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화
걸음을 멈춘 청운은 노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인은 청운이 바라보는 눈빛의 의미를 알고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다시 걸음을 옮긴 청운은 거침없이 노인에게 다가가서 포권을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무사 이청운입니다.”
“힘없는 늙은이에 지나지 않네. 이렇게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진무사를 뵙게 되어 영광이네.”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자신을 낮췄다.
그러나 청운은 노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사해에 위명이 쟁쟁하신 무림맹주님이 힘이 없으시다니요. 그 사실이 천하가 알려지면 당장 사파에서 쳐들어올지도 모릅니다.”
“껄껄껄, 노부를 알아볼 줄은 몰랐구먼.”
청운의 인사를 받은 노인은 놀랍게도 무림맹주 양조생이었다.
양조생은 정파의 절대고수인 일황(一皇), 삼제(三帝), 오왕(五王), 칠군(七君) 중 패왕(霸王)으로 오왕에 속한 절대강자다.
비록 오왕에 속했지만, 무공만큼은 삼제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인물.
양조생은 쉰이 넘은 나이에 무림맹주가 되어서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무림맹주로 지냈다.
그런데 당당했던 그의 몸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왜소하게 변해버렸다.
천하의 그 어느 절대자가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있을까.
육십이 넘은 후 빠르게 진행된 그의 노화는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의 양손에서 쏟아지던 신공절학을 기억하는 자들은 그가 다시 예전과 같은 무공을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운은 알고 있었다.
‘결코 내 아래가 아니다.’
청운은 양조생의 내부에 갈무리된 웅혼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빨 빠진 호랑이로 알려진 그의 몸 안에 거대한 기의 호수가 존재했다.
‘무림맹주가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다니.’
그저 겸손함을 내보이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데…….’
청운이 양조생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양조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듣던 대로 헌헌장부(軒軒丈夫)가 따로 없구먼. 아 참! 내게 손녀가 한 명 있는데, 자네 아직 혼인하지 않았지?”
“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라네. 그렇다고 너무 부담 느끼지는 말고, 조만간 시간을 잡을 테니 한번 만나보게나.”
양조생은 청운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 했다.
“맹주님, 저는…….”
뒤늦게 청운이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장로, 외단 문제는 어찌 되었소?”
양조생은 청운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휭하니 고개를 돌려서 다른 노인에게 물었다.
청운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황이 조금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 늙은이 손녀가 얼마나 예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백가장 아이만은 못할 거다.]
-관심 없습니다. 누가 신경이나 쓴답니까?
[그럼 왜 바로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못 하는 건데?]
-제가 여기서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맹주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나름대로 핑계를 댔지만, 혈황은 오히려 혀를 찼다.
[쯧쯧쯧. 이놈아, 바로 거절하지 않고 나중에 거절하면 그게 더 체면을 깎는 거야. 학사라는 놈이 그것도 몰라?]
-어차피 지금은 늦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걱정 마세요. 상황을 봐서 무안하시지 않게끔 말씀드릴 테니까요.
[말해서 안 되면, 또 도망치고?]
백청청의 애정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벌써 두 번이나 도망을 치지 않았던가.
청운은 속을 긁어대는 혈황을 째려보았다.
-이번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입니다. 걱정 마세요.
[오호 그래? 그럼 어디 두고 보자꾸나.]
그때 양조생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청운에게 말했다.
“내 장로들을 소개해주겠네.”
무림맹 인사들과 인사를 나눈 청운은 별실로 안내되었다.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이 함께했다.
무림맹주와 천뇌, 그리고 무림맹 요직에 앉아 있는 간부들이었다.
별실이라고는 해도 작지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인원이 자리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넓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천뇌가 입을 열었다.
“모두 진무사님과 인사는 나눴을 테니 따로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제가 아닌 월평 군사가 이야기할 것입니다.”
청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를 바라보았다.
멋들어진 백색 비단옷이 잘 어울리는 중년의 사내였다.
그런데 강퍅하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거기다 고집스러운 학사의 상마저 엿보였다.
“저는 무림맹에서 정보와 군사를 담당하는 월평이라 합니다.”
무림맹의 책사 중 한 명인 월평은 천뇌의 제자로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우선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내달 보름에 무림대회를 개최합니다. 뛰어난 자들을 선별해서 신비세력에 대항할 전위대를 조직할 계획입니다”
정기적으로 벌였던 무림대회가 아니다. 무림맹주의 명으로 열리는 특별한 대회를 계획했다.
이 대회를 통해서 흩어진 무림을 하나로 뭉치고 새롭게 인원을 선발하기로 했다.
“새로운 조직은 크게 사신단이라 이름 지을 것입니다. 구파일방과 세가연합, 중소문파 연합세력이 각기 한 개 단씩 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단은 무림대회를 통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신비세력이 언제 발호할지 모른다. 그전에 준비한다면 그들이 발호했을 때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월평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다음 청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사도맹과의 관계입니다.”
사파를 대표하는 사도맹은 무림맹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도십이천, 혹은 십이지문으로 불리는 사도맹의 열두 세력이 지닌 힘은 구파일방이나 십대세가에 비해서 약하지 않았다.
“요즘 사도맹과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딱히 큰 다툼은 없지만, 예전보다 횟수가 증가하고 있어서 예의주시하는 중입니다.”
월평의 말처럼 청운도 이곳에 오기 전에 보고받은 내용이었다.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 싸움으로 번질 기미가 보인다는 보고였다.
“예하 문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할지, 아니면 한발 물러서라고 할지 정해야 합니다. 혹, 이 부분에 있어서 진무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월평이 처음으로 청운에게 물었다.
청운은 이미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곧장 대답했다.
“무림맹과 사파의 싸움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신비세력만 좋아질 일이지요.”
“설마… 사파와 손을 잡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처한 상황이 비슷한 만큼 일시적으로라도 공조해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운의 대답에 사위가 싸늘하게 변했다.
몇몇을 빼고 안색이 심하게 굳었다.
“어험! 거 참…… 사파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르는군. 하긴 아직 나이가 어리니…. 커험…….”
수많은 은원이 얽히고설킨 사파와 손을 잡으라니.
너도나도 나서서 한마디씩 했다.
“사파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이번 기회에 그 후안무치한 놈들을 밀어버리게 황실이 앞장서면 어떻겠나?”
“정파의 힘은 약하지 않네. 신비세력? 놈들이 발호한다면 우리 힘만으로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네.”
그래도 상대가 진무사인지라 대놓고 다그치지는 못했다.
청운은 그들의 격렬한 반대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생각할 때, 사도맹을 제외하고 무림맹만의 힘으로는 신비세력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설령 이긴다 해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만일 그리된다면 오히려 사도맹이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무림맹을 무너뜨리려고 할 거다.’
물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서 다가올 혼란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맹이 나서지 않는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될 터.
청운으로선 최악의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무작정 반대만 하다니.
청운은 팔짱을 끼고 차가운 눈으로 무림맹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월평이 나서서 상황을 진정시켰다.
“진무사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만, 사파와 손을 잡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림맹 간부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월평은 청운의 기분도 놓치지 않았다.
“허나……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이 있지요. 악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의 힘이 필요하다면 같은 배에 함께 타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더구나 황제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면… 본 맹도 상황에 맞춰서 양보할 마음이 없는 것 아닙니다.”
말은 청운에게 했지만, 실제로는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무림맹 간부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황제’라는 한마디에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월평은 다른 이들의 반발이 나오기 전에 곧장 화제를 돌렸다.
“진무사, 황제 폐하의 의중을 알고 싶습니다만.”
그제야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무림맹과 힘을 합쳐 역적의 무리를 물리치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림이 황군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 한 황제께서도 무림을 적으로 삼지 않으실 겁니다.”
좌중에 모인 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제가 예전처럼 무림을 압박하려 했다면 집단 반발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먼저 손을 내민 셈 아닌가 말이다.
그때 양조생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만 회의를 마치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천뇌도 즉시 그의 말에 동조했다.
“알겠습니다, 맹주. 저 역시 그게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진무사?”
청운도 어차피 더 이야기해봐야 좋은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저도 좀 쉬고 싶습니다.”
양조생이 묘한 표정으로 청운을 보며 말했다.
“잘 생각했네. 어차피 오늘은 결론도 나오지 않을 이야기 같구먼.”
무림맹의 장로와 간부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은 회의를 더 하자고 해봐야 적만 만들 뿐이었다.
결국 그렇게 영양가 없는 회의가 끝났다.
청운은 실망이 컸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안 되면 되게 만들지 뭐.’
* * *
회의를 마친 청운은 시비의 안내를 받아서 숙소로 사용할 곳에 도착했다.
작은 연못이 딸린 전각은 혼자 쓰기에는 조금 컸지만, 운치가 있어서 청운도 만족했다.
아마도 특별한 손님에게 내주는 곳인 듯했다.
시비가 돌아가고 홀로 남은 청운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혈황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회의하다 짜증나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무림맹의 늙은이들은 그 두더지 같은 놈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다.]
-뜨거운 맛을 보면 알겠지요.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청운은 차갑게 말하고는, 탁자의 찻잔을 잡아서 무심코 벌컥 마셨다.
혈황이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뜨거울 텐데…….]
청운의 얼굴이 벌게졌다.
‘으…… 뜨거…….’
뱉으면 혈황이 배꼽을 잡고 웃을 것만 같아서 꾹 참았다.
그나마 입 안이 다 델 정도는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 * *
다음 날, 점심이 지난 오시 말엽에 기다리던 자들이 무림맹에 도착했다.
“대인!”
“어서들 오게.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네.”
웅천 백호와 그가 이끄는 금의위 일조가 찾아왔다.
다른 금의위가 더 있었지만, 그들은 두 곳에 나뉘어서 머물기로 했다.
한 곳은 무림맹 근처에 안가로 구한 장원이었고, 다른 한 곳은 낙양에 있는 진무사 직속 금의위 위소였다.
“석 천위와 홍 천위는 안가에 있는가?”
“예, 오늘 오전에 도착했습니다.”
“고생했네. 아 참, 내가 부탁한 이는 어디에 있나?”
“그분은 홍 천위님과 함께 안가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따로 전할 말은 없는가?”
“한 가지 있사옵니다. 동창이 합류하겠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동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