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화
그그그긍.
일호 교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쪽 벽이 한쪽으로 밀려났다.
횃불 때문에 붉은 불빛이 일렁거리는 동굴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기관이 설치되어 있으니, 이동 중에 아무거나 만지지 마라. 살고 싶다면.”
말을 마친 일호 교관이 몸을 돌려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뒤쪽에 시립한 교관들이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
“차례대로 따라와라.”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줄을 맞춰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청운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동했다.
한참을 이동했는데도 동굴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깊군요. 갈림길도 여럿이고.
[기관을 잘 봐둬라. 혹시 모르니까.]
청운은 눈을 굴려서 벽을 살펴보았다.
침입자를 막기 위한 여러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청운에게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존재를 알리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한참을 더 이동하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수십 명이 들어섰는데도 좁지 않은 곳이었다.
사방 벽에는 일부터 오십까지 숫자가 써진 작은 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맨 뒤에서 이동하던 청운이 마지막으로 뒤쪽에 서자, 예의 일호 교관이 입을 열었다.
“눈앞에 있는 굴에서 먹고 자고 수련을 하게 된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는 조별로 수련할 것이다. 그 외의 시간은 저 토굴에서 개인적인 수련을 한다. 이상.”
일호 교관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는 끝냈다. 뒤쪽에 있던 다른 교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각자 정해진 곳에 짐을 풀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대기하도록.”
명령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곧장 움직였다.
청운은 수련이라는 말에 의아했지만, 지금은 달리 행동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오십이라 쓰인 굴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옷은 흔한 수련복이었다.
단지 가슴에 오십이라는 숫자가 수놓아져 있는 게 달랐다.
청운은 밖에서 집합하라는 소리가 들리자 굴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조별로 열 명씩 줄지어 서서 교관을 따라서 이동했다.
함께 이동한 곳은 십 장이 조금 넘는 크기의 석실이었다.
이마에 오(五) 자가 쓰인 복면을 한 교관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운 뒤에 말했다.
“아침과 저녁에 이곳에서 수련한다. 지금부터 보름간 내 지시를 잘 따른다면…… 보름 후 너희는 수십 년의 내공을 얻게 될 것이다.”
청운은 그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년을 수련해야 일 년치 내공이 쌓인다. 수십 년의 내공을 쌓으려면 수십 년을 수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내공을 단 보름 만에 얻을 수 있다고?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보니 자들이 사람들을 데려다가 사기를 치는가 보군요.
당연히 혈황도 자신의 말에 동조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조용했다.
-저기… 혈황 님?
청운이 넌지시 부른 후에야 혈황이 말했다.
[어쩌면… 사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예?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말해주마.]
그사이 오호 교관이 주위를 둘러보며 계속 입을 열었다.
“바닥에 보면 숫자가 적혀 있을 것이다. 각자의 숫자에 맞게 자리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각자 숫자에 맞게 자리했다.
어디선가 복면을 한 자들이 나타나서 열 명의 수련생에게 약사발을 하나씩 건넸다.
곁에 있던 혈황 역시 궁금한지 고개를 빼서 탕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청운도 약사발 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걸 왜 주는 걸까?
-일단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심해라, 혹 이상이 느껴지면 혈황신공으로 눌러라.]
왠지 무거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청운은 탕약을 신경 쓰느라 혈황의 목소리를 건성으로 넘겼다.
혈황의 당부를 들으며 청운은 탕약을 들이켰다.
잠깐 사이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묵직함이 전신으로 퍼졌다.
“심법을 운기하라.”
교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심법운용을 시작했다. 모두가 비슷한 심법을 사용하는 듯했다.
청운 역시 그들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하면서 심법을 운용했다.
심법을 운용하며 진기를 일주천시킨 청운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세하게나마 내공이 늘었다.
청운은 심법운용을 멈추고 자신을 살피고 있는 혈황에게 전음을 보냈다.
-혈황님, 혈기가 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혈황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내 생각이 맞은 것 같다.]
-예?
[저놈들이 준 탕약에 내공이 늘어나는 약이 섞여 있다.]
-아니, 그럼 영약이나 마찬가지라는 건데, 그걸 이 많은 사람에게 준단 말입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건 그렇고, 탕약에 들어 있던 기운은 얼마나 흡수했느냐?]
-절반 정도 흡수한 것 같은데요.
혈황은 아쉬움과 걱정, 곤혹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는 ‘그것’이라면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문제점을 해결했다면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의 문제점을 해결했단 말인가?
혈황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청운에게 말했다.
[하나 더 실험을 하고 싶은 게 있다.]
-실험요? 뭡니까?
[나중에 또 나올지 모른다. 그때 나오는 탕약은 마신 뒤에 봉인해 놓아라. 돌아가서 혈황신공을 운기해보자.]
청운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혈황의 말에 따랐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첫 심법 수련이 이어졌다.
저녁이 되자 또 탕약이 주어졌다.
교관이란 자가 준 탕약을 마신 청운은 자신에게 주어진 오십호 굴의 중앙에 정좌하고 앉았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건너편 굴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굴의 입구에 문이 없는 개방형이기에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들 역시 심법 수련을 하려는지 정좌하고 있었다.
청운은 호흡을 가다듬고 혈황에게 전음을 보냈다.
-혈황 님 시작할까요?
[밖에서 누가 볼 수도 있으니 은밀하게 행해라.]
-예.
청운은 곧장 혈황신공의 구결대로 혈기를 움직였다. 일주천을 하는 사이에 배 속에 잡아두고 있던 탕약이 스르르 풀렸다.
탕약에서 퍼진 기운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혈기의 뒤를 쫓아서 혈도를 흐르기 시작했다.
다시 일주천을 마쳤을 때 청운의 두 눈이 스르르 떠졌다.
동시에 청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탕약의 기운을 팔 할은 건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죠?
혈황은 자신의 추측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천교에서 예전에 영단을 연단한 적이 있다. 천교뿐만 아니라 마교도 그랬고, 정파 역시 소림사와 무당파, 화산파 등 어지간한 곳은 공력을 키워줄 단약을 만들곤 했지. 그런데… 이 탕약은 아무래도 혈교에서 만들었던 약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단약은 아니지만.]
-아! 그래요? 그럼 이놈들이 신비세력과 연관된 것은 분명하군요.
이제야 확실하게 꼬리를 잡았다. 태원에 온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혈황은 그보다 청운이 더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말해라.]
청운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물었다.
-혹시 부작용이라도 있습니까?
[그래. 그래서 연단이 중단되었었다.]
혈황은 솔직히 말했다. 이미 복용했으니 속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청운은 그 말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발작해서 죽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공력이 약한 자라면 버티지 못하겠지만,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바로 말하라고 한 거다. 이상이 생기면 내가 해결법을 알려줄 수 있으니까.]
청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운기를 했다.
몸속에 스며든 기운을 억지로 빼낼 수 없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청운은 오십 명 가까운 사람 중 중간 정도의 실력만 내보이며 수련을 계속했다.
어느덧 동굴에 들어온 지 닷새가 지났다. 이제 무림맹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에 주어지는 탕약은 점점 진해졌다.
탕약에 녹아 있는 기운이 훨씬 강해졌다.
‘처음에는 약하게 희석해서 먹이고, 점점 적응시켜 가면서 농도를 진하게 하는 방식이군.’
제법 공을 들이는 것인지 철저하게 계획에 따라 약을 복용시켰다.
다행히 아직까지 수련생 중에 죽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청운은 느낄 수 있었다.
‘탕약의 기운이 너무 강해졌다. 이제 슬슬 버티지 못하는 이가 나오겠군.’
다른 이들이야 어떻든 간에 청운에게는 다시없는 기연이었다. 혈황이 말한 부작용이 없을 때 이야기지만.
그런데 칠일째 되었을 때였다.
탕약을 보고 혈황이 말했다.
[맛있냐?]
-한번 드셔보실래요?
[흠, 그럼 조금만 먹어볼까?]
혈황이 마신다고 해서 실제로 탕약이 줄어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운은 흡수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데 혈황이 청운의 탕약을 마시더니 깜짝 놀라는 게 아닌가.
[어? 이것 봐라.]
-왜요?
[마셔지는데?]
-……예? 무슨 그런 말도 안…… 조금 줄었네요.
탕약을 내려다본 청운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분명히 한 모금 정도가 줄어 있었다.
그동안 혈황과 숱하게 음식을 같이 먹었지만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현상이 벌어졌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음……. 혈각룡을 사용했군.]
맛을 음미하던 혈황이 탕약의 재료를 알아냈다.
청운은 처음 듣는 단어에 물었다.
-혈각룡이 뭐죠? 뿔 달린 용인가요?
[진짜 용은 아니고 화산지대에서 발견되는 석균이다. 만년지령석균(萬年地靈石菌)이라고, 지하에서 나는 영약이 있다. 그와 비슷한 종류인데, 화산지대에서 지기가 아닌 화기를 머금고 자란 녀석이지. 만 년이 지나면 용의 뿔처럼 가지가 나오는데, 이를 혈각룡이라 부른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영약 같은데요?
[영약은 영약이지. 그런데 이건 그냥 먹으면 화기에 몸이 타죽게 된다. 적어도 만년설삼이나 빙정 같은 극음의 물건과 잘 배합해서 조금씩 장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탕약 속에 들어 있는 거지?]
그가 아는 한 혈각룡을 사용하는 약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탕약을 더 의심하고 있었다.
엄청난 양기를 지닌 혈각룡을 영단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는 것과 같았다.
[내 생각대로, 이놈들이 오래전 혈교에서 실패한 영단 제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후 혈황은 바쁘게 움직였다.
다른 사람에게 배정된 탕약에서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름이 지났다.
청운과 혈황, 모두에게 보름이라는 시간은 아깝지 않을 만큼 흡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모든 수련이 끝났다.
청운 외에 다른 수련생들은 각기 이십 년 상당의 내공을 습득했다.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절반 가까운 수련생이 수련 중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혈맥이 터져서 죽은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만약 혈황이 탕약의 기운을 흡수하며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로부터 사흘 후 마침내 수련생들이 동굴을 나왔다.
청운도 나왔다.
그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에 몸을 실었다.
* * *
청운은 돌아오자마자 석덕조를 불렀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덕분에 잘 다녀왔네. 내가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최대한 정보망을 동원한 결과, 대인의 예상대로 비슷한 마차들이 들락거리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그래?”
청운이 수련한 곳 외에도 수련 장소가 더 있다는 말이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곳은 두 곳입니다.”
“어디인가?”
“한 곳은 이곳 태원부 성내에 있고, 다른 한 곳은 오태산(五台山) 자락에 있는 오가장입니다.”
오태산 오가장?
청운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 물었다.
“그곳에도 오가장이 있나?”
“예, 오씨들의 집성촌이 오태산 자락에 있습니다.”
오태산은 태원부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있다.
오씨들의 시초가 오태산에서 시작되었는데, 아무래도 그들의 본가가 있는 곳이 문제인 것 같았다.
“아, 이곳 태원부에도 수상한 곳이 있다고 했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