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화
“어서 오게. 밖이 소란스러운데, 별일은 없나?”
“니에, 동창을 건들 만큼 간이 큰 자는 많지 않사옵니다.”
청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처음 그를 만났던 객잔이 떠올랐다. 흑도의 인물들이 겁 없이 정 소감을 희롱했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다행히 자신이 곁에 있어서 잘 처리되었지만, 자신이 없었다면 정 소감은 큰 곤욕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볼 때 정 소감은 보호자 없이 떨어진 어린 환관이었을 테니.
청운은 정 소감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중원 전역에서 수많은 무림인이 몰려오고 있네. 이처럼 많은 이들이 모이면 분란이 생기기 마련이지. 동창 무사들에게 혼자 다니지 말고 여럿이 함께 다니라 이르게.”
“니에, 그리 처리하겠사옵니다.”
청운은 정 소감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더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정 소감이 물었다.
“대인, 출타하시렵니까?”
“안에만 있기 갑갑하군. 분위기도 살피며 근처를 둘러보고 명승지도 돌아볼 생각인데 함께 가겠나?”
“정말이시옵니까?”
“정 소감만 좋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지.”
“바로 준비하겠사옵니당!”
정 소감은 읍을 하며 바로 밖으로 나갔다.
청운은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공무에 지쳤을 테니 몇 시진 바람을 쐬게 해줘야겠군.’
* * *
천년고도인 낙양은 천하의 명도(名都)다.
황하가 북쪽을 도도히 흐르고 낙하(洛河)와 이하(伊河)가 남쪽을 관통한다. 서남쪽에 복우산맥(伏牛山脈)이 뻗어 있고 동쪽으로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수많은 명승고적이 즐비한 낙양인 만큼 청운이 아직 둘러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정 소감 역시 이곳에 와서 공무만 처리했다.
언제 낙양에 다시 올지 모르는 일. 뜻밖의 나들이여서 그런지 들떠있었다.
청운은 정 소감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먼발치에서 금의위 한 개 조가 뒤를 따랐다. 그 뒤를 동창의 무인들이 함께했다.
청운과 정 소감은 낙양으로 가기 전에 무림맹 근처를 먼저 돌았다. 분위기를 살피려는 의도였다.
무림대회 때문인지 오가는 무림인이 많았다.
가는 곳마다 무림맹 외단 경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외단 경비들은 십여 명씩 짝을 이뤄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많은 무림인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분란이 발생한다. 이를 빨리 처리하는 임무가 그들에게 있었다.
청운은 대로를 따라서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평소보다 무림인의 숫자가 배는 늘어난 듯했다.
한참을 돌고 있는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대로와 연결된 시장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청운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소란스러운 곳으로 향했다. 정 소감은 아무 말 없이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 * *
제법 넓은 길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벽처럼 둘러쳐진 사람들 때문에 안쪽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이 자식!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돌아다녀?”
“바짝 엎드려 있어도 부족할 판에 활개를 치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께 드릴 음식을 구하러 시장에 나온 것입니다. 바로 돌아갈 것이니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청운은 들려오는 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응? 이건 문광의 목소리 같은데?’
보름 전에 구해주었던 사령회 소속의 무사인 문광의 목소리였다.
청운은 서둘러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갔다.
한 사내가 무림맹 경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바닥에는 팔뚝만 한 잉어가 길거리에서 펄떡거리고 있었다.
청운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함께 인파를 뚫고 나온 정 소감의 얼굴 역시 차갑게 변했다.
전후 사정은 굳이 살필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광이 어머니께 해드리려고 잉어를 구하러 나왔다가 경비대와 시비가 생긴 듯했다.
그 시비를 누가 걸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경비대의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검을 빼들었다.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문광은 이를 악물고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오?”
“그래도 이놈이……!”
조장이 칼을 쳐든 순간,
“멈추게!”
냉랭한 목소리와 함께 청운이 나섰다.
청운을 본 조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 진무사!”
청운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 걸음에 맞춰서 경비들이 뒤로 우르르 밀려났다.
잔뜩 긴장한 경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신들의 조장을 힐끔거렸다.
청운은 그런 경비들을 둘러보지 않고 문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가?”
뺨이 시뻘겋게 부어 오른 상태였다.
입술이 터져 피가 턱에서 뚝뚝 떨어졌다.
“괜찮습니다, 대인.”
“어찌 된 일인지 말해보게.”
“어머니 기력이 많이 쇠약해지셨습니다. 이쪽 시장에 싱싱한 잉어가 많이 나오는지라……. 구해서 돌아가는 길에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문광은 기력이 쇠잔해지신 어머니께 잉어와 닭이 들어간 용봉탕을 해드릴 생각이었다.
청운의 얼굴에 노기가 짙어졌다. 주위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구경꾼들 역시 안색이 싸늘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아! 어머니를 보양하겠다는데 무림맹 경비라는 것들이 앞을 막아!”
한 사람이 소리치자 사방에서 경비대를 향해서 욕설과 질책이 쏟아졌다.
당황한 경비대 조장은 변명이라도 하려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저자는 사파인이오. 장안에 있는 사령회 소속이란 말이오!”
조장의 외침에 구경꾼들의 시선이 문광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호의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사파?”
“어쩐지 생긴 것이 사파 놈들 같이 생겼더라니.”
“그럼 경비대가 사파 놈을 붙잡은 것 아닌가?”
“저 자식 방금 어머니 어쩌고 한 거 전부 거짓말 아냐?”
호의가 말 한마디에 적의로 바뀌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경비대 조장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폈다.
수많은 무림인과 양민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눈앞의 청운이 두렵기는 했지만, 이들이 함께라면 명분은 자신에게 있었다.
청운은 거세지는 반발에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청운이 앞으로 나서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청운이 사람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무림인은 협의를 중요시한다고 들었습니다.”
협과 의는 정파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의로운 이들을 협의지사(俠義志士)라 하지 않던가.
“저는 협과 의만큼 충과 효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요. 그런데 어찌 여러분께서는 협의만 중요시하고 충효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청운의 말에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검을 등에 멘 한 사내가 청운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우리가 언제 충효를 중요시 안 한다 했소?”
“맞소! 보아하니 저자 때문에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를 뭐로 아시는 거요?”
사방에서 청운에게 언성을 높였다. 청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이자 때문입니다. 이자는 비록 먹고 살기 위해서 사파에 몸을 담긴 했지만, 어머니께서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사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이는 칭송받아 마땅한 진정한 효입니다.”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성을 높이며 청운을 질책하던 자들이 입을 닫았다.
“무림맹 맹도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사도맹이 있는 곳에 살고 계신 어머니가 아프다고 하면, 그 어머니를 위해서 달려가실 수 있으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문광에게 향했다.
분노로 일렁거렸던 눈빛이 미안함으로 변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사도맹에 간다면 그 잔인한 사파 놈들이 자신들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문광이란 자는 그걸 감수하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때 조장이 다시 소리쳤다.
“협의를 위해서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오. 어찌 진무사라는 분께서 그것도 모르시오?”
청운이 조장을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어리석구나. 대의를 위해 가족을 돌보지 못한다는 뜻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외세와 맞설 때만 해당하는 말이다. 왜인지 아는가?”
청운은 질문을 던지며 성큼 한 발 내디뎌서 조장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라가 없으면 내 가족도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충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야! 모든 것이 내 가족을 지키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알겠는가?”
청운은 조장 얼굴 가까이에 붙었던 자신의 머리를 뒤로 물렸다. 그러면서도 악을 썼다.
“저자는 사파요! 사파는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오! 어쩌면, 그래! 저자는 무림대회를 염탐하기 위해서 온 것이 분명하오!”
“허.”
청운은 조장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그런 조장의 말에 주위에 모인 구경꾼들이 동조한다는 것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청운은 생각했다.
‘이것이 정파였느냐? 이런 편협함이 네놈들이 말하던 정의고, 대의며, 협의란 말이냐?’
청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혈황이 청운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그만 되었다. 그동안 회의하면서 보지 않았느냐?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어떠한 논리로도 저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게 소위 남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놈들의 아집이니라. 자기들만 잘난 줄 알지.]
-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저놈들은 신경 쓰지 말고, 문광이라는 아이를 어떻게 할지 결정해라.]
혈황의 말에 청운의 시선이 문광에게 향했다. 문광의 시선은 팔딱거리다가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잉어에게 가 있었다.
‘부럽구나.’
청운의 오른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일한 유품이 오늘따라 따스한 기운을 흘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게 효도이거늘.’
청운의 눈에 효도를 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있는 문광과, 사파라는 이유로 억압하는 무림맹 무사들이 보였다.
청운의 붉은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문광!”
“예? 예, 대인!”
청운이 부르자 문광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청운에게 모였다. 청운은 문광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혹, 나라를 위해서 일해 볼 생각은 없는가?”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너를 금의위로 받아들일 생각인데, 어떠하냐?”
“대인, 소인 같은 자가 어찌 그런 큰일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문광은 청운의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사령회에서도 말단이나 다름없는 일개 하급 조장에 지나지 않는 자신이다.
하물며 금의위라니.
청운은 문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너의 재주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할 마음이 있느냐?”
“그렇긴 하온데……. 소인이 금의위가 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네 앞에 내가 있고, 네 뒤에 황제 폐하께서 계시지.”
문광은 두 눈이 커졌다. 청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사파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소, 소인이 어찌하면 금의위가 될 수 있는지요?”
“간단하다. 내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청운의 말에 문광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청운은 품속에서 황금 패를 꺼내서 앞으로 내밀고 외쳤다.
“금의위는 명을 받들라!”
“존명!”
“충!”
어느새 청운의 뒤를 따르던 금의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덩치가 큰 금의위 육조 조장 하만이 부하들과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에 주위에 있던 자들이 흠칫 놀랐다.
청운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외쳤다.
“오호평천대장군이자 금의위 북진무사인 나 이청운이 황제 폐하를 대신해서 여기 문광을 금의위 위사로 임명한다!”
“충!”
“명을 받드옵니다!”
문광을 대신해서 금의위들이 소리쳤다. 문광 역시 그들을 따라서 어설프게나마 대답했다.
청운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하만에게 말했다.
“하 백호는 문광에게 신분패와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게. 그리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니 노련한 부하들을 붙여서 가르쳐 주게.”
“예, 대인!”
청운은 고개를 돌려서 문광을 보며 말했다.
“이제 금의위가 되었으니 첫 번째 명을 내리지.”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하, 알려주지 않아도 잘하는군. 흠, 첫 번째 명령은 휴가를 줄 것이니 어머니를 잘 봉양하라는 것이네.”
문광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한 줄기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이 입을 쩍 벌리고 놀라워했다.
청운이 하는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특히, 경비대 조장은 이를 묵과하지 않겠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진무사!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사파인을 감싸겠다는 것이오? 정말 무림맹과 맞서겠다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