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114화
손만 뻗으면 닿을 줄 알았는데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뿌연 안개에 가려진 너머의 세계가 눈앞에 있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았다.
미칠 일이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아…….”
청운의 입에서 답답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혈황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흠,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혈황은 한눈에 청운의 상태를 파악했다.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눈앞에 있을 것이다. 자신 역시 수없이 경험하며 좌절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청운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질긴 녀석, 끊기만큼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알려주었다. 나머지 벽은 청운 스스로 넘어야 했다.
혈황은 소리 없이 청운을 응원했다.
‘이놈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그 찢어 죽을 놈들의 후예를 내 손으로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남몰래 외친 그는 머지않은 미래를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청운이가 혈황진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만 있게 되면…….’
청운은 혈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전력을 다해서 세 가지 기운을 합체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혈황신공과 천명신공을 따로 운용하면 청운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내공도 더욱 깊어진 듯했다.
그러나 기운을 합치는 것은 여전히 요원했다.
중간에 끼인 뇌기가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위기의 순간마다 청운을 구해줬던 뇌기였건만, 세 가지 기운을 합치려고만 하면 토라지기 일쑤였다.
그나마 천명신공의 기운에는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혈황신공의 혈기에게는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후우…….”
청운의 입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을 한 지 한 시진이 흘렀다. 다른 때 같으면 온종일 앉아서 명상과 심법 운용을 할 텐데 오늘은 일찍 멈췄다.
그 모습에 혈황이 물었다.
[어찌 일찍 행공을 멈춘 것이냐?]
“천명신공으로 잡다한 기운을 정화하는 것은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혈황진기와 뇌기는 쉽지가 않네요.”
[흠,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구나.]
청운은 자신의 상태를 혈황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혈황진기처럼 천명신공도 뇌기로 인해서 조금 변형되었습니다.”
[역시 모든 열쇠는 뇌기에 있구나. 그럼 몸속에 남은 뇌기는 어느 정도냐?]
“확실하지는 않지만,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혈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혈기 대부분이 청운에게 전이되었다. 천하에 짝을 찾아보기 힘든 내공을 변형시킨 것이 뇌기였다. 극과 극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둘이 합쳐지면서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혈황신공을 대신하려고 나중에 익힌 천명신공 역시 영향을 받은 듯했다.
결국 뇌기 자체에 성질을 변형시키는 힘이 있다는 말과 같았다. 아니면 뇌기가 워낙 강해서 다른 기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 수도 있고.
[혈황진기를 따로 움직일 수는 있는 것이냐?]
“모든 기운을 쓸 수는 없습니다만, 일부 사용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구나.]
왠지 들뜬 것처럼 느껴지는 혈황의 목소리에 청운은 조금 의아했지만 별 의심은 하지 않았다.
혈황진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반가운가 보다 했을 뿐.
* * *
시간이 쏜살처럼 흘렀다.
청운이 계곡에 들어온 지도 어느 덧 석 달이 다 되었다.
뼈를 시리게 하는 찬바람이 불 때 들어왔는데 어느 새 바람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이제 곧 봄이 오려는 듯했다.
청운은 하루에 한 시진 정도씩 시간을 내서 거처도 보강했다.
그러다 보니 통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 하나 더 완성되어서 이제는 비밀 거점으로 사용하는 것 정도는 무리가 없을 듯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가장 중점을 두었던 진기 합체가 원했던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였지만.
[청운아, 더 수련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구나. 이제 그만 하산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놈들이 나왔을지도 모르니까.]
청운도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가 계획했던 시간도 다 되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움츠렸던 신비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컸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습니다. 무림의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큰 세력일수록 한번 움츠리면 바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리고 무림맹이 버티고 있는데 그사이 큰 문제가 있겠느냐?]
황궁 역시 백가장 고수가 머물고 있으니 큰 위험은 없었을 것이다.
“무림맹에서 봄이 오기 전에 무림첩을 돌린다고 했으니 중원 전역에서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겠군요.”
[며칠 내로 출발하면 늦지 않게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다. 가는 길에 들를 곳도 있지 않으냐?]
“그럼 사흘 후에 출발하지요.”
◈ ◈ ◈
태원(太原)은 산서성의 성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인근에 돌궐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군사를 두는 치소가 자리해 있었는데, 그로 인해서 오래전부터 전쟁의 불길에 자주 휩쓸리기도 했다.
바로 그 태원이 잘 보이는 구릉 위.
활동하기 편한 무복을 입은 사내가 허리춤에 장검을 차고 서 있었다.
그는 챙이 넓은 방갓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방갓 사이로 청운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련을 마치고 태행산에 나온 청운이 무림맹이 있는 낙양으로 향하던 중 태원부에 들린 것이다.
전에는 동쪽으로 나가서 황도로 갔지만, 이번에는 서쪽으로 나온 터였다.
태원부를 바라보는 청운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오가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군요.”
혁련휘가 숨었던 육가장의 무사들이 헤어지면서 몸을 의탁하겠다고 말했던 곳이 태원 오가장이었다.
그동안 금의위들에게 맡겨두고 감시만 하게 했는데 이제야 온 것이다.
곁에서 함께 태원부를 바라보던 혈황도 한마디 했다.
[오가장은 모르겠고…… 나는 그 무현관이라는 곳이 궁금하군.]
“어차피 그곳도 살펴볼 생각입니다.”
오가장을 감시하라고 보낸 금의위들이 보내온 전서에 오가장과 무현관이 친밀하다고 적혀 있었다.
문제는 그 무현관이었다.
원정을 떠난 대장군 휘하의 사대 장군 중 한 명이 바로 무현관 출신이라는 것이다.
만인장(萬人將)인 그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름 없는 무관 출신이 무과에서 장원을 했다.
특히 마지막 시험인 대련에서 무림 대문파 출신들을 모두 가볍게 무찌르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사람들을 더 놀라게 했다.
그 후 그는 무관들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고, 금의위 사이에서도 위명이 쟁쟁했다.
“삼국시대 여포를 보는 것 같다고 하던데,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장수입니다.”
그를 가리켜서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한나라 말기의 무장인 여포 봉선이었다.
그만큼 출중한 인물이라는 말인데, 아쉽게도 그는 대장군을 따라서 원정군에 합류한 상태였다.
아직 그를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마주하고 싶었다.
“문제는 여포와 비슷한 무력을 지닌 그의 출신성분이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겸사겸사 확인하려는 것 아니냐.]
청운이 이곳 태원에 들른 이유 중 하나였다.
육중경의 부하들이 숨어든 오가장과 출신성분(出身成分)이 의심스러운 장수를 키운 무현관.
뭔가 뒷골을 짜릿하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번 가서 확인해 보죠.”
태원은 산사성의 성도답게 규모가 크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의 내부 역시 다른 성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 만큼 잘 발달되어 있었다.
단지 다른 곳에 비하면 오가는 사람 중 병사들이 많다는 것이 달랐다.
갑옷을 입고 병장기를 두른 그들의 모습은 이곳이 변방을 책임지는 곳임을 깨닫게 했다.
청운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제법 규모가 큰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먼저 간단한 음식을 시킨 그가 점소이에게 물었다.
“이곳 남문 쪽에 무현관(武顯官)이라는 곳이 있다던데, 그곳이 어딘지 아는가?”
“무현관이라면 소인이 잘 알지요. 그곳 출신이 황도에서 장수의 반열에 올랐는데 모르겠습니까?”
본래 무현관은 태원부의 이름 없는 무관 중 하나였다. 그리 유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곳 출신이 황도에서 치른 무과에서 장원을 했다.
그가 기라성 같은 강자들을 이기고 장원을 하자 태원부가 술렁거렸다.
“내가 잘 찾아왔나 보군. 어디로 가야 하나?”
“이쪽 위로 올라가시면… 저기 두 번째 우측 골목 보이시지요? 예, 입구에 포목점이 하나 있습니다. 진씨 포복점인데, 그곳을 끼고 안으로 죽 들어가시면 무현관이 나옵니다.”
“고맙네. 이건 길을 알려준 값이네.”
점소이의 태원 사랑과 함께 위치를 들은 청운은 철전 몇 문을 건넸다. 점소이는 감사하다며 허리가 구부러지게 인사를 하고는 다른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후다닥 발을 놀렸다.
청운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무현관은 그 일이 없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절정고수급의 장수가 나왔다는 건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금의위 보고에 의하면 무현관은 오가장과 긴밀한 관계라고 했다.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일단은 살펴본 후 판단하는 게 좋겠군. 자룡궁 일도 있으니….’
자칫 죄 없는 자들을 잡을 수 있었다. 의심이 간다 해서 그들이 신비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룡궁도 정파라는 허울을 쓰고 사람들을 속였지 않은가.
‘아무래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 같군.’
식사를 마친 청운은 객잔을 나서서 점소이가 알려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씨 포목점을 돌아서 얼마를 가자 커다란 장원이 눈에 들어왔다.
정문에 ‘무현관’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청운은 잠시 무현관을 보고는, 건너편에 있는 이 층으로 된 객잔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문 앞에 있던 어린 점소이가 빠르게 나와서 청운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며칠 묵을 생각인데, 별채가 있느냐?”
방갓을 살짝 들어 올린 청운은 점소이에게 말했다.
“예, 안쪽에 깨끗한 별채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안내해라.”
청운은 입구 계산대에 앉아 있는 사내를 힐끔 보더니 점소이를 따라서 안쪽으로 이동했다.
별채에 등짐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자 한 사내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차를 한쪽에 내려놓더니 군례를 취했다.
“대인, 원행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수고가 많네. 그래, 지시한 일은 잘되고 있는가?”
사내는 청운의 명으로 육중경의 부하들을 감시하기 위해 떠났던 금의위였다.
청운은 이들이 보내오는 전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인원과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이렇게 객잔과 장원까지 구입하고 정보를 모으는 중이었다.
사내가 품속에서 작은 책자를 건네며 말했다.
“그동안 정리한 정보입니다. 특히 석 달 전부터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사내의 말을 들으며 청운은 책자를 살폈다.
그가 태원부에 들어와서 알아본 정보와 비슷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청운은 한 차례 책자를 훑어본 뒤에 덮으며 말했다.
“다른 대원들에게 연락해서 모이라고 하게.”
“예, 대인.”
사내가 나가자, 청운은 다시 책자를 펼쳐서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읽고 난 뒤 혈황에게 말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무현관에서 은밀히 사람을 끌어 모으다니, 아무래도 수상한데요?”
그의 말대로, 태원에 있으면서도 그 주인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무현관이 알게 모르게 고수들을 모으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인근 강호문파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의위처럼 수상하게 여기고 오랫동안 주시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모를 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은밀했다.
[조사해 보면 알겠지.]
“무림맹으로 가기 전에 조사를 마칠 수 있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