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18화
단말마를 내뱉은 사내는 원망의 눈초리로 일호 교관을 바라보았다.
일호 교관은 냉혹한 표정으로 그 사내의 심장에 박힌 손을 빼냈다.
“왜라니? 동료에게 짐이 되면 안 되는 것 모르나?”
사내가 그대로 꼬꾸라지며 옆구리에서 피를 쏟아냈다.
털썩.
순식간에 생긴 일이다 보니 다른 사내가 말리지도 못했다.
깜짝 놀란 표정의 사내에게 일호 교관이 말했다.
“오호, 불만 있나?”
“아, 아닙니다.”
“나도 삼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놈이 언제 추격해 올지 모른다.”
“예, 알고 있습니다.”
오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일호 교관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머뭇거렸다가는 따라잡힐 것이고, 그러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서두르자.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일호 교관은 오호 교관과 함께 경공을 펼쳐서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허공에서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운이었다.
“쯧쯧쯧, 동료애가 없군요.”
[원래 저런 놈들은 제 목숨만 귀하게 여기지. 그런 놈들이니 사람을 실험체로 쓰는 것 아니냐?]
청운은 잠시 죽어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다가 둘이 사라진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 * *
달빛마저 숨을 죽인 늦은 밤.
어둠 속에서 높이가 일 장이나 되는 담장을 넘는 자들이 있었다.
야조처럼 가볍게 관부의 담장을 넘은 그들은 오가장에서 도망쳐 나온 일호 교관과 오호 교관이었다.
둘은 망설임 없이 관부의 내부로 뛰어들었다.
청운은 근처 건물의 지붕 위에서 오롯이 선 채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의 두 눈에 한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두 인영이 보였다.
-석 천위의 말대로 도지휘사사로 숨어드는군요.
[어쩔 것이냐? 물러설 것이냐?]
-아시면서 왜 이러세요?
[미친놈, 군부와 척을 지면 안 된다고 걱정할 때는 언제고.]
-해서는 안 될 때가 있고, 지금처럼 해야만 할 때가 있죠.
[썩을… 말이나 못 하면….]
팟!
청운은 혈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날려서 중앙에 있는 커다란 전각으로 날아갔다.
사방에 화톳불이 켜져 있고, 화톳불 근처에는 경비병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야조처럼 날아가는 청운을 발견하지 못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청운은 삼 층 전각의 열려 있는 창문 옆에 깃털처럼 소리 없이 내려섰다.
안쪽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그 오십호라는 놈이 누구란 말이더냐!”
“송구합니다. 태원 흑도인 용마방 쪽에 있는 놈인데…….”
“당장 병사들을 대기시켜라! 용마방이고 뭐고 싹 쓸어버릴 것이니라!”
“예, 대인!”
건물 안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예의 사내 목소리가 들렸다.
“남은 혈룡단은 어찌 되었느냐?”
“잘 숨겨뒀습니다.”
“그래? 설마 놈에게 빼앗긴 것은 아니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뒀으니 놈은 절대 찾지 못할 겁니다.”
‘혈룡단?’
청운은 그 단어에 눈빛을 반짝였다. 아마도 탕약에 들어간 약재를 말하는 듯했다.
“이번에 예상 외로 실적이 좋아서 큰 상이 내려질 거라는 윗선의 말을 들었거늘, 네놈들이 일을 망쳐?”
“대인, 저희 잘못이 아닙니다. 어쩌면 정파 놈들이 뭔가를 눈치채고…….”
“닥쳐라! 만일 혈룡단마저 빼앗겼다면 네놈의 사지를 잘라서 개 먹이로 던져줬을 것이야!”
대인이라 불린 사내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연신 씩씩거렸다.
“뒈진 놈들은 모두 처리했겠지?”
“예, 대인. 깊이를 알 수 없는 마릉늪에 던져 넣었으니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꼴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서 대기해라! 그놈을 찾아내지 못하면 네 목이 날아갈 것이야!”
“예, 대인.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실내에 있던 사내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남은 건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냈던 자와 호위로 보이는 두 사람 뿐이었다.
청운은 검지와 중지를 굽힌 다음 창문 안쪽을 향해 튕겼다.
푸슉!
두 줄기 지풍이 창문을 뚫고 호위들의 혼혈을 짚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자는 스르르, 옆으로 쓰러지는 호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간, 또다시 날아든 두 줄기 지풍이 그의 아혈과 마혈에 박혔다.
“어어어…….”
어눌한 목소리가 그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지풍으로 방 안의 세 사람을 제압한 청운이 창문을 슬쩍 열고 순식간에 안으로 스며들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자는 유령처럼 나타나는 청운을 보고 기겁했다.
청운 역시 사내를 보고 경악했다.
‘저, 저게 뭐야? ……돼지?’
사람이 어떻게 저리 비대한 몸집일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청운은 그 몸집만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도지휘사 동중경?’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는 산서성 도지휘사사의 대장인 도지휘사 동중경이었다.
‘설마 했거늘…….’
그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
도지휘사가 신비세력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니.
청운이 놀라고 있는 동안 동중경은 비대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든 제압된 혈도를 풀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저 돼지의 내공이 제법 심후한데요.
[그 약을 잔뜩 먹었나 보다. 그래 봐야 돼지 새끼지만.]
혈황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운은 성큼 걸음을 옮겨서 동중경을 앉아 있는 의자에서 끌어냈다.
우당탕탕.
삼백 근 무게의 비대한 몸집이 바닥을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병사 하나가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인, 무슨……?”
병사가 말하다 말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암습이다! 자객이다!”
경비가 소리치며 칼을 빼들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청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동중경을 끌어낸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겁나게 크네.”
의자는 청운 같은 사람이 두 명 앉아도 공간이 남을 만큼 거대했다.
청운은 마치 자신의 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의자의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턱을 괴었다.
칼을 빼든 경비병들은 여유만만한 청운의 행동을 보고는 공격을 하지도 못하고 널브러진 동중경과 청운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몇 사람이 더 안으로 뛰어들었다.
땡땡땡땡!
밖에서는 요란한 타종 소리가 적의 침입을 알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자들이 바닥에 내팽개친 동중경을 호위하듯 에워쌌다.
서너 명은 청운을 향해 칼을 겨누고 혹시 모를 청운의 공격에 대비했다.
당장 공격해야 당연하건만 청운이 너무 태연하니 오히려 공격하지 못했다.
“모두 멈춰라!”
청운의 일갈이 떨어지자, 움직이던 모두가 얼음이라도 된 듯 멈춰 섰다.
은은히 울리는 청운의 목소리에 그들의 심혼을 억압하는 기운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청운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자가 도지휘사 동중경이 맞느냐?”
“그렇다. 이분이 동중경 대인이시다!”
아혈이 제압당한 동중경을 대신해서 한 무장이 대답했다.
그 옆에 있던 자가 청운에게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나?”
대답을 하며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저 일어섰을 뿐인데 거대한 해일 같은 위엄이 무장들을 향해 밀려갔다.
숨 막히는 위엄에 얼굴이 굳은 무장들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청운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산서성 도지휘사사 병사들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라!”
추상같은 명령에 모두들 청운이 내민 황금패를 바라보았다.
황금패에는 황명이라는 글귀가 양각되어 있었고, 테두리에는 다섯 마리 용이 정교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무장 중 하나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놀라서 외쳤다.
“오호평천대장군패다!”
오호평천대장군.
진무사인 청운에게 내려진 또 다른 신분이다.
금의위를 넘어서서 오군도독부의 금군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절대권력자.
쿵!
쿠궁!
“오호평천대장군님을 알현합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들의 외침은 밖에서 들릴 정도로 컸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장수와 병사들이 후다닥 무릎을 꿇고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쳤다.
뒤를 이어서 금의위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길을 비켜라! 우리는 진무사님을 호위하는 금의위다!”
“비켜라!”
“길을 터라! 막는 자는 가차 없이 목을 칠 것이니라!”
웅천이 금의위와 함께 도지휘사사를 치고 들어왔다.
여전히 방 안에 널브러져 있던 동중경은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청운을 바라보았다.
* * *
날이 밝자, 산서성 도지휘사사의 넓은 마당이 무릎을 꿇은 자들로 가득 찼다.
청운은 간밤에 금의위와 병사들을 이용해서 의심되는 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하나하나 조사할 것도 없었다. 동중경이 보던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가장에 가서 비밀리에 수련을 하던 자들의 이름이.
그들만 솎아서 잡아들이면 되었다.
한편으로는 금의위와 병사들을 보내서 무현관과 오가장 사람들도 잡아들였다.
그들 외에도 태원부에서 그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 역시 추포했다.
억울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옥석을 가리기 전까지는 풀어줄 수 없었다.
덕분에 태원부의 네 개 성문이 굳게 닫혀서 오가던 장사치와 백성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중앙의 기단 위에 선 청운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크게 외쳤다.
“도지휘사 동중경은 황명을 받들라!”
도지휘사는 앞으로 한 발 나서서 비대한 몸집을 억지로 굽히며 오체투지 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폐하 만만세!”
“현 시간부로 도지휘사 동중경의 모든 관직을 파직하고 병권을 회수한다!”
놀란 동중경이 고개를 쳐들며 외쳤다.
“진무사! 재판도 하지 않고 판결을 내리다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오!”
“닥쳐라! 이미 그대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진무사! 정녕 군부와 척을 지겠단 말인가?”
그의 외침은 컸지만 내공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이미 청운이 그의 내공을 금제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타고난 신력과 비대한 몸집 때문인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청운은 그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직 판결이 끝나지 않았으니 그만 뒤로 물러서라.”
“뭣이라? 이놈! 감히 내가 누군지…….”
퍽! 퍼버버벅!
동중경은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온몸에 전해지는 충격에 몸을 둥글게 말아야 했다.
청운은 이런 일을 예견하고 웅천과 일단의 금의위를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웅천이 커다란 몽둥이로 동중경의 등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내공이 실리지 않았지만, 절정고수인 웅천의 근력은 대단했다.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졌다.
청운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주변에서 이를 말리는 장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똑같은 매질이었다.
청운은 그들을 다루는 데 사정을 두지 않았다.
신비세력과 연관된 놈들 아닌가. 나라를 뒤엎으려는 놈들.
더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동굴 안에서 죽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시신을 마릉늪이라는 곳에 던져 넣었다고 했던가?
‘네놈들이 사람 목숨을 그리 경시한다면, 나 역시 네놈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추국은 일방적으로 벌어졌다.
청운은 재판도 하지 않고 판결을 연달아 내렸다.
“동중경과 그 휘하 제장들 역시 파직하고 가택연금을 한다!”
“존명!”
청운의 판결에 토를 다는 자는 없었다.
이미 이의를 제기하다가 죽도록 맞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동중경은 여전히 악을 쓰며 청운에게 따졌다.
“어찌 이런 무도한……!”
퍼벅!
“그대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죽도록 때려도 달려드는 그의 기세는 저돌적이었다.
그 모습에 혈황이 한마디 했다.
[그냥 돼지인 줄 알았더니, 멧돼지로구나.]
저 죽을지 모르고 무작정 달려드는 꼴을 보니 혈황의 말대로 멧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운은 한쪽 손을 들어서 두들겨 패고 있는 금의위들을 멈추게 했다.
온몸에 전해지는 통증이 가시자 동중경이 고개를 들며 청운을 쏘아보았다.
청운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를 주마. 어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