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화
구화보전은 전설처럼 전해지는 비급이다.
남성을 잃고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삶을 살아가야 하는 환관들의 천 년 눈물의 결정체다.
필연처럼 황궁무고에서 발견되었고, 정 소감에게 전해진 비급은 성장이 멈춰버린 정 소감을 다시 성장시켰다.
청운과 정 소감은 서로 손을 잡고 좋아했다.
청운은 정 소감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렸을 때는 음식을 가리지 말고 잘 먹어야 해. 내 말대로 키도 크고 헌헌한 미장부가 되지 않았느냐?”
“맞사옵니다. 음식을 골고루 먹다 보니 이처럼 성장했사옵니다. 모두 대인 덕이옵니다.”
청운의 말에 정 소감은 맞장구를 쳤다. 곁에서 지켜보던 혈황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쯧. 그런데 내가 구화보전 효능을 안 알려줬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나기는 하는데 안 알려준 것도 같았다. 그러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겠지.
어찌 되었든 큰 상관은 없었다. 이미 정 소감이 구화보전을 잘 익히고 있었고, 느껴지는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 소감을 동창에서 작정하고 키웠군.’
일 년이라는 시간에 도달할 수 없는 힘이 정 소감에게서 느껴졌다. 무언가 기연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엿보였다.
‘정 소감도 제법 무제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제법이란 말이야.’
혈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언가 신경을 자극하는 게 있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눈에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정 소감을 따라서 들어온 동창 무인들 사이에 그들과 복장이 다른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은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섰다. 그녀는 청운과 정 소감이 손을 마주 잡고 웃는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여인은 강서백가의 금지옥엽인 백청청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쯧쯧,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혈황은 혀을 차며 청운에게 말했다.
[이놈아! 저쪽도 신경 좀 써라.]
청운은 정 소감과 회포를 풀고 있던 중 혈황이 던진 한마디에 고개를 돌렸다.
백청청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헉!’
청운은 화들짝 놀랐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청운은 곧장 백청청에게 다가갔다.
“소, 소저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로……?”
청운이 알은체를 하자 백청청이 청운의 가슴으로 뛰어들며 서럽게 울었다.
“으아아앙!”
“아, 아니 소저, 어찌 이러는 것이오. 일단 눈물을 거두시고.”
품에 안겨 오들오들 떠는 백청청 때문에 청운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살포시 감싸주고 어깨를 토닥였다.
“소저, 진정하시구려.”
청운은 백청청을 달래기 위해서 진땀을 흘렸다. 백청청은 울음을 그쳤지만, 여전히 청운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켜보는 이들이 많은 데도 개의치 않았다. 좋아하는 남자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어느새 백청청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본 정 소감의 눈에서 무언가 불이 번쩍였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정 소감은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부둥켜안고 있는 둘에게 다가갔다.
“대인, 보는 눈이 많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백 소저도 그만 대인 품에서 떨어지시지요.”
정 소감의 말에 청운은 얼굴을 붉히며 백청청을 밀어냈다. 백청청은 청운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청운이 금나수를 응용해서 백청청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청운은 서운해하는 백청청에게서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소저,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침 차를 끓이고 있었는데 잘되었습니다. 정 소감도 같이 가세.”
청운이 몸을 돌리자, 정 소감과 백청청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감히 대인께 꼬리를 흔들다니.’
‘흥, 네까짓 것한테 내가 질 것 같아?’
둘의 시선에서 불꽃이 피었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청운의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어서들 오시오. 차가 식으니.”
“네, 대인.”
정 소감은 고개를 돌려서 청운의 말을 받았다. 청운을 따라서 움직이려는데 곁에서 들려오는 백청청의 소리에 몸이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네, 상공.”
백청청이 빠르게 청운의 뒤로 따라붙었다. 정 소감은 그런 백청청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사, 상공?’
정 소감의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동창 무사들이 그 모습에 숨을 죽였다.
정 소감은 함께 온 동창 무인에게 말했다.
“다들 돌아가서 쉬고 있거라.”
“예, 대인.”
무림맹에서는 동창의 사람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별채 옆에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동창 무인들이 물러서는 것을 본 정 소감은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청운과 백청청이 들어간 전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 소감마저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남은 건 혈황이었다.
혈황은 물끄러미 전각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순진한 녀석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지는군.]
혈황도 서둘러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 좋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
* * *
한편, 화창한 어느 날 전서구 한 마리가 강서성 백가장에 날아들었다.
전서구에 매달린 전서 때문에 강서백가가 발칵 뒤집혔다.
“뭐라고? 지금 뭐라 했는가?”
강서백가의 주인이자 백청청의 아버지인 백철군이 소식을 전해온 무인을 노려보았다.
소식을 전하러 온 중년 사내는 고개를 조아리며 작은 쪽지를 건넸다.
“아가씨께서 서찰을 남기시고 황궁을 빠져나가셨다 합니다.”
백철군은 받아든 전서를 신경질적으로 펼치며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청청, 호위를 따돌리고 황궁에서 사라짐. 동창을 따라서 낙양에 간 것으로 보임.]
와락.
백철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서를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찌 된 것이냐?”
“가주, 아가씨께서 이청운이 있는 낙양 무림맹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또 그놈이야? 저 싫다고 도망친 놈이 뭐가 좋다고 매달리는 것이야!”
우르르릉.
백철군의 몸에서 강력한 기세가 뿜어졌다.
보고하던 사내는 이를 예측이라도 했는지 내공을 끌어올려서 기세에 대항하며 말했다.
“가주, 진정하십시오. 동창과 함께 움직였고, 호위대가 뒤를 따라서 낙양으로 향했다 하니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에잉…….”
백철군은 기세를 누그러트렸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에게 백청청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금지옥엽이었다.
가문의 어른들도 백청청을 무척 아끼고 예뻐했다. 특히 백청청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가주,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이오?”
선풍도골의 멋들어진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노인이었다.
그는 백가장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백야대주(白夜大主) 사영빈(司永彬).
전설처럼 회자되는 백야의 주인이 바로 그다.
오래전 선조를 따라서 백가장에 몸을 의탁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조를 따라서 무림의 안녕을 지켰다.
하지만 전설처럼 회자될 뿐, 그들의 모습이 무림에서 사라진 지 어느덧 백 년이 넘게 흘렀다.
그 바람에 강호에서는 무림 최강의 집단이었던 그들이 정말 사라진 줄 알지만, 실제로는 다른 모습으로 백가장에 존재했다.
백철군은 노인을 향해서 인사하며 말했다.
“대주, 어서 오십시오.”
“인사는 되었소. 그보다 가주, 청청이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별문제는 아닙니다. 황궁에 있어야 할 아이가 무림맹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꿈틀.
사영빈의 얼굴이 실룩였다.
“아니, 그 아이가 왜 무림맹에 갔다는 말씀이시오?”
사영빈의 말에 백철군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한단 말인가?’
백철군은 백만대군이 몰려와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을 강자였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딸의 가출로 인해서 진땀을 흘려야 했다.
* * *
청운을 둘러싼 상황에 큰 변화가 생겼다.
동창과 백가장 때문이었다.
청운이 있는 별채의 양쪽에 동창과 백가장이 각각 자리를 잡았다.
백청청이 오고 그날 밤, 다섯 명의 무사가 무림맹을 찾아왔다. 그들의 정체를 들은 무림맹은 청운이 기거하는 별채 옆을 숙소를 제공했다.
무림맹은 백가장의 출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강서백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거 기인처럼 강서성을 벗어나지 않던 백가장이다.
강호 유람을 나온 것인지, 아니면 따로 무림맹에 볼일이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청운의 일상에서 가장 먼저 변한 건 삼천과 다니던 청운 곁에 정 소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여인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정 소감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림맹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던 청운이었는데 정 소감까지 더해지자 그녀들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문제는 백청청이었다.
당연히 백청청도 청운을 따라서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백가장 무인들이 전음으로 협박(?)했다.
세인들의 눈에 띄게 행동하면 백가장으로 모시고 갈 수밖에 없다고.
백청청은 입술을 몇 번이나 삐죽였지만 백가장 사람들은 눈빛 한 점 변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그래서 백청청은 거처에 있을 때라도 청운의 수발을 들려고 했는데…….
“대인의 수발을 드는 건 환관들이 할 일입니다. 명가의 금지옥엽이 하실 일은 아닙니다.”
청운 곁으로 가기만 하면 정 소감이 귀신처럼 나타나서 방해를 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막아서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결국 백청청은 방법을 달리해서 밤에 청운의 숙소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 소감에 귀신처럼 나타나서 앞을 막아섰다.
“백 소저, 야심한 밤에 어쩐 일이신가용?”
“상공께 볼일이 있어요.”
“상공이라니용? 말씀 가려서 하십시오. 다 큰 처녀가 야밤에 외간 남자의 방을 찾다니용. 명가의 규수가 할 일은 아닙니다. 내일 다시 오십시오.”
“그러지 말고 길을 열어주면 안 돼요? 상공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저희는 황제 폐하의 지엄하신 황명으로 대인의 안위와 수발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누구든 제 허락 없이는 이곳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완강한 정 소감 때문에 백청청은 발을 동동 굴렀다. 생각지도 못한 방해자였다.
사실 그녀는 이청운과 정 소감 사이의 이상한 소문을 듣고 동창을 따라서 무작정 무림맹으로 달려왔다. 이곳에 와서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했었다.
청운이 정 소감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맞지만 소문처럼 부적절한 관계는 아니었다.
문제는 눈앞의 정 소감이었다. 철벽처럼 청운을 보호하는 건 이해하는데 조금 지나친 감이 있었다.
백청청은 화가 났다. 이름뿐인 백가장의 위세로는 황제의 명령을 받은 정 소감을 넘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힘으로 눌러?’
어림없는 일이었다.
정 소감이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무공이라면 자신 있는데 무언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도와줄 힘이 너무도 부족했다. 정 소감은 동창 고수 수십을 거느리고 있지만, 자신은 고작해야 다섯 명의 호위가 전부였다.
그 사람들도 소 닭 보듯 하고 있지만.
한쪽 턱을 치켜든 정 소감이 청청은 너무 얄미웠지만,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흥, 어디 두고 보자.”
입술을 깨물며 돌아서는 백청청을 보며 정 소감도 콧방귀를 꼈다.
‘흥, 제까짓 것이 어디서 감히 대인을 넘봐!’
혈황은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혼자 낄낄거렸다.
두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점점 더 재미있게 흐르는군.’
* * *
무림맹은 붙잡은 금검장 무인들에게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신비세력의 거점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무림맹 무사들이 몰려갔을 때는 신비세력의 무인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자들은 신비세력과 관련 없는 자들뿐.
그렇다고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습격한 신비세력의 거점 중 두어 곳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덕분에 꺾였던 사기가 다시 올라갔다.
그런데 그날 점심때쯤 무림맹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삼문협 인근에 신비세력의 거점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삼문협은 협곡과 구릉지대가 많아서 지세가 험했다. 신비세력이 비밀 거점으로 삼기에는 제격인 곳이었다.
청운도 회의에 참석했는데,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회의가 끝났다.
처음에는 그렇게 그날의 모든 회의가 끝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
“대인, 아무래도 무림맹이 단독으로 움직일 것 같습니다.”
청운은 정 소감에게 뜻밖의 소식을 듣고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말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번 삼문협 문제를 무림맹에서 단독으로 처리할 것 같습니다.”
“뭐?”
청운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