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화
청운의 입에서 뿜어진 찻물은 다행히 백철군을 덮치지 않았다.
백철군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닌가?”
“저, 절대! 아닙니다.”
청운은 펄쩍 뛰었다.
손 한번 잡아보지 않은 사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손이라도 잡았으면 임신했다고 했을 판이다.
백철군이 강인한 얼굴을 살짝 들이밀며 눈에 힘을 주었다.
움찔 놀란 청운의 상체가 살짝 뒤로 밀려났다.
“가주, 정말 오해입니다.”
“흠, 그럼 내 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인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청운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백청청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순간, 백철군의 두 눈에서 지옥의 겁화가 치솟는 것 같았다.
“그럼 뭔가? 마음에 든다는 소린가?”
“아니, 그런 게 아니옵고….”
“어허! 이 사람! 이거 그렇게 안 봤는데 못 쓰겠구먼! 내 딸이 어때서?”
백철군이 버럭 호통을 쳤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렬한지 청운은 입도 뻥긋 못 했다.
백철군은 한숨을 푹 쉬며 화를 가라앉혔다.
“후우, 아무튼 둘이 하는 말이 다르니, 삼자대면하는 것으로 하세.”
“예? 아니, 그게 무슨 삼자대면까지 할 일이라고…?”
“오전에 전서구가 도착했네. 출발했다고 하니 같이 만나서 이 문제를 결론짓도록 하세.”
“오, 온다고요?”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온단 말인가?
황궁이 오고 싶다고 막 와도 되는 곳인가?
청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모습에 백철군은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좋은가 보군. 하긴, 그 나이 때는 얼굴만 봐도 좋을 때지.”
“무, 무슨 말씀을…….”
청운이 무어라 반박하려고 할 때 백철군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백철군은 청운의 허둥대는 모습에 눈을 빛내다가 빠르게 말을 돌렸다.
청운은 제대로 반박도 못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말씀하시지요.”
청운이 그러거나 말거나 백철군은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놓았다.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이유가 무엇인가?”
청운은 백철군이 이런 질문을 할 줄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내공 때문이라…….”
백철군은 청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청운의 나이 이제 이십대 초반. 아무리 영약의 도움을 받고 천재일우의 기연을 얻었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지금 실력만 해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자신이 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었을까?
아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백철군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탐이 났다.
‘청청이가 정말 이 녀석을 좋아하는 거라면, 강제로라도…….’
그때 청운이 본론을 꺼냈다.
“가주, 제 생각이 맞는다면, 당금 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백철군은 슬쩍 눈을 돌리고 찻잔을 잡았다.
“제갈 형이 한 것과 같은 이야기라면 그만두게. 무림은 항상 그랬다네. 그래서 무림인 것이지.”
“상황이 심각합니다.”
“생각하기 나름이네. 마교가 중원을 침략했을 때도, 혈교와 암천세가가 중원을 피로 물들였을 때도 심각했지.”
“가주, 수백 년 동안 음지에서 숨죽이며 힘을 키운 자들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기 위해서 힘을 드러내려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무림을 지배하려는 자들 중 하루아침에 세력을 일군 자들은 없었네. 나름대로 오랜 세월 준비한 자들이었지.”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걱정하지 말게. 무림은 언제나 지배하려는 자들로 넘쳐났지만, 뜻을 이룬 자는 적었네.”
생각대로 백철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딴 나라 이야기하듯 하는 백철군이 얄밉게 보일 만도 하건만 청운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오래전에도 무림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백가장이 도움을 주셨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혈교가 무림과 황실을 전복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무림과 황실의 병력을 이끌고 전면에서 싸운 곳이 바로 백가장이었다.
백철군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청운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 원의 잔당과 혈교가 힘을 합쳐서 무림을 어지럽혔었지.”
“이번에도 비슷합니다.”
“하하하. 억측이 심하군. 증거는 있는가?”
“여러 가지 증거와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대로 손을 쓰지 않고 놔둔다면 분명히 큰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청운은 그동안 자신이 수집한 증거와 정황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백철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하긴 하군. 그렇다고 무림과 황궁이 무너진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백철군은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하지만 선조의 유언을 어길 수 없기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백철군의 마음을 알기에 청운은 조금 더 강하게 나갔다.
“어쩌면 신비세력 중에 가주와 필적하거나 더 강한 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군. 이제는 나를 도발하겠다는 건가?”
백철군은 피식, 실소를 지었다.
자신을 설득하다 안 되니까 도발을 해서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모양이다.
“그럴 리가요. 사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실이라…….”
“얼마 전, 그들의 중간 간부로 보이는 두 사람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 모두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 같더군요. 그때 천운이 없었다면 죽을 뻔했지요.”
백철군은 청운의 무공이 이미 화경에 올라섰음을 알고 있었다. 화경의 경지에서도 상당히 높이 오른 듯 보였다.
그런 청운이 일개 수하에게 당할 뻔했다고?
일개 중간 간부가 화경의 고수라고?
표정이나 말투를 보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그 위의 고위 간부는 얼마나 강할까. 그들의 수뇌는?
백철군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흠,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뭔가?”
“백가장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천하는 피로 물들 것입니다. 수많은 무인들이 죽겠지요. 황실도 어려움에 처할 것이고 백성은 도탄에 빠질 것입니다.”
“설령 그리된다 치세, 그게 백가장 책임이라도 된단 말인가?”
“예, 힘이 있으면서 외면하는 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하네.”
“맞습니다. 그러나 강한 힘을 갖고도 남이 당하는 걸 지켜만 보았다면, 그로 인해 힘이 약한 자들이 죽어간다면, 힘이 강한 자에게도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청운의 말에 백철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약자가 강자의 힘을 빌리려고 할 때 하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사명감을 말하는 것이라면 집어치우게. 우리에게 천하를 도와줄 의리는 없네. 이유는 자네도 아는 것 같으니 설명하지 않겠네.”
백가장이 강서성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된 후 백가장과 관련된 외부의 많은 세력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그들이 백가장에 도와달라고 했어도 도울 수 없었다.
그 당시 정파라는 곳들조차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구경만 했었다.
백가장도 그 후 무림 일이라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청운은 단호한 백철군의 말에 입을 닫았다.
백가장 입장에서는 배신으로 느껴졌을 테니 그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청운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꺼내 들었다.
“무림이 무너지면 백가장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협박이로군.”
청운의 말에 백철군이 피식 웃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술을 적셨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백가장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네.”
“저도 압니다. 백가장에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가주께서는 백가장의 모든 형제와 가솔들 중에 그들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시는지요?”
백철군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철저히 사람을 관리하는 황궁에조차 그들의 간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있을 게 분명하고요.”
“그러니 백가장에도 그들이 심어 놓은 간자가 있을 거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독을 잘 다룹니다. 간자 한 명이 수백의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백가장에는 얼마나 많은 간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지요.”
“…….”
백철군도 그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설마 형제와 가솔 중에 배신자가 있을까?
그러나 청운의 말대로 수백 년간 음지에서 힘을 키운 자들이 간자를 심으려 마음먹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라면 형제들 속에도 깊숙이 들어가 있을지 모르니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청운은 백철군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어깨를 으쓱하고 짐짓 포기했다는 듯 말했다.
“정 도울 마음이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무림이나 황궁을 도울 생각이 없다 해도… 그 점만큼은 세밀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백, 수천 명이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도 백철군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청운은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찔러보았다.
“사실 가주께서 생각을 조금만 바꾸신다면, 저에게 적당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백철군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청운을 향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청운이 모른 척하고 말을 이었다.
“백가장의 많은 형제들이 나올 수는 없지만 몇 명 정도는 괜찮은 것을 압니다. 그러니 무장으로 있는 분들이 많은 거겠지요.”
“으음,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들도 강호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네.”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그 백가장 출신 무장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기 위해서 고수 몇 분 정도 황궁에 와 계시는 것도 안 되는 겁니까?”
백가장 무장들에게 가르침을 내린다?
강호의 일에 관여하는 건 아니고?
“흐음, 그건 가능할 것도 같네만…….”
백철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제안했다.
“그럼 장로님이나 원로분 중 몇 분만 황궁에서 모시겠습니다. 대신 백가장이 독이나 다른 것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면 황궁에서도 도움을 주도록 하지요.”
“장로나 원로님들은 내가 하란다고 해서 하실 분들이 아니네.”
“한번 말씀이라도 드려보시지요. 혹시 압니까? 황궁 구경하며 지내는 걸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이 계실지요.”
그 말에는 백철군도 바로 대답을 못했다.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
평생을 강서성에서만 사신 분들이다. 이번에 황제를 만나러 간다니까 자청해서 따라나선 분들 아니던가.
황도에 들어와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던 그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하하.”
백철군은 결국 너털웃음을 지었다.
“제갈 형도 어쩌지 못했거늘, 자네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군.”
“송구합니다.”
“아니네. 그렇다고 좋아는 하지 말게. 내 마음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니.”
선조의 유훈이 걸린 일이기에 독단으로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함께 온 다른 이들과 상의할 문제였다.
“일단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결정을 내려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청운은 환한 얼굴로 백철군의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날 늦은 오후에 백철군이 청운을 찾아왔다.
“백가장 아이들을 가르칠 교관을 파견하기로 했네.”
그 소식이 전해지자, 황제는 그들을 크게 치하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 * *
청운은 보화전으로 불려가서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용상에 앉아서 못마땅한 시선으로 청운을 내려다보았다.
“꼭 밖으로 나가야겠느냐? 수련이라면 이곳 황궁에도 좋은 곳이 많지 않더냐?”
“황상, 단순히 수련만 하려고 나가는 것이 아니옵니다. 제가 파악한 신비세력을 살피면서 수련을 병행할 생각이옵니다.”
황제는 그가 떠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고 못마땅했지만 잡을 방법이 없었다.
허락하지 않으면 관직마저 내놓겠다지 않는가.
그렇다고 힘으로 잡을 방법도 없고…….
할 수 없이 황제는 청운을 밖으로 내보내는 대신 나중을 위해서 튼튼한 올가미를 하나 걸어두기로 했다.
“좋다. 그럼 허락하마. 대신 진무사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하고, 금의위와 오군도독부의 병력을 마음껏 쓸 수 있도록 오호평천대장군을 제수하겠노라!”
생각지도 못한 황제의 말에 청운은 급히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혈황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복은 없는 놈이 관복은 많네.]
그때 한쪽에 시립해 있던 병부상서 석태가 놀라서 황급히 나섰다.
“황상! 아니 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