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화
흠칫 놀란 중년 사내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헉! 용?”
하늘에서 거대한 청룡이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청룡의 날카로운 이빨을 피해서 전력을 다해 물러섰다. 하지만 완벽히 피하지는 못해서 청룡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큭!”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에 신음을 삼킨 중년 사내는 고개를 돌려서 청룡이 날아온 하늘을 보았다.
한 사람이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중년 사내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진무사?”
청운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급히 무림맹으로 돌아왔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조금 늦고 말았다.
청운의 두 눈 가득 쓰러져 있는 정 소감의 모습이 들어왔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충격이 큰 듯했다.
청운이 손짓을 하자, 쓰러져 있던 정 소감이 둥실 떠올랐다.
창백한 정 소감의 얼굴과 찢어진 옷자락을 본 청운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놈이 어디서……!”
분노한 청운의 두 눈에 붉은 기운이 어른거렸다.
청운은 중년 사내를 노려보며 오른발을 들었다가 바닥을 굴렀다.
쿠우웅.
그 모습에 중년 사내가 흠칫했다. 청운이 공격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나직한 소리만 들렸을 뿐, 청운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중년 사내가 안도의 숨을 쉬며 그 자리를 떠나려 할 때였다.
쩌적, 쩌저적!
발밑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 사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밟고 있는 비무대에 실금이 가면서 붉은 기운이 거미줄처럼 번지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중년 사내는 황급히 비무대에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발바닥에 끈끈한 뭔가가 붙어 있는 듯했다.
너무 놀란 중년 사내가 두 눈을 치켜떴다.
“무, 무슨?”
중년 사내의 두 눈에 청운의 모습이 보였다.
청운의 발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비무대 아래로 흘러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자, 그 붉은 기운이 자신의 발아래에서도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게 보였다.
붉은 아지랑이는 곧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몸마저 휘감았다.
“커억, 컥컥컥.”
중년 사내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 눈도 붉게 충혈되어서 툭 튀어나왔다.
청운이 여전히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잘 가라.”
펑!
후두둑.
중년 사내의 몸이 폭발하며 한 줌 혈수가 되어서 사방에 뿌려졌다.
청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발을 들어 강하게 바닥을 찍었다.
쾅!
쩌저저저적!
청운을 중심으로 비무대가 터졌다. 십장이 넘는 비무대가 폭발하듯이 뒤집히며 폭삭 주저앉았다.
청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청운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슈슈슈슉!
소리 없이 쏘아진 지풍이 사내들을 덮쳤다.
사내들은 미간에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린 채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들이 모두 쓰러졌을 때서야 무림맹 무사들이 달려왔다.
청운은 기절해서 축 늘어진 정 소감을 안고 장내를 빠져나가며 동창 무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거처로 가서 대기하게.”
* * *
제갈신기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이가 없었다. 천뇌라 불리는 자신이 이토록 단순한 계략에 당하다니.
그런 제갈신기를 보며 무림맹주 양조생이 달래듯이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인명피해는 적었으니 천만다행이지 않소?”
양조생의 말대로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 경비를 섰던 무사들이 십여 명 죽었을 뿐이었다.
더한다면 동창의 무사 이십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벌어진 소란에 비하면 피해라 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사방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맹주님, 열 채 넘는 건물이 불에 탔고 그중 전소된 전각이 일곱 채나 되옵니다. 그 안에 담긴 물품까지 치면 그 액수가 상상 이상일 것이옵니다.”
“어쩌겠소. 작정하고 불을 지른 후 도망치는데.”
제갈신기는 양조생의 위로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린 그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눌렀다.
곧 있을 회의에서 장로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머리가 욱신거렸다.
양조생이 이해한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그래 진무사는 어쩌고 있소?”
“별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답니까?”
“연락을 넣었는데 모르겠습니다.”
청운은 포로를 남겨두지도 않고 모두 죽여버렸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거겠지.’
제갈신기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유추해냈다.
청운이 아낀다고 알려진 정 소감이 크게 다쳤다.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모르지만, 그가 정신을 잃고 청운에게 안겨서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더욱이 파견된 동창 무사들이 절반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남은 절반도 온전한 자가 몇 명 없었다. 대부분 중상을 입고 약당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양조생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제갈신기에게 물었다.
“아참, 백가장 여식은 어찌 되었소? 듣자 하니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던데.”
“예, 무림맹을 돌며 습격자들을 처단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구했다고 합니다.”
“다행이구려. 제운탑 문제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는데, 이번에 백마사와 소림에서 양보를 하겠구려.”
“예, 이번에 소림승들도 백가장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선지 백 소저를 보는 눈이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무림대회는 어찌할 생각이시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회의가 있기 전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제갈신기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정대로 밀어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능하겠소? 비용도 비용이지만 비무대를 다시 세우고 물품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텐데.”
“여러 상단에 사람을 보냈으니 내일 중으로 연락이 올 것입니다.”
둘은 절로 한숨을 쉬었다. 몇 달을 준비해도 부족한 일을 보름도 안 남은 시간에 처리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낙양이 멀지 않아서 마음먹고 준비하면 못 할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맹주님, 그만 일어나시지요. 시간이 되었습니다.”
“쯧쯧, 벌써 시간이 되었구려.”
양조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갈신기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뒤를 따랐다.
* * *
청운은 회의에 참석하라는 말에도 불참했다. 대신에 낙양 금의위 위소로 발걸음 했다.
청운의 등장에 석덕조 천호가 달려 나왔다.
청운은 석덕조의 안내를 받아서 어디론가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빛이라고는 작은 창문을 통해서 흘러 들어오는 게 다였다.
두꺼운 철문으로 막혀 있는 감방에 청운이 들어섰다.
텅텅 비어 있는 감방의 그늘진 벽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청운이 어둠을 향해서 말했다.
“내 제안은 생각해 보았느냐?”
“큭큭, 어림없는 이야기. 어서 날 죽여라.”
“아혈을 제압하지 않았으니 죽을 것이면 스스로 혀를 깨물고 목숨을 끊어라.”
청운의 날카로운 소리에 어둠 속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응.”
“시간이 더 흐르면 네놈의 소용 가치가 없어질 거다. 반각을 기다릴 것이니 그 안에 결정해라.”
청운은 할 말만 하고는 입을 닫았다.
반각은 금세 지나갔다. 청운은 시간이 되자 어둠 속을 보며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가(可)냐? 부(否)냐?”
청운의 재촉에도 어둠 속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청운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한걸음에 철문을 밀고 나가려는데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거, 성격도 급하네. 하면 될 것 아니야, 하면!”
돌아선 청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 * *
무림맹이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중원을 강타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사도맹을 지목했다.
그 말에 무게가 실린 이유가 있었다.
바로 포로로 잡힌 자들 중 사파인이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는 당장 사도맹을 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사도맹에서는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무림맹의 많은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습격이 있던 다음 날 오후, 제갈신기는 한 무리의 방문을 받았다.
화려한 의복을 입은 이들은 낙양에서 위명이 쟁쟁한 상가 사람들이었다.
제갈신기는 환한 표정으로 선두의 사내에게 말했다.
“여러 상단주님들이 직접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선에 복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직접 와서 인사를 올려야 했는데, 다른 곳에 있다 보니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하하, 사람을 통해서 보내주신 예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덕분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덕담이 오간 뒤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제갈신기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상단주들의 안색이 그리 밝지 않았다.
제갈신기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뭔지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일이 또 있었나 보군.’
아니나 다를까, 상단주 중 하나가 제갈신기에게 말했다.
“총군사께 송구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말씀하신 물품들을 제시간에 마련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갈신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요? 혹, 습격이라도 받은 것입니까?”
제갈신기는 아니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의 예상대로였다.
“예, 저희 금황상단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상단 모두가 크고 작은 사고로 물품을 잃거나 억류되어 있습니다.”
예의 사내가 대표로 말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잘 운송되던 물건들이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강탈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일부는 산채와 수적에게 억류되어서 협상을 벌이는 중이었다.
제갈신기는 목이 타는지 차로 입술을 적신 후 말했다.
“공교로운 일이군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막힌 일이었다. 마치 누군가 개입한 것처럼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금황상단주는 대표가 되어서 문제점을 나열했다.
“송구합니다. 덕분에 생필품 가격과 철광석 가격도 뛰고 있습니다. 약초와 의복을 가진 자들도 내놓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겠구려.”
“예, 무림맹에서 제시한 금액으로는 시간 안에 절반도 못 구할 것입니다.”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 무너지면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오를 게 뻔한데 싸게 내놓을 자는 없었다. 웃돈을 준다면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겠지만 무림맹 예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갈신기는 난감했다.
상단에게 피해를 감수하고 계약을 이행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계약기간은 본래 두 달이었다. 그 기간을 앞당긴 쪽은 무림맹이었기 때문에 상단에게 책임은 없었다.
금황상단주는 조심스럽게 제갈신기에게 결정된 사항을 말했다.
“저희가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손해가 너무 큽니다. 송구스럽지만 기간 내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국 우려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무림맹에게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결국 상단주들과의 대화는 무거운 분위기로 끝났다. 최선을 다해서 구하겠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제갈신기는 굳어진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고작 무림대회에 사용될 일반적인 물품들이 필요할 뿐이었다.
무림맹에 아무 일만 없었다면 어떻게든 부족분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습격으로 모아두었던 물품들이 대부분 불에 타고 말았다.
손님을 맞이하면서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잔치는 엉망이 될 것이고, 무림맹의 체면도 크게 손상될 것이다.
‘허어, 이 난국을 어찌 헤쳐 나간단 말인가.’
답답해진 제갈신기가 마당으로 나가 서성이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불에 타버린 물품 때문에 고민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