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화
사내는 반쯤 풀린 눈으로 청운을 올려다보았다.
“흐흐흐, 대단하군. 우리 열을 상대로 이기다니.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믿지?”
“믿을지 모르겠지만,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자들 중 나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제법 된다.”
“훗, 그들의 눈과 귀는 천하에 흩어져 있는데, 그들을 속이는 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사내는 비웃음 띤 표정으로 청운을 바라보았다.
청운은 당연히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신분과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무공을 익힌다면 누구도 너를 알아보지 못할 거다. 혹은, 한밑천 가지고 무림을 떠나는 방법도 있지.”
“…….”
“인피면구가 아니라 무공으로 얼굴을 완전히 바꾸면 된다. 무공이야 황궁무고에 있는 무공으로 새롭게 배우면 되지.”
꿀꺽.
사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새로운 신분과 무공이라니. 어쩌면 자신에게 또 다른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내가 깊이 고뇌할 때였다.
청운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핑!
무언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쏘아졌다.
저 멀리 건물 지붕 위에서 단말마 비명과 함께 시커먼 물체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쿵!
사내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내 자신들의 습격을 감시하던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안색을 굳혔다.
청운은 그런 사내에게 확인시켜 주듯이 말했다.
“저런 자가 숨어서 지켜보는 건 기본이지. 너희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 이제 감시자도 사라졌으니 다시 이야기해 볼까?”
사내는 청운의 무위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자를 습격하라고 시키다니. 우리는 버리는 패였나?’
절정고수 열 명이 기습을 했다. 몇 수 겨루지도 못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처음부터 자신들은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내는 자신들이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 협조하지.”
청운은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최대한 사내를 편안하게 했다.
목숨을 걸었던 자가 순순히 답하는 일이 쉽지는 않은 일이다. 충성심이 부족하거나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 같았다.
청운은 사내를 보며 궁금한 것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누구지? 왜 나를 습격한 거냐?”
“노룡회. 우리들은 노룡회에서 나왔네.”
“노룡회라니? 신비세력을 말하는 것인가?”
“신비세력? 그건 모르겠지만 우리는 노룡회 소속이네.”
청운은 신비세력이 노룡회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룡회가 전체인지 아니면 신비세력에 소속된 자들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가시적인 성과였다.
청운은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사내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렇다고 사내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노룡회에 발을 들인 것은 반년 전 우연한 기회였네. 영약으로 내공을 올려준다는 말에 노룡회에 가입을 했지. 그리고 반년 만에 절정에 이르렀네. 그런데 이번에 자네를 습격해서 처리한다면 다시 혈룡단을 하사하겠다고 하더군.”
“혈룡단?”
“그들이 내려준 단약이네. 이번 일을 나서기 전에 한 알을 더 하사받았지. 그 덕분에 이류였던 내가 단번에 절정고수가 되었다네. 믿어지는가?”
말을 하는 사내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청운은 사내가 말하는 혈룡단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놈들이 혈기룡으로 만든 단약이 혈룡단인가 보군.’
어렵지 않게 혈룡단의 정체를 알아차린 청운은 사내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를 습격한 이유가 무엇이냐?”
“윗분들이 자네를 극도로 싫어하더군. 수련을 하는데 명령을 받았네. 그대를 습격하라고, 그러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사내는 청운의 질문에 대답을 하며 정작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그보다 정말로 나를 지켜줄 수 있나?”
“물론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겠다. 얼굴도 싹 바꿔주고 말이야.”
말과 동시에 청운의 얼굴에서 으드득 소리가 들리며 사내의 얼굴로 변했다.
그 모습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 정말이었군.”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나에게 협조하는 자들이 제법 되지. 너 역시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않겠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굳이 목숨을 버릴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비밀을 발설했으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았는가.
‘좋다. 노룡회에서 이미 우리를 버렸지 않은가. 그렇다면 점수를 따야겠지.’
사내는 무언가 결심을 하고는 청운을 보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청운을 보자 청운은 사내가 할 말이 있음을 눈치챘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 말고 습격을 준비하던 자가 있었네.”
“무슨 소리지? 나를 또 습격한다는 말이냐?”
“아니, 언뜻 듣기로는 자네 여자를 습격한다고 하던데.”
“내 여자? 난 여자가 없…….”
청운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무언가 떠올렸다.
‘설마…… 백 소저?’
청운의 표정을 읽은 사내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백씨였던 것 같은데.”
쿵!
청운은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등 뒤로 싸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사내는 청운의 얼굴이 몰라보게 변한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끝맺을 수는 없었다.
“백마사에서…….”
파밧!
팡!
청운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바닥을 차며 허공으로 뛰어오른 청운은 허공을 차며 백마사 방향으로 경공을 펼쳤다.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청운의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졌다.
사내는 순식간에 사라진 청운의 뒷모습을 보며 놀라워했다. 곁에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정 소감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사라져 가는 청운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 소감은 청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고개를 돌려 자신이 제압한 사내에게 말했다.
“약속은 지키도록 하지. 이들을 따라서 몸을 숨기게.”
“고, 고맙소.”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을 몇 수만에 제압한 정 소감이다. 사납던 무공과 달리 사근사근한 모습이었지만 사내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서늘함을 받았다.
그리고 정 소감은 청운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 *
백마사의 제운탑에 도착한 백청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소답게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그녀는 한쪽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청운이 자신을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는 소리에 이미 심장은 쿵쾅거린 지 오래였다.
곁에 있던 사내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백청청에게 물었다.
“진무사님과 어떤 사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좋아하는 사이에요.”
발그레 얼굴을 붉히는 백청청을 보며 사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잘되었습니다.”
사내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사내의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백청청은 그런 사내의 말에 얼굴을 붉힐 뿐 싸늘한 눈매를 보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일단의 사내들이 탐사로 모여드는 게 보였다. 워낙에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내들이 백청청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 아닌가.
호위로 따라나선 두 사내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한데?’
‘좋지 않다.’
서둘러 백청청을 보호하듯이 섰다.
호위무사가 백청청의 앞으로 나서자, 백청청은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백청청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포위하듯이 둥글게 둘러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백청청은 자신을 안내한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짓이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사내는 순박한 얼굴로 백청청을 보았다. 그러나 백청청은 사내의 눈빛이 뱀의 눈처럼 독기가 서려 있다는 것을 느끼고 급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백청청의 선택은 옳았다. 순간 사내가 백청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팡!
이상함에 준비하고 있던 백청청은 어렵지 않게 사내의 공격을 막아냈다.
두 호위가 몸을 돌려 백청청을 공격한 사내를 협공했다.
“이놈!”
그러나 사내의 실력도 녹록치 않았다. 두 호위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 그는 뒤로 훌쩍 물러섰다.
“흣, 제법이구나.”
모여들던 사내들은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 무기를 뽑아 들었다.
탑사를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거치적거리는 향화객을 닥치는 대로 베어내며 백청청에게 몰려들었다.
백청청의 두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감히! 네까짓 것들이!”
곱던 눈망울이 싸늘하게 변했다. 백청청의 기세가 확 바뀌었다.
우우웅!
맑은 울음이 단전에서 울리더니 온몸에 내공이 휘몰아쳤다.
백청청의 몸 주위가 요동쳤다. 심상치 않은 백청청의 기세에도 사내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백청청은 다리를 벌리며 마보를 취하고는 양팔로 원을 그렸다.
백가장의 진산무학인 월광파천무였다.
둥근 원을 그리며 생겨난 손 그림자가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자들을 향해서 쏟아졌다.
퍼버버벅.
손 그림자가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백청청은 멈추지 않고 보법을 밟아 나갔다. 손 그림자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가까이 접근하는 자들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떠더더덩!
백청청의 공격에 십여 명의 사내가 바닥을 뒹굴었다.
공격하던 자들이 백청청의 기세에 주춤 멈추며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호위무사 둘은 백청청의 좌우에 서서 품(品)자 형태를 이루며 무극음양진을 펼쳤다.
싸움이 잠시 멈추었다.
뒤로 물러섰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백청청을 노려보았다.
“장중보옥이라서 곱게 자란 줄 알았는데, 제대로 배웠구나.”
“흥!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건드렸다는 말이냐?”
백청청의 말에 사내의 한쪽 얼굴이 실룩였다.
‘역시 백가장이란 말인가?’
백청청은 생각지도 못한 고수였다. 정보에 의하면 철없는 아가씨라고 알려졌는데, 알고 보니 감당하기 힘든 실력이었다.
이대로라면 언제 싸움이 결판날지 모른다.
더군다나 소란을 듣고 누군가 달려오면 성가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 누군가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마음을 굳힌 사내는 빠르게 전음을 보냈다.
-다쳐도 상관없다. 사정 봐주지 말고 신호하면 일제히 공격한다.
사내의 전음이 전해지자 포위한 자들이 자세를 잡았다.
사내는 한 발 나서며 백청청의 방심을 유도했다.
“천하의 백가장인데 그럴 리가 있나?”
“닥쳐라!”
“아아, 화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우리도 아가씨를 건들 마음은 없었어. 그저 진무사 놈을 잡기 위한 미끼로 쓰려던 것뿐이야.”
하지만 사내의 말은 얌전해지려는 백청청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뭐, 뭐라고? 네놈들이 감히 이 공자님께 위해를 가하겠다고?”
우우우웅!
파바바밧!
백청청의 몸에서 거센 기운이 뿜어졌다. 그녀의 옷자락이 거센 바람이라도 만났는지 펄럭였다.
주위에 있던 두 호위가 깜짝 놀라며 주춤 물러섰다.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제발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큰일이라도 났는지 두 호위가 애원을 했다. 그러나 화가 치민 백청청을 막을 수 없었다.
“막지 마! 다 죽여버릴 거야!”
쿠웅!
백청청이 오른발을 들어서 강하게 바닥을 밟고,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팡!
공기가 터지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헉! 천강지존공!”
“그거 함부로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두 호위가 뒤로 훌쩍 물러섰다.
무림지존이었던 백운룡이 백야에 전수한 사대무공 중 하나가 백청청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양팔을 벌린 백청청의 손에 맑은 백색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녀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빙글 선회했다.
천수관음처럼 그녀의 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백청청을 사로잡으려던 사내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저건 무슨……!”
그렇다고 그냥 구경할 수는 없었다. 사내가 악을 쓰며 명령을 내렸다.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