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148화
“그가 잡혔을 때 약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유곡의 심장을 뚫은 검이 매옥청의 검이 맞긴 한데,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고 하옵니다.”
상대를 죽이고 괴로움에 술이나 약을 먹었을 수도 있다. 혹은 우발적인 살인일 수도 있고.
그런데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신경을 거슬렸다.
청운은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증거 말고 증인은 있나?”
“그건 아직 모르겠사옵니다.”
방금 벌어진 일이다. 정 소감도 전후 사정을 알지는 못했다.
“그것부터 알아보게 그리고 붙잡힌 매옥청의 상태도 살펴보고.”
“니에, 최대한 자세히 알아보겠사옵니다.”
다음 날, 전날 밤에 있었던 살인사건이 알려졌는지 예선전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특히 화산파와 종남파 무인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화기애애하던 두 문파 사이에서 얼음장 같은 한풍이 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억지로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기 전 정 소감이 청운을 찾아왔다.
“대인, 명하신 것을 알아보았사옵니다.”
“그래, 어찌 된 일인가?”
청운은 오전 내내 마음이 쓰여서 제대로 비무를 지켜보지 못했던 터라 정 소감의 말이 반갑기만 했다.
정 소감이 알아온 내용을 말했다.
“먼저 증인은 없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매옥청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펄쩍 뛰고 있습니다.”
“자신이 유곡을 죽이지 않았단 말이지?”
“니에, 자신은 잠자리에 일찍 들었다고 하옵니다. 전날 밤 일은 아예 기억을 못 하고 있사옵니다. 소인이 살펴보았는데 거짓은 아닌 것 같았사옵니다.”
매옥청이 강력하게 부인한다면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
현재 확실한 증거는 그의 검이 유곡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는 것뿐.
이 때문에 조사를 하는 무림맹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검이야 누군가가 몰래 훔쳐갈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화산과 종남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 약에 취한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 부분도 문제이옵니다. 매옥청은 저녁식사를 한 후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소화에 좋은 탕약을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옵니다.”
“그럼 탕약은 확인했나?”
“이미 무림맹에서 매옥청의 숙소를 확인했지만, 시비가 그릇을 치운 상태라고 하옵니다.”
청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중요한 단서가 사라졌다. 그릇을 치운 시비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릇을 치우는 일은 그가 해야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청운은 문득 전에 봤던 광경 하나가 떠올랐다.
“혹, 그자가 약에 취했을 때 상태가 어땠는지 아는가?”
“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 눈이 풀려 있었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약간 실성한 자처럼 헤헤거렸다고 하옵니다.”
청운은 정 소감이 말한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약을 알고 있었다.
‘설마, 앵속인가?’
청운은 매옥청이 마셨다는 탕약 속에 앵속이 들어간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어쩌면 매옥청이 누명을 쓴 것일 수도 있겠군.’
이유는 충분했다.
화산파와 종남파를 멀어지게 만들려는 수작일 수 있었다. 혹은 무림대회를 방해하려는 자들의 계략일 수도 있었다.
매옥청이 유곡을 죽이려 했다면 굳이 자신의 독문병기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우발적인 살인도 생각할 수 있지만, 매옥청의 상태를 보면 우발적인 살인은 아닌 듯했다.
‘만일 놈들의 흉계라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겠지.’
청운은 어젯밤 자신이 직접 유곡의 시신을 보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직접 그의 시신을 봤다면, 그가 마신 약이 앵속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청운은 정 소감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약당에 확인해보게. 그릇을 치웠다는 시비의 주변도 살펴보고, 아무래도 매옥청이 마신 탕약 속에 앵속이 들어갔을지도 모르네.”
“소인이 한번 알아보겠사옵니다.”
정 소감이 떠나고 청운은 곧장 제갈신기를 만났다.
그에게 살인사건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제갈신기 역시 이상함을 느끼고는 매옥청에 관한 결정을 뒤로 유보했다.
이 소식은 화산파와 종남파에도 전해졌다.
화산과 종남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제갈신기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오랜 세월 형제처럼 지낸 사이여서 그게 사실이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재조사가 진행되었다.
* * *
흉흉함 속에 셋째 날 예선이 치러졌다.
참가자는 오전 오후로 나뉘어서 각자 한 번씩만 참가하면 되었다.
생각보다 참가자들의 실력이 뛰어났다. 이변도 속출했다. 정통의 강호로 알려진 구대문파와 세가연합의 제자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가장 많은 이들이 예선을 통과한 건 역시 전통의 강호였다.
그런데 셋째 날 예선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으로 부상자가 아닌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오전에 한 사람이, 오후에는 두 사람이 사망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심판을 보는 이도, 주변에서 대기하던 자들도 손을 쓰지 못했다.
대회를 지켜보던 청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직관하던 비무대에서 방금 사람이 죽었다.
산동지방에서 쌍검팔방(雙劍八方)이라 불리는 원대식이 서북진검(西北眞劍) 위염천에 의해서 목이 꿰뚫리고 말았다.
청운의 눈빛이 더없이 차갑게 변했다
‘고의인가?’
위염천은 원대식의 검을 살짝 피하면서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좌수에 들린 단검이 원대식의 목을 찔렀다.
분명히 가슴을 공격하거나, 혹은 목젖 아래에서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위염천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빠르게 원대식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청운은 위염천의 눈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가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둘 사이에 원한이 있나?’
청운은 힐끔 고개를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풀죽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광견신개 염악.
개방방주인 그 역시 이번 무림대회에 참관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염악보다 훨씬 지저분하게 생긴 노인이 있었다. 염악의 스승인 구지신개(九指神丐) 구겸이었다.
청운도 염악이 스승인 구겸에게 붙잡혀서 무림대회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며칠 전에 인사도 나누었다.
그때도 죽을상을 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청운은 그런 염악에게 전음을 보냈다.
-왜 이리 힘이 없는 건가?
전음을 들은 염악은 청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럴 일이 있네. 그런데 무슨 일이야?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뭐? 방금 비무?
-맞아. 아는 것 있으면 말해 봐.
-쌍검팔방은 군부 출신이야. 듣기로는 북방에서 근무했었다고 하더라고. 산동성이 고향인데 그쪽에서 제법 협명을 날렸지. 무위는 일류 고수고. 이렇게 허망하게 갈 인물이 아닌데…….
염악은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전음을 보냈다.
-문제는 서북진검이야. 이자가 아주 묘해.
염악은 말을 하다 말고는 청운을 보았다.
청운은 염악을 여러 번 상대하다 보니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흔들더니 전음을 보냈다.
-정보비는 넉넉하게 치르지. 그러니 뜸 들이지 말고 풀어놓게.
-하하, 오래간만에 포식하겠는데?
염악은 비루먹은 강아지에서 혈기왕성한 투견으로 돌아갔다. 그가 아직도 비무대 위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위염천을 보며 말했다.
-저자가 석 달 전까지 삼류 무사에 불과했다면 믿겠는가?
-뭐? 삼류? 기연이라도 만난 것인가?
-그건 모르겠고. 석 달 전에 사파의 일류 고수인 음명귀(陰冥鬼)의 멱을 땄지. 지켜본 자들 말에 의하면 대등하게 싸웠다고 하더군.
염악은 무엇이 불만인지 한쪽 눈가를 실룩이며 말을 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삼류 무사가 갑자기 일류 고수와 대등하게 싸워? 그래서 조사를 했는데 몇 달간 사라졌었다고 하더군. 그사이에 자네가 말하는 기연을 얻은 것 같기는 하네.
염악의 심드렁한 말에 청운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혈룡단인가?’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신비세력이 고수를 찍어내려고 만든 영단이 혈룡단이다.
만일 자신의 생각대로 혈룡단 때문이라면, 위염천이 노룡회와 관련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 사망사고가 이번 예선까지 세 번이네. 그들에 대해서도 조사해주게. 그리고 요즘 기연을 얻은 것처럼 갑자기 강해진 자가 있는지도 알아봐.
-흠, 그거 의뢰 맞지?
-섭섭지 않게 값을 치르겠네.
염악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손으로 가린 그가 청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하하하하. 무지하게 어려운 일인데, 내가 자네 얼굴을 봐서 특별하게 신경 쓰도록 하지.
-고맙군. 얼마나 걸리겠나?
-이따 저녁에 보자구.
-저녁에? 후후, 알겠네. 최대한 빨리 부탁하지.
염악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천하의 개방도 신비세력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반나절 만에 조사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어느 정도 조사가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잘됐군.’
* * *
염악은 보무도 당당하게 청운을 찾아왔다. 누런 이를 씩 드러내며 입구를 지키는 금의위를 지나쳤다.
웅천의 안내를 받은 그는 청운을 만났다.
나름대로 한 손을 들어서 여유마저 부렸다.
“오래 기다렸나?”
“목이 빠지는 줄 알았네.”
청운은 피식 웃으며 농을 건넸다.
자리에 앉은 염악은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귀빈의 숙소로 사용되는 곳답게 화려했다.
특히 염악의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염악은 손을 들어서 벽을 가리켰다.
“저 글씨, 자네가 쓴 거지?”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염악의 입이 귀밑까지 올라갔다.
염악은 품속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더니 탁자에 던졌다.
탁!
“의뢰비는 저 족자가 좋겠어.”
연중삼원 이청운의 글씨와 그림이 돈 된다는 것쯤은 염악도 귀동냥으로 들은 터였다.
청운 역시 흔쾌히 승낙했다.
“내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인데 알아보는군. 자네가 원한다면 그리하지.”
“크하하하. 좋았어! 이런 작품을 하나쯤 가지고 싶었단 말이야. 내 방에 탁하니 걸어놓으면……. 어떤 빌어먹을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군. 아! 안 되겠어, 잘 숨겨둬야지.”
염악은 두 주먹을 움켜쥐며 좋아했다가 이내 뒷일을 생각하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청운은 그사이 책자를 펼쳐서 훑어보았다.
많은 이름이 책자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대충 봐도 백 명이 넘는 숫자였다.
‘오늘 사고 친 자들이 모두 적혀 있군.’
아마도 무림대회를 망치는 게 목적일 것이다.
그들을 사주한 자들은 보나마나 신비세력의 하수인인 노룡회일 것이고.
청운의 머릿속에서 그들의 계략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청운은 책자를 내려놓고, 족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염악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이 다는 아닐 것 같은데?”
“물론이지. 확인된 자만 백열두 명이네. 더 있는 것이 분명한데 아직 확인이 끝나지 않았어.”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그것도 정사 양측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심지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인물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다.
청운이 염악에게 혹시나 해서 물었다.
“이 책자,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겠지?”
“큰일 날 소리 하는군. 구파와 오대세가의 제자가 포함된 명단이네. 그들이 알게 되면 어찌 나오겠나?”
“개방을 잡아먹으려 들겠지. 그럼 총군사님은 어떤가?”
염악이 대뜸 손을 쳐들더니 냉정하게 저었다.
“불가!”
“왜 안 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