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149화
“이 친구야, 생각을 해보게. 우리가 아무리 거지라지만 동냥질만 해서는 먹고살기가 힘들다네.”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네. 큰 무리가 없다면 내가 개방에 기부를 하겠네. 요즘 무림맹엔 자금이 부족하거든.”
“나야 좋지. 그렇지 않아도 무림맹의 금고가 텅텅 비었다는 소리를 듣고 힘이 빠졌었거든.”
예선전을 치르는 동안 축 처져 있었던 염악이 떠올랐다.
설마 정보를 공짜로 넘겨야 하는 것 때문이었나?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어쩌면 대의에 어긋나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십만 개방도를 먹여 살려야 하는 방주 입장에서는 배고픈 거지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협의 찾다가 굶어 죽는 것보다 욕 좀 먹고 배부른 게 나으니까.
“알았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 정보를 최대한 모아오게.”
염악이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가자, 청운은 웅천과 정 소감을 불렀다.
그러나 달려온 사람은 금의위의 웅천뿐이었다.
“정 소감은 어디 간 것인가?”
“예, 급히 알아볼 것이 있다며 달려 나갔습니다.”
“또 사건이 터진 건 아닌지 모르겠군.”
어제도 늦은 시간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오늘도 예선전에서 사고가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청운은 별수 없이 웅천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책자를 몇 부 필사한 후 낙양 위소에 있는 석 천호에게 한 부 전하게. 자네도 한 부 가지고 있고, 정 소감과 안가에서 수련하고 있는 영호천에게도 전하게. 그리고 오늘은 갈 수 없다는 말도 하고.”
“예, 대인.”
“석 천호와 상의해서 그곳에 기재된 인물들을 주시하게. 정 소감이 돌아오면 동창에게 그들의 감시를 맡기고, 그대들은 유사시 그자들을 잡아들여야 하니 준비해두게.”
“알겠습니다.”
노룡회에 속한 인물로 보이는 자들이다. 그냥 풀어놓고 일이 터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대로 잡아들여서 놈들의 계략을 원천 봉쇄할 생각이었다.
‘감시하는 일은 동창에게 맡기고, 금의위는 유사시 나와 함께 움직여서 놈들을 일망타진한다.’
혼자서 모든 인원을 상대할 수 없다. 금의위와 연계해서 놈들을 상대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웅천이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은 청운은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초저녁이건만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그런데 하얀 달이 아닌 붉게 물든 적월이 붉은빛을 대지에 뿌리고 있었다.
* * *
술시 말, 적월이 붉은빛을 잃고 희미해져 갈 때 기다리던 정 소감이 뜻밖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제에 이어서 또 다른 사건이 터진 것이다.
“대인, 유시 중간에 객잔에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일곱이 죽고 스물이 넘게 다쳐서 무림맹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간단했다.
객잔에서 승리를 자축하던 이들이 떨어진 자들과 시비가 붙었고 결국 칼부림이 벌어졌다.
“마침 주변을 순찰하던 경비대가 빠르게 나서지 않았다면 더 많은 이들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정 소감의 말에 청운은 혀끝을 찼다.
“쯧쯧, 내일도 예선이 있건만 적당히들 마실 것이지.”
말싸움 끝에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다.
평소라면 적당히 넘어갔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술이 한잔 들어갔다면 술기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더욱이 무림대회에서 명성을 얻을 기회가 사라진 자들에게는 더없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 소감의 이어지는 말에 청운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인,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사옵니다.”
“무언인가?”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양측에서 고성이 오갔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비가 붙지 않고서야 어떻게 싸움이 벌어지겠는가.
그런데 이어지는 정 소감의 말에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말싸움을 시작한 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뭐라? 선동만 하고 뒤로 빠졌다는 말인가?”
“니에. 그들의 모습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인지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사옵니다.”
수많은 무림인을 전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말싸움을 시작한 이들을 아무도 몰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이 방해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런 유치한 짓까지 벌일지는 몰랐군.”
무림대회에 몰려든 수많은 무림인 중에서 간자가 틀림없이 숨어들었을 것이다. 이미 개방 방주가 전해준 책자에 의심스러운 인물만 백 명이 넘었다.
이런 조잡한 계략을 꾸미는 자들이 누구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틀림없이 다시 움직일 확률이 높았다.
청운이 생각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 소감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청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대인,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미 총군사께서 이상함을 느끼시고 명령을 내렸사옵니다.”
“천뇌 님을 뵙고 왔나 보군. 그분이 움직이셨다면 놈들의 꼬리를 잡는 일이 어렵지는 않겠지.”
청운은 늦은 시간까지 정보를 얻기 위해 뛰어다닌 정 소감에게 따스한 미소와 함께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네가 고생이 많군.”
“아니옵니다. 소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
“아니야. 내 조만간 정원 태감님께 자네의 활약을 보고하도록 하겠네.”
청운의 대답에 정 소감은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쥔 정 소감이지만 여전히 그의 직급은 소감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역시 태감에 오를 것이고 이번 일이 그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었다.
정 소감이 물러간 후 홀로 남은 청운은 옆자리를 보았다.
‘영호천에게 푹 빠지셨군.’
혈황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영호천 주위만 맴도신다. 덕분에 홀가분하긴 했지만 조금은 허전한 마음이 드는 청운이었다.
‘총군사께서 아직 주무실 시간은 아니겠지.’
청운은 늦은 시간이지만 제갈신기를 찾아서 별채를 나섰다. 그와 늦은 밤까지 할 말이 많았다.
* * *
일차 예선이 끝나고 이차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차 예선전에서는 이전과 다른 부분이 있었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서 겨루고, 그중 가장 많이 이긴 두 명이 이차 예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동률일 때는 승자승 원칙으로 진행했다.
또한 이차 예선전부터는 심사관이 세 명에서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심사관은 모두 절정에 이른 이들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무림대회에 참석한 인물 중 절정을 넘어서는 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중재하고 막기 위해서 더 높은 경지의 무인이 배치되지는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선포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거나 목숨을 취하는 자는 실격 처리한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좌측 비무대에서 이차 예선이 치러졌다.
이번 대전은 무당파 속가제자인 칠성검객 진명과 어제 사고를 일으킨 서북진검 위염천이었다.
진명은 비록 속가제자이지만 무제를 인정받아서 정식제자만 익힐 수 있는 칠성검법(七星劍法)을 사사받았다. 덕분에 다른 속가제자들보다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진명과 위염천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중년의 진명은 위염천을 경시하지 않고 처음부터 칠성신공을 끓어 올려서 칠성검법의 기수식을 잡고 준비했다.
그 모습에 위염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편 청운은 비무대 오른편에서 관전하고 있었다. 어제 사람을 죽인 위염천의 표정을 처음부터 유심히 살펴보았다.
‘위험한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놈이 어제 원대식의 목을 꿰뚫을 때 지었던 위험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비무대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청운이 걱정할 때 비무가 시작되었다.
진명은 선수필승(先手必勝)의 이치를 살려서 선공했다.
위염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찔러오는 진명의 검을 가볍게 쳐냈다. 그는 단검을 들었던 어제와 달리 장검을 들고 있었다.
챙챙!
시작은 가볍게 시작되었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듯이 가벼운 공방이 벌어졌다.
십 초가 흘렀을 때 위염천이 훌쩍 물러서며 검을 허공에 뿌렸다. 우뚝 선 그의 얼굴은 여유로웠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에 반해서 진명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최대 비기인 칠성검법이 가볍게 막혔기 때문이었다.
진명은 다시 한번 허공에 검을 뿌리며 앞으로 나섰다.
칠성둔형.
칠성보법이라고 알려진 그의 비기가 칠성검법과 함께 펼쳐졌다.
휘리리릭.
칠성둔형은 순식간에 상대의 뒤로 돌아가는 절정의 보법이다.
진명은 앞으로 파고들며 위염천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위염천의 검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일 상체를 숙이지 않았다면 가슴에 큰 상처가 생겼을 공격이었다.
진명은 연달아 보법을 밟으며 몸을 빙글 회전시키더니 위염천의 등 뒤로 돌아갔다. 동시에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러서 위염천의 목 옆에 검을 드리웠다.
“우와와와!”
“이겼다! 무당의 진명이 승리했다.”
너무도 싱거운 결과였다. 분명히 처음 겨룰 때는 진명보다 위염천이 한 수 위의 기량을 선보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진명이 이겼다.
위염천이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진명이 회전하며 뒤로 돌아갈 때 위염천의 눈빛 속에 여유가 있었다.
청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의로 져주었군.’
무슨 의도인지 모르지만, 청운의 눈에는 위염천이 가짜로 패배한 것으로 보였다.
‘두 번의 승리만 하면 이차 예선을 통과할 수 있다. 져준 것은 전략인가, 아니면 모두를 기망하는 것인가?’
청운은 위염천이 마지막 순간에 지었던 비릿한 웃음을 떠올렸다. 마치 진명이 어떻게 나올지 아는 눈치였다.
잘 짜인 한편의 경극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청운은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았다. 지금은 놈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개방방주인 염악이 전해준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기에.
오전 비무대회가 끝났다.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예선전이 치러진다.
몇 가지 단서를 달아서인지 오전에 큰 사고는 없었다. 그러나 이변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이 갑자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려스러운 일은 그들 중 상당수가 개방방주 염악이 건네준 명단에 포함된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제갈신기는 청운을 따로 불러서 명단을 넘겨주었다.
“받게. 어젯밤 자네가 건넨 자들에 관한 보고서네.”
청운은 명단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제갈신기에게 말했다.
“추가된 자들이 있군요.”
“첩의단에서 파악하고 있던 자들이네. 의혹은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는 못했네.”
청운이 건넨 백여 명 중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한 자들이 오십 명이 넘었다. 몇몇이 일차 예선에서 떨어져서 오십 명이 채 안 되었는데 다시 열일곱이 추가되었다.
‘이들이 전부 노룡회 소속은 아니겠지만 의심스러운 건 확실하다.’
무림맹의 적은 신비세력인 노룡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도맹과 마교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청운은 제갈신기와 헤어진 후 정 소감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훌쩍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역용으로 모습을 바꾼 후 무림맹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중년의 평범한 인상으로 변한 청운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무복에 한 자루 검을 차고 있었다.
청운이 향한 곳은 음식을 배식하는 곳이었다.
워낙 많은 인물이 모이다 보니 음식을 타는 곳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청운은 몸을 살짝살짝 틀면서 인산인해를 뚫고 배식을 받았다. 음식은 만두 세 개와 대나무 물통이 전부였다. 배식이 마음에 안 들면 사비를 들여서 근처 객잔을 이용하면 된다.
청운은 음식을 가지고 인의 장막을 해치고 나왔다.
담장 아래 삼삼오오 모여서 음식을 먹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청운은 그들 옆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은 다음 만두를 먹었다.
“크윽, 무슨 무림대회 음식이 저잣거리 싸구려보다 못해.”
남들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투덜거린 그는 다시 만두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때 곁에 있던 사내들이 말을 걸어왔다.
“형장, 괜찮으면 이리 와서 함께 드시겠소?”
청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사내 셋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위염천이었다.
“아이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해가 동도인데 안 될 게 뭐 있소. 마침 싸 온 음식이 많으니 함께 합시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저는 개봉에서 온 양수검(兩手劍) 도중상이라고 합니다.”
청운은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는 다른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혹시, 서북진검 위염천 대협 아니신지요?”
“나를 아시오?”
“이런, 제가 운이 좋군요. 무림대회에서 위명이 쟁쟁하신 위염천 대협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청운은 포권을 취하며 위염천에게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