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저기, 혈황…….”
무심코 고개를 돌려서 혈황에게 말을 걸려던 청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의 곁에는 혈황이 없었다.
혈황은 삼천을 따라갔다. 삼천과 함께 있으면 청운과 멀리 떨어져도 괜찮았다. 그 사실을 안 이후 청운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삼천의 주위를 떠도는 시간이 더 많았다.
청운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혈황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면 자신에게도 손해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까지 혈황과 붙어 다닐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자신의 사생활도 지켜야 할 것이 있고.
그럼에도 막상 혈황이 안 보이자 옆구리가 허전했다.
잔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긴 한데…….
청운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건 그렇고, 이놈들이 무슨 꿍꿍이지? 단순히 무림대회를 방해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자신이 뭔가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적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병법서도 떠올려 봤다.
문득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병법 한 가지가 떠올랐다.
‘설마…… 성동격서?’
* * *
“불이야!”
대낮에 무림맹 내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검은 연기가 커다란 기둥이 되어 무림맹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무림맹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무림맹 사람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잡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군데군데 있는 연못에서 물을 퍼와 불을 끄려 했지만, 불이 대여섯 곳에서 한꺼번에 난 터라 불길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적이 나타났다!”
“동편에 적이다!”
내공이 실린 외침에 불길을 잡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불을 끄던 무사들 중 일부는 소리가 들린 동편으로 몰려갔다.
“북쪽에도 적이 나타났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정 소감은 동창의 무사들을 한데 모았다.
“백가장이 있는 쪽으로 이동한다.”
“니에.”
정 소감 일행은 청운이 사용하는 별채를 지나서 백가장이 숙소로 사용하는 별채에 빠르게 도착했다.
백청청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백청청에게 이상이 생기면 이청운이 곤란해질 수 있었다.
얄미워도 백청청이 위험해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런데 마침 백청청을 비롯한 백가장 무사들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백 소저.”
“아! 정 소감님. 어떻게 된 일이죠?”
“소인도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옵니다. 단지, 노룡회가 기습을 한 것으로 여겨지옵니다.”
“그들이 왜요?”
“속셈까지는 아직 모르옵니다. 아마도 무림대회를 방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런데 백 소저께옵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옵니까?”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조금이라도 도와야지요.”
“위험한 일이옵니다. 그러지 마시고 저희와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정 소감은 백청청을 말리려고 했다. 그러나 백청청은 뜻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에요. 누군가 구원의 손길이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우린 이쪽으로 가볼 생각이에요.”
백청청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백가장 무인들과 싸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정 소감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움직여야겠군.”
“대인, 명을 내려주십시오.”
“나를 따라와라.”
“니에!”
정 소감은 소란스러운 곳이 아닌 아직 습격을 받지 않은 동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동창 무인 중 한 명이 정 소감에게 물었다.
“대인, 이 방향으로 가면 무림대회를 개최하려고 준비하는 곳이 있을 뿐이옵니다.”
“알고 있네.”
“니에, 알겠사옵니다.”
착 가라앉은 정 소감의 목소리에 질문을 던진 동창 무인이 급히 입을 닫았다.
괜히 나섰다가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다. 상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만수무강의 지름길이다.
건물 몇 채를 돌아가자 넓은 마당 중앙에 세워진 비무대가 보였다.
비무대를 오가는 자들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무림맹 무사들처럼 보였지만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그들의 손과 옷에 그을림이 묻어 있었다.
불을 끄느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불을 끄러 다니는 자들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적을 상대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다급하게 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정 소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건!’
나무 그늘 아래 무언가 삐죽 튀어나온 물체가 보였다. 사람의 발이 분명했다.
“멈춰라!”
정 소감은 일갈을 내지르고, 지체 없이 그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주하던 자들 중 둘이 몸을 돌리더니 대뜸 검을 뽑았다.
무림맹에서 동창의 복식을 한 정 소감 일행을 공격할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보자마자 공격한다는 것은 무림맹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적.
어쩌면 방화를 저지른 자들일 가능성이 컸다.
정 소감은 쌍장을 내밀며 장력을 쏟아냈다.
슈슈슉! 퍼버벙!
정 소감의 장력에 휩쓸린 사내 둘이 뒤로 날아갔다.
다른 자들도 무기를 꺼내 들고 정 소감과 동창 무사들을 막아섰다.
“막아!”
“놈들을 제거해라!”
정 소감이 동창 무사들에게 외쳤다.
“놈들을 잡아라!”
동창 무사들과 방화범으로 보이는 자들이 격돌했다. 그 중심에 정 소감이 있었다.
하늘을 날듯이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정 소감의 무위는 대단했다. 그의 손에서 빛이 번쩍이면 어김없이 상대 무인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하지만 상대의 실력 역시 동창 무인 못지않게 강했다. 그들을 압도하는 건 오직 정 소감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적을 상대하던 정 소감이 흠칫 놀라며 뒤로 훌쩍 재주를 넘었다.
스팟!
무언가 날카로운 빛줄기가 정 소감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어서 부상은 면했지만 정 소감의 두 눈에 긴장감이 어렸다.
정 소감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외쳤다.
“물러서서 합격진을 펼쳐라!”
동창 무인들이 강한 일격을 상대에게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 짧은 순간에 동창 무인 셋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둘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웬 놈들인데 감히 무림맹에 불을 지른 것이냐?”
정 소감은 방금 자신을 기습 공격한 자를 보며 외쳤다.
평범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기도 역시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평범하게 보였다.
그러나 정 소감은 알고 있었다. 그가 고수라는 것을.
평범해 보이는 중년 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작 환관 나부랭이가 내 검을 피하다니, 제법이군.”
사내는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정 소감을 훑어보았다. 정 소감은 사내의 시선이 닫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 소감은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쏴아아아.
정 소감의 몸 주위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그 모습을 본 중년 사내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호, 어린 것이 제법 고강한 무공을 익히고 있군.”
칭찬 아닌 칭찬을 뱉은 사내는 검을 집어넣고, 쌍장을 교차하더니 바닥을 차며 정 소감을 향해 나아갔다.
정 소감도 물러서지 않고 양팔을 휘두르며 맞섰다.
펑!
둘의 손이 교차했다.
굉음과 함께 둘은 살짝 떨어졌다가 다시 붙어서 서로를 공격했다.
싸움은 팽팽하게 진행되었지만, 정 소감이 살짝 우위에 있었다.
퍼버벙!
격돌할수록 정 소감의 얼굴에 자신감이 붙었다. 상대가 대단한 실력을 지녔지만 자신 역시 그에 못지않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살짝 밀리고 있는데도 중년 사내는 당황해 하는 얼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황은커녕 오히려 입가에 비릿한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회리릭!
사내가 빙글 몸을 회전하더니 벼락처럼 쌍장을 죽 뻗었다. 정 소감은 아래에서 위를 향해 쳐 오는 공격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대로 상대의 쌍장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펑!
후우욱!
둘이 격돌하는 순간 사내의 소매에서 뿌연 가루가 뿜어졌다. 정 소감은 화들짝 놀라며 가루를 피하려고 했다.
“으윽.”
한발 늦고 말았다. 이미 놈이 뿌린 정체불명의 가루가 얼굴을 덮친 후였다.
정 소감은 고개를 흔들었다. 눈앞이 흐릿한 것이 하얀 가루가 눈에 들어간 것 같았다.
따끔함과 비릿함이 전해졌다.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났다.
‘독?’
정 소감은 뒤로 물러서며 내공을 운용해서 독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사내는 기다리지 않고 정 소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정 소감은 가까이 접근하는 무언가를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스팟.
무언가 손끝에 걸렸지만, 시야가 흐릿해서 정확하게 쳐 내지 못했다.
사내는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구부리고 정 소감의 가슴에 드러난 허점을 파고들었다.
흠칫 놀란 정 소감이 이를 악물며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사내의 손가락이 정 소감의 가슴을 움켜쥐며 훑고 지나갔다.
콱! 찌이익!
정 소감의 가슴 쪽 옷이 길게 찢어지며 하얀 속살이 살짝 드러났다.
앙증맞은 돌기가 수줍게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중년 사내는 살짝 놀라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거 환관이 아니라 계집인가?”
손에 잡힌 옷자락을 털어낸 사내가 정 소감의 가슴을 다시 보았다.
여인의 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칭칭 동여맨 헝겊이 찢기며 수줍게 드러난 속살이 보였다.
정 소감은 이를 악물며 한 손으로 찢어진 옷자락을 여몄지만, 워낙 찢겨진 부위가 넓어서 전부를 가리기는 힘들었다.
슈슉!
중년 사내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정 소감을 다시 공격했다.
정 소감은 감각으로 사내의 공격을 피했다. 빠르게 보법을 밟으며 비무대 위로 몸을 날렸다.
중년 사내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정 소감을 쫓았다. 정 소감은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느라 한 손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두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경험이 많은 인물이라면 내공을 이용해서 강제로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이물질을 제거하는 게 보통의 방법이다. 하지만 정 소감은 그런 경험이 없어서 낭패를 당하고 있었다.
턱! 찌익!
옷자락 찢기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꺄악!”
정 소감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보다 못한 동창 무사들이 정 소감을 구하기 위해서 비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일부는 중년 사내의 앞을 막고, 몇몇은 중년 사내를 직접 공격해 들어갔다.
“뭐야? 네까짓 것들이 나를 상대하겠다고?”
중년 사내는 비릿하게 웃으며 동창 무사들에게 장력을 뿌렸다.
퍼버버벙!
동창 무사들이 장력에 적중당하며 비무대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온전히 서 있는 동창 무사는 이제 열 명 남짓이었다. 서른이 넘게 와서 반도 남지 않았다. 쓰러진 자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지만 살아 있어도 중상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대인, 걸치시옵소서.”
동창 무사 중 한 명이 정 소감에게 겉옷을 벗어서 건네주었다. 정 소감은 빠르게 웃옷을 걸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눈앞이 흐릿했다.
‘방심하면 안 되었거늘.’
경험 부족으로 인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생사가 오가는 도산검림에서 경험 부족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정 소감은 다리를 넓게 벌리고 양팔을 좌우로 쭉 뻗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중년 사내는 귀여운 강아지를 보듯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정 소감에게 말했다.
“흐흐흐, 어디 가진 재주를 부려 보아라.”
정 소감은 숨겨놓은 비기를 꺼내기로 했다. 아직 화후가 부족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쭉 뻗은 그의 두 손이 서서히 오므라들더니 중년 사내처럼 갈고리 모양이 되었다.
구음조.
청운이 전해준 구음신경상의 무공이었다.
파밧!
정 소감은 구음조를 펼치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슈슈슉!
팡팡팡!
중년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다급하게 정 소감의 손을 쳐 내는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눈이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이 정도로 강하다니.”
정식으로 겨뤘다면 자신이 패했을 것이다. 암습을 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재롱은 거기까지다.”
중년 사내는 전력을 다해서 정 소감의 측면 빈틈을 공격했다.
정 소감이 흠칫하며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중년 사내의 손이 더 빨랐다.
퍼벅!
“아악!”
비명을 지른 정 소감이 땅바닥을 굴렀다.
중년 사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 소감에게 달려들며 쌍장을 내리쳤다.
그때 가공할 기운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