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137화
“일단 앉으시지요.”
청운은 제갈신기가 의자에 앉자 차를 따라주었다.
또르륵.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신기는 청운이 차를 다 따른 후 찻주전자를 내려놓자, 말없이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한 모금 차를 마신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서주의 철관음은 언제 마셔도 향이 좋군.”
“가시는 길에 한 편 싸드리겠습니다.”
최고의 차로 알려진 철관음을 나눠주겠다고 했지만 제갈신기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왕 주는 김에 한 가지 더 주면 안 되겠나?”
“무엇인지요?”
“자네가 잡아온 포로들 말이네.”
제갈신기는 청운이 삼문협 협곡에서 포로로 잡은 자들의 신변을 요청했다. 역용을 하고 있었는데도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역시 천뇌 님이시군.’
청운은 물끄러미 제갈신기를 보았다.
제갈신기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청운을 바라보았다. 청운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저희도 알아볼 것이 있어서 바로는 어렵습니다.”
“아쉽군. 무림맹이 자네에게 신뢰를 너무 잃었어.”
제갈신기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모든 일을 직접 지휘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조언을 해주는 정도였다.
말은 총군사라 하지만, 실권이 없는 이름뿐인 지위였기에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없었다.
덕분에 황실과 무림맹이 힘을 합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제갈신기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일선에 다시 복귀할 수도 있네.”
“군사 일을 다시 하신다고요?”
“맹주님께서 부르시더니 도와달라고 하더군. 이번 일에 한해서.”
무림맹주 양조생은 일이 계속 틀어지자 제갈신기를 찾았다. 그의 제자들이 책사로서 일을 잘하고 있지만, 꼬장꼬장한 무림맹 인사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앞으로도 쉽게 꺾일 고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은퇴한 제갈신기를 다시 불렀다.
청운은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한 제갈신기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복귀하시려는 것인지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겠나? 그분들과 맞서기에는 제자들에게 가혹한 일이지.”
요즘도 제갈신기의 제자들은 회의 때마다 장로를 비롯한 무림맹 인사들에게 열심히 깨지고 있었다. 배분이 높은 그들의 막무가내식 명분은 천하무적이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좋은 계책을 책사들이 내놓아도 의결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그 의결권이 장로를 비롯한 무림맹 인사들에게 있었고, 과반수가 반대편이었다.
청운은 제갈신기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복귀하시는데 선물이 필요하신 거로군.’
명분 싸움이었다.
제갈신기가 다시 복귀하려면 맹주도 눈치를 봐야 한다. 억지로 제갈신기를 앉히면 반발이 거셀 것이다. 그들에게도 제갈신기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괴물이었다.
제갈신기는 청운의 눈빛을 살피다가 드디어 무언가 결정을 내린 것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도와줄 것인가?”
“그리하지요. 전부는 안 되고 딱 절반을 내놓겠습니다.”
“하하하, 그 정도면 되었네. 복귀 선물로 넘치지.”
제갈신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청운이 자신의 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하고 왔지만, 요즘 무림맹과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청운은 웅천에게 일러 사로잡은 자 넷 중 둘을 무림맹에 양보하라 일렀다.
이후 청운과 제갈신기는 서로 얻게 되는 정보를 공유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날 저녁 무림맹 회의는 다른 어느 때보다 결렬했다. 제갈신기의 복귀문제 때문이었다.
장로들은 제갈신기가 돌아온다고 하자 기겁을 하고 반대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극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은 마치 철천지원수를 눈앞에 둔 것만 같았다.
결국,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유야무야(有耶無耶) 끝이 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황이 버럭 화를 내며 청운에게 말했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그래서 결론은 언제 나는데? 그까짓 문제로 시간을 끌어!]
정파인들의 고리타분한 회의에 화가 치밀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만일 혈사천교에서 이런 식으로 회의를 하는 자가 있었다면 일장에 쳐 죽였을 것이다.
“한 사흘은 걸리지 않을까요?”
[사흘? 놈들이 하는 짓을 봐서는 한 달이 흘러도 어림없을 것 같은데?]
청운은 살며시 웃음 지었다. 혈황의 말대로 합의점은 좀처럼 찾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 이야기만 하면 무조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대했다. 더군다나 제갈신기에게 다시 실권이 주어진다고 하자 입에 거품을 물고 날뛰었다.
그 자리에 함께한 제갈신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 평온한 표정으로 담담히 회의를 지켜봤다. 아무런 결과 없이 회의가 끝났어도 그 미소와 여유는 변하지 않았다.
단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반대편 장로들과 무림맹 인사들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청운은 조금 전 일을 떠올리며 혈황에게 말했다.
“어쩌면 내일 당장 가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천뇌 님이 다시 복귀하겠다는데 그들이 끝까지 반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오늘 보셨죠? 천뇌 님이 화나신 얼굴요. 후환이 두렵지 않을까요?”
[아! 그렇지, 그래서 미친놈하고 머리 좋은 놈은 건들면 안 돼.]
혈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서 나갔다. 마치 복잡한 문제를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청운의 예상보다 빠르게 다음 날 제갈신기의 복귀가 결정되었다.
그렇다고 제갈신기가 움직인 건 아니다. 그저 늦은 밤까지 숙소의 불을 밝히고 있었을 뿐이다.
그 불빛을 찾아서 반대하던 자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그리고 언제 반대했냐는 듯이 만장일치로 제갈신기의 복귀가 가결되었다.
제갈신기는 일선에 복귀하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미리 준비하기라도 했는지 일사천리로 지시를 내렸다.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각자가 맡은 부분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소원했던 황실과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신비세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실과 함께 적의 야욕을 분쇄하겠습니다.”
제갈신기의 발표에 그동안 극렬하게 반대하던 반대파가 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문제는 그로 인해서 황실에 양보할 부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황실을 배제하고 대부분의 이권을 챙겼는데 황실에 나눠주려고 하니 아까워했다.
제갈신기의 손을 모두가 꽉 잡은 것은 아니다. 손을 잡기는 했어도 은근슬쩍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황실에 너무 많이 양보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모든 걸 퍼주고 양보하겠다고요? 제 귀가 의심스럽군요.”
“이대로라면 무림은 황실에 귀속될 수도 있습니다.”
“무림맹은 약하지 않아요. 지금처럼 황실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신중하게 시간을 갖고 생각해야 합니다.”
전면에 나서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유독 세 사람이 뜻을 굽히지 않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종남파의 일청자.
무당파의 명운도장.
아미파의 혜연사태가 그들이다.
이들은 구대문파에서 파견된 장로들이다. 이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작지 않았다.
대세가 기울었는데도 반대하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오랜 시간 정파무림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았다면 첩자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여기에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함께했다.
“옥선진인께서 한쪽 팔을 잃었습니다. 복수하는 데 황실의 힘을 빌려야 합니까?”
“함께한 무사들의 복수를 황실에 맡기겠다니요? 정녕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지는 꼴을 두고 보실 것입니까?”
회의는 여전히 뜻을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
그러나 제갈신기와 청운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표결을 마쳤습니다. 표결에 의해서 앞으로는 신비세력에 의한 문제는 무림맹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황실과 연대해서 처리하겠습니다.”
제갈신기의 선포에 반대하던 자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잠시 고성이 오갔지만 한번 정한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제갈신기는 청운과 다시 자리했다.
“진무사, 앞으로 잘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림맹 독단으로 처리했다가 두 번이나 큰 피해를 입었다. 황실과 청운이 나서지 않았다면 복수는 요원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제갈신기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보다 자네와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무림대회를 당겨서 개최했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림대회는 석 달 뒤에 열기로 했었다. 만일 대회를 앞당긴다면 혼선이 올 수도 있었다.
청운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대답을 했다.
“좋은 생각이시긴 한데, 시기를 앞당기면 참석하려는 분들이 제 날짜에 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중원 전역에 다시 방을 붙이고 소문을 낼 생각이네.”
청운은 제갈신기가 서두르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천뇌 님, 혹시 각 파에서 무사들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까?”
제갈신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잘 보았네. 무사들의 파견을 요청했더니 대부분 난색을 표하더군.”
두 번에 걸쳐서 수백 명이 죽었다. 부족한 숫자를 메우지 않으면 전력에 차질을 빚게 된다.
정파에서 다시 제자들을 보내줘야 전력을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런데 각 세력이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었다.
제갈신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두려운 게지. 신비세력의 힘을 보았으니.”
옥선진인이 팔을 잃었다. 차기 검왕으로 불리던 무당파의 고수가.
그보다 못한 제자들이 나서봐야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청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많은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대의명분만 내세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답답하네. 평화가 너무 지속되다 보니 협의(俠義)를 찾기가 쉽지 않군. 다들 자기 잇속 챙기기 바쁘니.”
제갈신기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생각 같아서는 강제로 무사들을 동원하고 싶었다.
신비세력이 준동하고 모습을 보였다면 당장 시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어정쩡한 평화 시기에는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청운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황실의 힘으로 부족한 전력을 메우는 것은 안 되겠지요?”
“당연히 안 되네. 일부에서 그런 의견이 있었지만, 그들은 무림맹이 주도하기를 원하고 있네.”
“그럼 무림대회를 빨리 개최해야겠군요.”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 금의위나 동창에서 참가할 사람은 없나?”
제갈신기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청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무림대회에 관리가 참가해도 되는 것입니까?”
“안 될 게 뭐가 있나? 황실에서 개최하는 대회에도 무림인들이 참가하는데. 개인적인 참가라면 문제될 것 없네.”
“그렇긴 하군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청운은 제갈신기가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잘 부탁하겠네. 그리고 내일 회의에서 발표할 것이니 그리 알게.
“알겠습니다.”
제갈신기가 돌아가자 홀로 남은 청운이 혈황에게 물었다.
-혈황 님, 정파인들이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하네요.
[아직 뜨거운 맛을 덜 봐서 그래. 그놈들은 예전에도 욕심이 많았다. 그래도 한번 불붙기 시작하면 가장 골치 아픈 놈들이지.]
-그나마 다행이네요. 지금이야 크게 상관없지만 신비세력이 준동할 때도 이 상태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청운은 찻잔을 들어서 입에 가져갔다. 차 맛만큼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런 청운의 기분을 아는지 혈황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달을 보았다.
* * *
다음 날 회의에서 제갈신기는 무림대회를 앞당긴다는 공포를 했다.
무림맹 인사들이 깜짝 놀랐지만 반대할 수 없었다.
“싫으시면 제자들을 보내실 것입니까?”
제갈신기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의 여유로운 표정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날은 유명했다. 자칫 반대했다가는 그의 숨겨진 칼날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림대회로 무림맹이 바쁘게 돌아갔다.
소식이 대륙에 전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객잔을 예약하려는 자들이 넘쳐났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시작될 때, 청운은 정 소감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