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화
거대한 성곽처럼 보이는 무림맹을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무림 정파의 중심인 무림맹이 자리한 지 수백 년이 흘렀고 그에 관련된 자들이 살아가다 보니 그 규모가 상당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림맹과 관련된 사람이거나 그 사람들을 상대로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청운은 서문으로 이어진 대로를 따라서 길을 재촉했다.
오가는 사람들과 건물들을 구경하며 걷던 청운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어머니께 갈…….’
퍽!
제대로 들린 것은 아니지만 청운의 발걸음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허.”
[싸움 났나 보구나.]
혈황과 청운은 동시에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는 투덕거리는 소리와 희미한 신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가던 길을 멈춘 청운은 발길을 돌렸다. 혈황이 못마땅한지 투덜거렸다.
[귀찮지 않으냐?]
-남 일 같지가 않아서요.
[쯧쯧, 네 마음이 그렇다면 그래야겠지.]
청운은 과거 혁련휘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했었다. 그때마다 누군가 나타나서 도와주기를 수도 없이 바랐었다.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그래서 청운의 발길을 붙잡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희미하게 들렸던 한 단어 때문인지도 모르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어머니라고 들은 것 같은데.’
싸움이 났다면 원인이 있을 것이다.
괜한 오지랖일 수 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하자 골목 입구에 누군가가 버티고 서 있었다.
청운이 골목으로 들어가려 하자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청운을 제지했다.
“넌 뭐야?”
저벅, 저벅.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들을 지나쳤다.
간단한 보법만으로도 그들은 청운의 옷자락 하나 잡을 수 없었다.
“뭐야?”
“고수?”
청운의 귀신같은 몸놀림에 당황한 사내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곳은 무림맹이 있는 곳이다. 몸짓 하나만 봐도 고수를 알아볼 수 있다.
청운은 물러서는 자들을 뒤로하고 그들이 지키는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십여 명에게 둘러싸인 채 집단 구타를 당했는지 축 늘어진 사내가 있었다.
안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청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학사의를 입은 비리비리하게 생긴 서생이 보였다.
입구를 지키는 자들이 그냥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들어왔다는 건 지위가 높은 집안의 자제이거나 고수라는 소리였다.
“뉘신데 무림맹의 일에 나서려 하는 거요?”
그들은 무림맹이라는 이름으로 청운을 막으려 했다.
청운은 대답 대신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사내들이 뭔가에 떠밀린 듯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청운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침없이 다가갔다. 사내들은 청운이 고수라는 걸 알고 바짝 긴장해서 두어 걸음 더 물러섰다.
저벅, 저벅.
청운은 산보 나온 사람처럼 쓰러진 사내에게 다가가더니 몸을 숙여서 사내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뼈는 상하지 않았군.’
그렇다 할지라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옷은 넝마가 된 상태였다. 옷을 벗기고 살펴본다면 분명 피멍이 가득할 것 같았다.
청운은 사내의 단전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내공을 흘려 넣었다.
우웅!
맑은 소리와 함께 청명신공의 요상결이 펼쳐졌다. 내가중수법으로 때린 것이 아니어서 내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곧 사내의 검붉게 변한 얼굴이 평온해졌다.
청운은 사내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어깨에 걸쳤다.
물러서 있던 사내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생긴 건 영락없이 학사 나부랭이인데 손짓 한 번에 자신들을 물러서게 만들고, 내공으로 요상법을 펼치는 자다.
절정급 고수라는 뜻.
그런데 사내 중 한 명이 용기를 내서 따지듯이 말했다.
“형장이 뉘신지 모르지만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알고 계시오?”
몸을 돌려서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청운이 고개를 살짝 돌려서 말했다.
“내가 알아야 하나?”
“뭐, 뭐요? 이보시오! 형장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자는 사파의 사람이란 말이오!”
“사파?”
청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정파무림의 중심에 사파인이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자신을 죽여 달라는 말과 같다.
물론 무림맹에 볼일이 있다면 사파인도 올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용무가 있어야 하고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무림맹 본단에 사파라니?’
청운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지 예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문광이 그놈은 장안 사령회(邪靈會) 인물이오.”
“사령회라면, 사도맹 소속의 그 사령회를 말하는 것인가?”
정파의 기둥이 무림맹이라면 사파의 기둥은 사도맹이다. 그 사도맹을 지탱하는 열두 세력 중 한 곳이 사령회다.
예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소. 형장도 알겠지만 지금 무림맹과 사도맹이 곳곳에서 다투고 있소. 이런 마당에 사파 놈이 무림맹 본거지에 나타났으니 간자가 틀림없소. 그래서 우리가 손봐 주고 있었던 것이오.”
“이자 이름이 문광인가?”
“그렇소. 원래 이곳 남쪽 구역에 살던 자인데, 정파에 등을 돌리고 사령회에 입문한 자요.”
청운은 사내에게 몸을 돌려서 물었다.
“그럼 이자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무언인가?”
“그것은 우리도 모르오.”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순간 청운은 서 있는 십여 명 중에 세 명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자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군.’
혼자였다면 청운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어머니’라는 말만 듣지 않았어도 이자의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청운은 몸을 돌리며 사내들에게 말했다.
“알았으니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지.”
“뭐, 뭐요? 이보시오 형장! 정녕 이러실 거요?”
예의 사내가 발끈하며 소리를 질렀다.
“왜? 막아볼 생각인가? 자신 있으면 그러든가.”
차갑게 말한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서 골목을 빠져나갔다.
사내들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정고수의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젠장! 일이 꼬이는군. 너, 너. 저자를 따라가 봐라.”
말을 건넸던 사내가 명령을 내리자 두 사람이 즉시 골목을 나섰다.
골목을 빠져나온 청운은 근처의 객잔으로 들어갔다.
마침 객잔의 뒤편 별채가 비어 있었다.
청운은 별채를 며칠 쓰기로 하고 선금을 줬다.
“기한은 칠 주야로 하겠네.”
“예, 알겠습니다요.”
은자를 받아든 점소이는 힐끔 침상 위를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청운은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니 충격이 컸던 것 같다.
-혈황님,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녀석아, 북망산에 가봐라. 사연 없는 주검이 있나.]
“하하하.”
청운은 소리 내어 웃었다.
낙양의 북쪽에 있는 북망산(北邙山)은 왕후장상만 묻히는 곳이지만 죽음의 대명사로 불리며 지금처럼 비유로 사용되기도 했다.
“으윽.”
침상에 누워 있던 사내가 몸을 뒤척이며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청운의 호방한 웃음소리에 깬 듯했다.
청운이 사내를 보며 말했다.
“정신이 드는가?”
“으으윽, 이곳은?”
사내는 실눈을 뜨며 초점을 맞추고는, 온몸으로 전해지는 고통을 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객잔이네. 자네가 쓰러진 골목에서 내가 데려왔네.”
“……감사합니다.”
사내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고는 청운에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청운은 손사래를 치며 사내를 다시 눕혔다.
그러고는 침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사내에게 물었다.
“이름이 문광이라고 하던데. 무슨 사연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사내, 문광은 청운을 올려다보았다.
‘이 공자님은 누구시란 말인가? 어찌 한낮 사파인 나를 위해서…….’
문광은 청운이 내공을 주입할 때 잠시나마 정신을 차렸었다. 너무 심한 구타로 인해서 몸을 가누지 못한 것뿐이다.
덕분에 사내들과 청운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고, 청운이 몸을 돌려서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이제야 깨어났다.
문광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실은 이곳에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아프시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자네는 사파 사람이라고 하던데?”
“예, 말단이긴 하지만 사령회에 속해 있습니다.”
청운은 문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사파인이 무림맹 본단이 있는 곳에 오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죠. 그런데 어머니 소식 때문에 앞뒤 안 가리고 달려왔습니다.”
“흠, 하긴…….”
청운은 일의 전후 사정을 알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광의 말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놈들이 제가 올 것을 어찌 알고 기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마치 제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거야 자네의 행적을 그들이 먼저 발견했나 보지.”
“예, 소인도 그리 생각하긴 했는데, 그놈들이 저를 때리면서 하는 말은 조금 달랐습니다.”
문광의 퉁퉁 부은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제게……. 크윽, 너 같은 놈은 부모의 죽음도 마주할 필요가 없다며……. 크으윽.”
끝내 사내는 오열을 터트렸다.
청운의 미간이 좁혀지며 두 눈이 차갑게 변했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걸 그들이 먼저 알았단 말이지? 그건 정말 이상하군.’
어쨌든 아프신 어머니를 찾아간다는데 길을 막다니.
그것도 정파인이란 자들이.
청운의 상태를 옆에서 보던 혈황이 한마디 했다.
[너무 흥분하는 것 아니냐? 구해주었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꾸나.]
사소한 일까지 관여하기에는 청운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청운의 생각은 달랐다.
-혈황님, 불의를 보고 외면한다면 제가 어찌 학문을 닦는 학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찌 군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 네놈 학사였지.]
혈황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끔 청운이 학사라는 것을 잊는다. 이 모두가 청운의 냉혹한 손속 때문이다.
적에게는 절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용서를 베풀 때도 있지만 살릴 자와 죽일 자를 분명히 구분한다.
덕분에 수십이건 수백이건 망설이지 않고 살수를 펼친다.
혈황은 감정에 젖어 든 청운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학사는 개뿔, 내가 볼 때 네놈은 학사보다 마존이 더 어울린다. 학사의 탈을 쓴 마존 말이다.]
혈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바라는 진정한 제자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 * *
한편, 청운에게 문광을 빼앗긴 사내 중에서 말을 섞었던 자는 곧장 무림맹 외단으로 달려갔다.
서로 잘 아는 얼굴인지 경비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경비를 그냥 통과한 사내는 무림맹 외단 경비를 담당하는 조진양 단주를 찾아갔다.
조진양(趙振揚)은 쌍도를 귀신처럼 쓰는 절정고수다.
그는 쌍혈도법을 익혔는데, 어찌나 살기가 짙은지 마도의 도법으로 의심받을 정도였다.
조진양은 집무실로 들어서는 사내를 보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을 처리했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여기는 왜 온 것이냐?”
“그게, 지시한 일이 틀어졌습니다.”
“뭐야? 지금 장난하느냐?”
조진양의 두 눈에서 퍼런 안광이 뿜어졌다.
사내는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빠르게 말했다.
“그것이… 뜻하지 않은 방해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순간 조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내는 빠르게 전후 사정을 얘기했다.
“……저희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자였습니다.”
“쯧쯧쯧, 그런 사소한 일 하나 처리를 못 하다니.”
조진양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사내의 안색이 변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와락!
조진양은 사내의 머리를 움켜쥐며 들어 올렸다.
“으윽, 사, 살려주십시오.”
사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버둥거렸다.
조진양은 사내의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으르렁거렸다.
“버러지 같은 새끼가, 그런 일 하나 처리 못 하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제, 제발…….”
“하아.”
와당탕.
조진양이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곳이 만일 아무도 없는 곳이거나 자신의 집무실만 아니었어도 사내의 머리통을 부숴버렸을 것이다.
조진양은, 급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사내 앞에 앉으며 말했다.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했겠지?”
“물론입니다. 이미 애들을 붙였습니다.”
“그래?”
“지금쯤 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을 것입니다.”
사내는 급히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말했다.
조진양이 얼마나 두려운지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바르르 떨었다.
조진양은 잠시 사내를 보더니, 밖에 있는 부관에게 전음으로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알았으니 순찰조와 함께 먼저 가 있거라. 곧 따라갈 것이니.”
“예, 예!”
사내는 도망치듯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조진양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폭사되었다.
“이 새끼! 명줄 질긴 줄은 알았다마는….”
빠드득!
조진양의 입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