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화
위염천은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허명일 뿐이오. 도 형, 어서 앉으시오.”
청운은 실실 웃으며 위염천과 그 일행을 슬쩍 둘러보았다.
위염천과 함께 있는 자들 중 한 명은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자였고 다른 이는 모르는 자였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많을지도 모르겠군.’
청운은 자리에 앉아서 그들이 준비한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무대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제가 위 대협의 비무를 봤습니다. 위 대협을 응원했었는데 안타깝더군요.”
“하하,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하지 않소. 아직 세 번의 비무가 남았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위염천은 조금 전 패배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청운은 그의 몸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최소 절정 이상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알려진 것보다 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생각대로 모두를 속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음식을 모두 먹은 뒤 청운은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지는 몰랐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 제가 한잔 사고 싶습니다.”
“하하하. 좋소! 그렇지 않아도 도형이 마음에 들었는데 함께합시다.”
처음 청운을 청했던 육청이라는 자였다.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비무가 끝나면 저 앞에 소향객잔에서 보는 것으로 하지요. 제가 자리를 예약해놓겠습니다.”
“소향객잔이면 값이 제법 나가는 곳인데, 괜히 폐를 끼치는 것 아닌지 모르겠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께서 상단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용돈은 언제나 넉넉하게 주십니다. 이렇게 영웅들을 만났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청운의 거듭된 청에 셋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육청 옆에 있던 구봉팔이라는 자가 청운에게 넌지시 말했다.
“도 형, 혹시 몇 명 더 불러도 되겠소?”
이자는 명단에 없는 자였다. 그런데 스스로 다른 이들을 불러오겠다니 청운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청운은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구 형, 이를 말입니까? 제 전낭이 제법 묵직하니 영웅들을 다 불러오십시오.”
“하하하, 좋소! 내 도 형의 호기에 감탄했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도 형의 말대로 영웅들을 소개해 드리리다.”
구봉팔은 호방하게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그러고는 청운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도 형에게 좋은 기회가 생길 수도 있소이다.”
“그리만 된다면야 내 어찌 구 형의 은혜를 잊겠습니까?”
청운은 환하게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 * *
오후의 예선전은 치열했다.
오전에 두 번의 비무를 치른 자들도 있었고 한 번의 비무만 치른 자들도 있었다.
패배한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은 경기에서 승리해야 했기에 비무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덕분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나마 목숨을 잃는 경우는 없었다.
이번 대회에는 오룡오봉 중 오룡삼봉만 출전했다. 이봉은 개인 사유를 들어서 참석하지 않았다.
출전한 오룡삼봉은 무난하게 예선전을 통과했다.
그들 외에도 정통의 명가인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등 여러 문파와 세가의 무인들이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자들 몇 명이 비무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들 중에서도 네 사람은 오룡삼봉에 뒤지지 않았다.
선녀문의 소문주와 신비문파인 월녀문의 월광선녀. 장군부의 영호천과 천검문의 둘째 천일영(天一英)이 그들이었다.
특히 천일영의 실력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의 비무를 본 청운이 개방 방주인 염악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 친구는 누구지?
전음을 들은 염악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턱짓을 했다.
-저기 너처럼 기분 나쁘게 생긴 녀석?
청운은 염악의 말에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그러려니 했다.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그래 백색 무복에 영웅건을 쓴, 잘.생.긴 친구 말이네.
염악은 청운이 말한 이를 힐끔 보더니 대답했다.
-천검문의 둘째 공자 천일영이야. 개망나니로 소문났었던 놈이지.
천검문은 하남성의 천호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정도문파다. 정식 이름은 천중일문인데 사람들은 그들의 독문무공인 천검(天劍) 때문에 천검문이라 부른다.
-망나니치고는 실력이 뛰어난데?
-죽다 살아난 뒤로 사람이 바뀌었어. 옛날에는 입에 담는 것조차 더러운 짓은 다 하고 다녔었지. 그런데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아?
-무엇이 말인가?
-글쎄 저놈이 천호산에 꽃놀이 갔다가 발을 헛디뎌서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는데, 행방이 묘연했어. 바로 밑이 급류거든. 사람들은 다들 죽었다고 생각했지. 천벌을 받은 거라고.
-그런데 살아서 돌아왔나 보군. 그것도 무공이 강해져서.
-그래,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런 쓰레기 같은 자에게 기연을 주시다니. 나는 죽어라 동냥질하고 개같이 처맞으면서 무공을 배웠는데, 저 자식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서 무공을 배웠잖아.
청운은 염악의 불평을 들으며 천검문의 둘째를 보았다.
두 눈에 정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봐도 망나니로는 보이지 않았다.
‘새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
사내는 하루만 보지 않아도 달라진다고 했다. 그의 변화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가 영호천에게 큰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정 이상이군. 무공 역시 예사롭지 않고.’
조금 전 비무에서 그가 보여준 몇 가지 초식이 머릿속에 남았다. 어떤 무공인지 모르지만, 현기가 담겨 있었다.
‘이럴 때 혈황 님이 계셨다면 좋을 텐데, 아쉽군.’
자신의 경험으로는 상대의 무공을 전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혈황이라면 천일영이 펼쳤던 무공을 알아보거나 근간이 무엇인지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히 염악이 천일영의 무공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저놈이 얻은 무공이 뭔지 알아? 삼백 년 전의 정도 기인이셨던 천검무제(天劍武帝)의 무공이야. 그분은 천검문의 십이대 선조이기도 하지.
-천검무제?
-삼백 년 전 혈사천교를 무너뜨릴 때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천검무제야.
-뭐? 삼백 년 전에 혈사천교를 무너뜨렸다고?
청운은 염악의 말에 깜짝 놀라서 빠르게 반문했다.
염악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사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야. 나도 개방 방주가 아니었다면 몰랐을걸?
-그 일에 대해서 더 아는 것 있나?
삼백 년 전 혈사천교를 무너뜨린 사람이라면 혈황의 원수에 대해서도 알지 몰랐다.
-아는 거야 있긴 있는데…….
그때 함성이 들렸다.
비무대 위로 은은한 붉은 비단 무복을 입은 늘씬한 몸매에 면사를 한 여인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우아아아! 월광선녀다!”
“월녀문이다!”
천지가 떠나갈 듯 함성이 울렸다.
그러나 청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월광선녀의 미모보다 염악의 말이 더 신경 쓰였다.
하지만 염악은 입을 헤 벌린 채, 비무대 위에 올라온 월광선녀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아.”
청운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답을 재촉하면 수상하게 여길지 몰랐다. 일단은 기다려보는 수밖에.
월광선녀의 상대는 점창파의 제자인 비산검(飛散劍) 유철산이었다.
그는 이번 무림대회에서 기대되는 정파의 후기지수 중 한 명으로, 오전에 두 번의 승리를 해서 예선을 통과했다. 이번 경기는 일등인지 이등인지가 결정하는 경기였다.
마주한 둘은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비무를 시작했다.
유철산이 선공을 펼쳤다.
그는 점창파의 비전인 분광검법(分光劍法)으로 월광선녀를 상대했다.
비무대 위에 검기가 난무했다. 쾌검인 분광검법은 월광선자의 요혈을 노리고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월광선녀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시리도록 맑은 검을 뽑아 든 그녀는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가며 초식을 펼쳤다.
채채챙, 챙챙.
점창파의 분광검법은 매서웠다. 검기가 그물처럼 사방을 점하고 월광선녀를 압박했다.
월광선녀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매끄러운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신법을 펼쳤다. 그녀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검기의 그물이 찢어졌다.
검기의 그물을 유유히 빠져나간 그녀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한 마리 잉어와 같았다.
유철산은 가슴으로 검을 끌어당기더니 곧장 앞으로 죽 뻗었다. 빠르게 접근하던 월광선녀는 눈을 빛내더니 급히 상체를 틀었다.
슈욱!
간발의 차로 유철산의 검을 피한 그녀의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지켜보던 자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아!”
“휴!”
월광선녀는 개미허리같이 잘록한 허리를 비틀며 검을 빙글 회전시켰다.
샤라라라!
순간 월광선녀의 몸 주위에 검의 잔상이 생겼다.
그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었다.
“나왔다!”
“월광검이다!”
청운 역시 깜짝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왜 나와?’
한번 시작된 월광선녀의 검의 잔상은 그녀의 몸 주위를 떠나지 않고 휘몰아치는 분광검과 맞섰다.
채챙, 채앵, 챙챙챙!
유철산의 몸이 서서히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두들겨도 그녀의 몸에 두른 검의 잔상을 뚫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월광검에 의해서 자신의 분광검이 기세를 잃고 있었다.
훌쩍 뒤로 물러선 유철산은 빙글 몸을 회전하며 낮췄다. 이내 검을 허공에 뿌리더니 곧장 바닥을 차고 앞으로 튕기듯이 나아갔다.
신검합일.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월광선녀를 덮쳤다.
월광선녀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검이 서서히 위로 들리더니 그대로 앞으로 내려졌다. 동시에 검의 잔상 역시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앉으며 다가오는 유철산에게 쏘아졌다.
차라라락!
따다다다당!
검의 잔상이 연속으로 부딪쳤다.
유철상이 버티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크윽!”
신검합일이 깨지며 막강한 검격이 압박하자 유철상이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다가온 월광선녀의 검이 그의 목에 드리워졌다.
“월광선녀, 승!”
심판은 지체 없이 월광선녀의 승리를 외쳤다.
관중들이 떠나갈 듯 환호했다.
월광선녀는 이에 화답하듯 검을 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한곳을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청운이었다.
피식.
청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미소 지은 뜻을 눈치챘는지 월광선녀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군웅들은 그녀와 유철산이 비무대 위에서 내려갈 때까지 환호했다.
청운은 사라져가는 월광선녀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서 요즘 안 보이나 했더니, 대회에 참가 중이었군.’
청운은 월광선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녀가 펼친 무공은 잘 아는 무공과 비슷했다.
월광파천무.
백가장의 진산절학이었다.
백철군이 펼칠 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청운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월광선녀가 바로 백청청인 것이다.
그런데 청운 말고도 월광선녀의 무공을 알아본 이가 있었다.
무림맹주 양조생이었다.
‘저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대회에 참석했다는 말인가? 하아, 한바탕 시끄러워지겠군.’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백청청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무림대회에 나오다니.
양조생은 골치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별 사고가 안 나기만 부처님께 빌어야겠군.’
* * *
청운은 비무가 남았는데도 염악을 불러냈다.
둘은 비무대 뒤쪽으로 이동해서 마주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들었으면 하는데.”
“무슨 이야기? 천검문?”
“그래, 그리고 천검무제에 대해서 알려주게.”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염악은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고 천검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