 님이라도요.
그제야 혈황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알았다. 그럼 기다려 보마.]
* * *
그날의 비무가 끝나는 순간까지 청운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영호천이나 백청청의 남은 경기 역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의 예선전도 무사히 끝을 맺었다. 미리 준비해서인지 중상자나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서북진검 위염천은 그의 호언장담대로 예선을 통과했다.
청운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역용을 하고 소향객잔으로 향했다.
삼층 창가 자리를 웃돈을 주고 예약한 상태였다.
이번에는 혈황이 함께 움직였다. 염악과의 만남 이후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얼굴 좀 펴십시오. 제가 제대로 알아올 테니까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영호천 이용해서 천일영을 상대하시면 안 됩니다.
[크흠.]
헛기침을 하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런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자신을 암습한 자의 후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군다나 이제는 직접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청운은 쐐기를 박듯이 이야기했다.
-수백 년을 기다려서 이제 제대로 된 꼬리를 잡았잖아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
청운과 혈황이 소향객잔에 들어가자 몇몇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한 사내가 청운을 반갑게 맞이했다.
“도 형, 어서 오시오.”
“구 형, 벌써 와 계셨습니까?”
“하하하, 이분들과 인사를 나누시지요. 모두 예선을 통과한 무인들이시오.”
청운은 구봉팔 뒤에 서 있는 다섯 명에게 인사했다.
“개봉에서 온 도중상입니다.”
청운의 인사를 받고 난 뒤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와서 다른 이들을 인사시켰다.
“반갑소. 나는 중천일검이고 여기 둘은 나와 함께 중천삼검으로 불리는 이검과 삼검이오. 그리고 여기 젊은 두 무사는 형제인데 권지창 소협과 권연창 소협이오.”
“여러 영웅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올라가시지요. 제가 미리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청운은 그들을 이끌고 삼층으로 올라갔다.
삼층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점소이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최대한 공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소향객잔 귀빈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일층이나 이층과 달리 삼층의 귀빈관은 독립된 방으로 되어 있었다. 크기도 여러 종류여서 가장 큰 곳은 삼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한 끼 식사비가 일반인의 한 달 식비로 돈이 없는 자는 삼층에 올라갈 수도 없었다. 삼층은 철저히 예약제로 손님을 받았으니까.
청운이 예약한 곳은 열두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실내의 고급스런 장식에 구봉팔과 그의 일행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너무 비싼 곳에 온 거 아닌지 모르겠구려.”
“하하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털털하게 생활하는 걸 좋아해서 남 앞에 드러내지는 않습니다만, 보기보다 부잡니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 데 이 정도도 못 사겠습니까?”
사실 청운도 처음부터 귀빈관을 빌릴 생각은 없었다. 때려잡아야 할지 모르는 놈들에게 고급 음식이 웬 말이란 말인가.
그러나 조용히 일 처리하기에는 귀빈관이 제격이었다.
돈이 많이 드는 게 아깝긴 하지만, 투자라고 생각해서 흔쾌히 결정했다.
“위 대협은 안 오십니까?”
청운이 넌지시 묻자, 구봉팔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조금 늦는다고 했소. 곧 오실 거요.”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 사이 점소이 둘이 요리를 들고 들어왔다.
곧 산해진미가 커다란 상을 가득 메웠다.
술잔에도 술이 가득 채워졌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 위염천이 도착했다.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이야기 내용은 무림대회가 주를 이루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구봉팔이 넌지시 물었다.
“도 형, 보아하니 자질이 매우 뛰어나신 것 같은데, 혹시 더 강한 무공을 익히고 싶은 생각은 없으시오?”
“그런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나이가 점점 들어서 상승의 무공을 익히기가 쉽지 않으니…….”
청운이 씁쓸한 표정을 짓자, 구봉팔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그래요? 정말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만약 돈이 필요한 일이라면 제가 얼마든지 내놓겠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숙부께서 운영하는 상단의 권리를 오 할이나 갖고 있습니다. 아마 은자로 따지면 이십만 냥은 될 겁니다. 하하하.”
청운의 말에 구봉팔은 물론 위염천마저 눈빛을 반짝였다.
그들의 조직에서 상단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런데 저 멍청한 놈을 잘 이용만 하면 상단을 하나 거저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위염천과 눈빛을 교환한 구봉팔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런 마음이라면 알려드리지요. 사실 우리는 한 문파에 몸을 담고 있소.”
“문파요?”
“그렇소. 도 형이 우리 문파에 들어오면 중요한 자리를 드리지요. 물론 지금보다 훨씬 강한 무공도 익힐 수 있도록 해드릴 거요.”
“흐음, 하긴 이 험한 강호에서 혼자인 것보다는 문파에 속한 것이 낫겠지요.”
“하하하, 과연 현명하구려.”
“어떤 문파입니까?”
“하하하, 그건 가입하시면 자연스럽게 아실 거요.”
“한번 생각해보지요. 그런데 더 올 일행 분이 계십니까? 기왕에 한턱내기로 했으니 많은 분들을 뵙고 싶은데요.”
“우리 일행은 여기에 있는 사람이 전부이오만…….”
그렇다면 이제 이 희극도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그렇군요. 아! 그냥 식사만 하기 뭐 하니 제가 재미있는 걸 보여드리죠.”
청운이 씩 웃고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탁, 하는 소리와 나는가 싶더니, 뼈만 남은 잉어가 화리탕 속에서 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허공으로 향했다.
잉어가 허공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오오오! 이제 보니 도 형의 무공도 대단…….”
그 순간, 청운이 열 손가락을 좌우로 뿌렸다.
제일 먼저 위염천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청운이 손가락을 뻗은 걸 보고 눈을 부릅떴다.
“피해!”
그러나 그의 일성이 끝나기도 전,
퍼버버버벅!
구봉팔을 비롯해서 중천삼검 등이 청운의 지풍을 맞고 뒤로 튕겨 나갔다.
오직 위염천만이 앉은 채 의자를 뒤로 빼며 몸을 뒤로 눕혀서 지풍을 피해냈다.
그런데 그가 몸을 다시 일으키려는 순간, 청운의 검이 어느새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허튼짓하면 가슴이 그대로 갈라질 거야.”
“네놈은…… 누구냐?”
“지금은 궁금해도 참아. 곧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청운은 담담히 말하며 지풍을 튕겨서 위염천의 마혈과 아혈을 찍었다.
그때 이미 다른 자들은 마혈과 아혈이 찍혀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웅천.”
청운이 담담하게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점소이 복장이었는데, 그는 변장을 한 웅천이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옮기게.”
“예, 대인.”
* * *
화려한 실내, 여인의 규방으로 보이는 정갈한 방에 한 여인이 면사를 쓰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림대회에 파란을 몰고 다니는 선녀문의 소문주 문희였는데,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렸다.
“위염천을 비롯해서 그가 이끌던 자들이 모두 사라졌사옵니다.”
순간 면사를 쓰고 있던 문희의 고운 아미가 좁혀졌다.
“위염천이 사라져?”
여인은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향객잔에서 식사를 하러 간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행방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림맹에서 눈치챈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소향객잔은 조사해봤느냐?”
“예, 아가씨. 아무래도 진무사가 움직인 것 같습니다.”
“진무사? 이청운?”
“예.”
“그럼 소향객잔이 함정이었다는 말이군.”
“아무래도 작정을 하고 그들을 납치한 것 같사옵니다.”
“절정고수인 위염천을 큰 소란 없이 제압했다면, 도중상이란 자가 진무사일 가능성이 큰데…….”
피식.
문희의 눈가에 차디찬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녀는 청운의 무공을 몇 차례 상대해봐서 알고 있었다. 청운이라면 위염천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고를 올리던 여인이 말했다.
“감시자의 말에 의하면, 진무사는 자신의 거처에서 책을 읽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래?”
“대회가 끝나자마자 별채로 들어가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흐음, 그럼 그가 아니란 말인가?”
문희의 이마에 가느다란 주름이 그어졌다.
그때 보고하던 여인이 문희에게 물었다.
“저…… 사라진 자들은 어찌하는 게 좋겠는지요?”
“아깝긴 하지만 할 수 없지. 폐기해. 전부 다.”
“예.”
싸늘하게 변한 문희의 명령에 여인이 고개를 숙여 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운이 있는 별채 쪽을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싸늘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