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청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요청한 적도 없는데 동창이 자진해서 나섰단 말이지? 황궁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금의위도 간자가 섞여 있을지 몰라서 믿을 수 있는 자만 함께할 생각이었다.
하물며 동창이라니.
웅천은 품속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청운에게 건넸다.
“동창에서 전서구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정원 태감께서 개인적으로 전서를 띄우셨습니다. 여기 이것이옵니다.”
청운은 정원 태감이 보냈다는 전서를 먼저 펼쳐보았다.
<지켜볼 것이야.>
청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얼 지켜보겠다는 것인지 언뜻 이해가 안 되었다.
‘태감께서 왜 이런 전서를 따로 보낸 거지?’
그나마 첫 번째 전서에는 정상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이들을 추려서 보내니 믿고 쓰게.>
전서를 다 읽은 청운은 삼매진화를 일으켜서 쪽지를 태웠다.
그런 후에야 웅천을 향해 말했다.
“고생했네. 자네와 일조는 나와 같이 이곳을 사용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대인.”
웅천이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청운은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청운은 홀로 무림맹을 나섰다.
* * *
며칠이 더 흘렀다. 여전히 무림맹에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정처 없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청운을 찾아왔다.
오죽하면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난데없는 상황에 청운만 난감해졌다.
만날 사람은 많은데 자신은 혼자였다.
그렇다고 찾아온 이들을 문전박대할 수 없어서 최대한 그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청운은 곧 후회했다.
“우리 가문에서 운용하는 목장에는 군마로 쓰기에 더없이 좋은 명마들이 많다네.”
“진무사, 장성 밖 승덕(承德)이라는 곳에 주둔한 부대가 있네. 혹, 연줄을 대줄 수는 없겠는가?”
사람들은 갖가지 선물을 싸들고 왔다.
온갖 청탁도 난무했다. 들어주려고 마음먹는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는 일이지만, 청운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청운은 단칼에 내치지 않고 에둘러 말해서 그들을 쫓아냈다.
“소문 못 들으셨군요. 관리들이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다.”
“아 참, 이번에 산서성 도지휘사사를 제가 박살 냈는데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덕분에 군부에서까지 저를 향해 이를 간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청운의 대답에, 찾아온 이들은 입을 쩍 벌리며 돌아갔고, 그 뒤로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소문이 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청탁하려던 자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청운을 찾는 이들은 많았다. 덕분에 청운은 밤낮으로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머리가 지끈거릴 때쯤 일남 일녀가 청운을 찾아왔다.
“공자님!”
“이 공자, 잘 있었는가?”
오룡오봉 중 청성파의 강호풍과 제갈세가의 제갈해미였다.
강호풍은 여전히 백색 비단 옷이 어울리는 헌헌장부였고, 제갈해미는 구김 없이 밝고 귀여운 얼굴이 그대로였다.
“두 분,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실까?’ 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운은 둘을 반갑게 맞았다.
무림출도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인이었다.
제갈해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청운에게 말했다.
“요즘 이 공자님 소문이 자자해요.”
“어떤 소문인지요?”
“멋있다고요.”
제갈해미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청운을 보았다. 청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제갈 소저 덕분에 제가 웃는군요.”
안 그래도 아침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일이 뜻대로 안 되자 두통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제갈해미의 농 때문인지,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청운은 반가운 지인들을 밖에 새워둘 수 없어서 전각 안으로 데려갔다.
시비가 차를 내오자, 셋은 과거 진천표국에서 있었던 일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청운은 무척 기쁜 표정으로 강호풍을 보며 말했다.
“그럼 칠십이파검(七十二破劍) 중에서 후 십이식을 더 배우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이제 비전 십이식만 배우면 칠십이파검을 모두 배우게 된다네.”
강호풍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청운에게 대답했다.
칠십이파검(七十二破劍)은 총 상중하 셋으로 나뉘는데, 그중 후반 이십사식은 크게 후 십이식과 비전 십이식으로 나뉜다.
그런데 후 십이식부터는 일대 제자라고 해서 모두가 배울 수 있는 검법은 아니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갈해미가 불쑥 둘의 대화에 기어들었다.
“그런데 이 공자님. 혹시, 무림대회에 참석하시나요?”
“그건 왜 물으시는 것입니까?”
“헤헤, 공자님께서 참석하신다면 저는 빠지려고요.”
제갈해미가 혀를 살짝 빼며 얼굴을 귀엽게 찡그렸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요?”
“물론입니다.”
청운의 확답에 제갈해미가 양팔을 위로 올리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참석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무림대회에 후기지수 외에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참가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화경에 들어선 청운이 참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미 대문파의 장로급을 넘어선 청운이 아니던가.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눴다. 그때 누군가가 별채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청운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는 둘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천뇌 제갈 대협께서 오시는 것 같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이가 찾아왔다면 물리겠지만, 제갈신기라면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한다.
청운은 둘을 배웅하며 밖으로 나갔다. 제갈신기가 그의 제자인 월평과 함께 정원을 지나오고 있었다.
강호풍과 제갈해미는 따로 시간을 내기로 하고 돌아갔다.
청운은 제갈신기와 월평을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 * *
청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가 구설수에 올랐다.
아침에 무림맹 산책을 하다가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위소에 들리거나, 일대를 구경하며 지냈다.
그는 유람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낙양을 돌아다녔다.
일정한 행선지를 정해놓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 군데만큼은 꼭 들렸다.
금의위 낙양 위소와 낙양 성내에 있는 객잔. 그리고 마지막 한 곳은 용문석굴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낙양의 명소를 유람이라도 온 여행객처럼 돌아다녔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청운의 경공이면 금세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런 청운의 행보가 정파인이 볼 때는 한가롭게 보였나 보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문과 다른데?”
“너무 한가롭지 않은가? 우리는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고 있는데.”
“그러게, 큰 사건이라도 몰고 올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청운이 무림맹에 입성하면 무언가 큰 사건이 생겨서 즉각 출동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과가 없었다.
그들의 행동을 곁에서 지켜본 청운이 혈황에게 말했다.
-혈황 님, 저들이 볼 때는 제가 삼두육비의 괴물로 보이나 봅니다.
[흠, 틀린 말은 아니지.]
-그, 그럴 리가요?
청운은 가볍게 물은 말에 수긍하는 혈황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혈황은 별 감흥이 없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특히 정파 놈들이 심해.]
여전히 혈황은 정파인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다.
한편, 청운의 이러한 행보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비세력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놈의 행동에 규칙이 있다고?”
“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들르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동선 역시 같습니다.”
이들 중 몇몇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중 보고를 받는 복면인의 머리에는 일곱 칠(七)자가 금색으로 수놓여 있었다.
그는 흑야대의 칠야였다.
그는 청운이 무림맹에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 청운이 나타나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데 청운의 행보가 예상 밖이었다. 무림맹에 입성하면 미쳐서 날뛸 줄 알았다.
그런데 유람이라니?
물론,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뱄을 수도 있지만 어딘지 꺼림칙한 움직임이었다.
“어디를 주로 가느냐?”
“낙양 성내의 위소와 객잔에 들렸다가 마지막으로 용문석굴에 들린 후에 무림맹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용문석굴?”
칠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용문석굴은 낙양성 내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 거리에 있는 부처님을 모시는 석굴이다.
커다란 바위산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굴이 뚫려 있고, 많은 수행자가 수련하며 치성을 드리는 장소다.
“놈은 반 시진가량을 그곳에서 보내다가 해가 넘어갈 때쯤 무림맹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흠……. 모를 일이군.”
청운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단순히 용문석굴을 구경하는 일이라면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런데도 몇 날 며칠 그곳에 들르고 있었다.
보고하던 자가 은밀하게 말했다.
“칠야 님, 혹… 뭔가를 찾는 것 아닐까요? 예를 들면 보물이 숨겨져 있다든가…….”
“보물?”
“예, 그렇지 않고서야 놈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부터 그런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는 했었다.
용문석굴에 개세절학(蓋世絶學)이 숨겨져 있다고.
문제는 이미 수많은 무인이 수도 없이 살핀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절학을 발견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작해야 주인 없는 굴에서 발견된 불경 쪼가리가 전부였다.
칠야는 자신의 수하를 보며 낮게 말했다.
“네놈이 찾아볼 것이냐?”
“예?”
“만일 비급이 안 나오면 목을 내놓는 거로 하고.”
“아, 아닙니다.”
칠야의 서슬 퍼런 말에 부하 복면인은 입을 닫았다.
칠야는 한심한 눈빛으로 부하에게 호통 쳤다.
“놈을 더 철저히 감시하고, 놈을 따라다니는 자들이 누구인지 조사해라.”
“존명!”
복면인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칠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뒤쪽으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칸막이로 사용되는 작은 병풍을 지나치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병풍 뒤에는 보통 사람의 두 배나 되는 덩치의 중년 사내와 요염한 기운을 풍기는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덩치가 남들보다 두 배 큰 광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상관없지 않나?”
칠야는 자리에 앉으며 광존을 보았다. 그의 두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칠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상관없는 일이지요.”
놈에 대한 처리는 이미 결정되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지만 광존의 말대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일이 있었다.
“광존 님, 그런데 놈을 호위하듯이 따라다니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림맹에서 붙인 호위 같은데, 어찌할까요?”
그들을 공격하면 무림맹이 달려올 것이다.
자칫하면 무림맹에 대대적인 조사를 할 빌미만 줄 수 있다.
톡톡톡.
칠야의 말에 광존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쉽게 결정 내릴 사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광존은 쉽게 대답을 했다.
“떨궈야지.”
“좋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칠야의 물음에 광존은 희미하게 웃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여우처럼 음흉한 안광을 내뿜었다.
그걸 보고 요희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둘은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