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111화
붉은 대지와 푸른 대지로 나뉜 심상 세계의 중간에 한 사람이 둥둥 떠 있었다.
반듯하게 누워서 허공에 떠 있는 사람은 청운이었다.
청운은 심상 세계에서도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심상 세계가 들끓고 있었다. 사방에서 요동치는 기운이 중앙으로 몰려들었다. 그 기운이 중앙에 떠 있는 청운을 향해서 한 마리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이대로라면 청운의 몸이 맹수의 먹이로 전락할 판이었다.
다행히 중앙에 떠 있는 청운을 보호하듯이 몸 주위로 무언가 푸른 기운이 둘러쳐져 있었다.
파지지징!
그 기운은 다름 아닌 뇌기였다.
뇌기는 으르렁거리며 주위에서 청운을 노리는 기운을 막아냈다.
상대들 역시 녹록지 않은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뇌기를 범접하지는 못했다.
“끄응.”
청운의 입에서 신음처럼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르르 눈을 뜬 그가 한잠 푹 잔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청운은 상체를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 심상 세계에 들어와 있군.”
백철군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가슴을 가격당했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며 정신을 잃었었다.
다행이라면 혈황이 있었고 백철군과 생사투를 겨룬 게 아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것들은 뭐지?”
보지 못한 이상한 기운들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쿵쿵! 쿵!
몸에 와서 부딪히는 기세가 사뭇 강력했다. 다행이라면 뇌기가 자신을 보호하듯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었다.
“뇌기가 보호하고 있었군.”
상황파악은 되었다. 문제는 심상 세계에서 보지 못했던 기운들이 날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심상 세계가 조금 이상하네?’
바닥은 여전히 붉은색과 푸른색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오색 빛으로 나뉘어 있었다.
‘흠, 저 기운들은 천명신공과 다른 무공을 익히는 바람에 생긴 기운인가?’
청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심상 세계에서 날뛰는 기운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흠, 저 기운을 하나로 합치면 좋겠는데….’
머리는 흡수하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청운에게는 조언을 해줄 수 있는 혈황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혈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 계신가 보군. 나가서 여쭤봐야겠어.’
이미 청운이 정신을 차린 후로는 청운을 공격하던 기운들이 조금씩 힘을 잃고 있었다.
바닥을 나뉘고 있던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조금씩 허공으로 영역을 넓혔다. 어느새 둘의 기운이 예전처럼 온 세상을 나뉘었다.
크아아앙!
어디선가 용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기운들이 아쉬움을 남기며 스르르 허공에서 흩어졌다.
주위가 고요해졌다. 요동치던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서자 청운의 몸이 허공에서 녹아내렸다.
번쩍!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청운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 정 소감?”
“대이이인, 흐앙!”
정 소감은 청운의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펑펑 눈물을 쏟았다.
청운은 그런 정 소감을 살며시 안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한동안 못 보았다고 울보가 되었구나.”
혈황과 달리 청운은 정 소감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런 청운의 반응에 혈황이 한마디 했다.
[딴사람이 되었는데도 알아보다니, 응?]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을 다 하지 않았다. 이내 고개를 돌려서 입구 문을 보았다.
청운은 혈황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정 소감을 달래는 일에 주력했다.
그런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삼원은 깨어났느…….”
“응? 허억!”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은 정원 태감과 무림의 인사들이었다.
선두에선 정원 태감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변했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렸다.
뒤따르던 무림인 중에서도 두어 사람은 지난 소문을 떠올리고 헛기침을 했다.
“어허 그 사람 참….”
“소문대로 취향이 정말 그쪽인가?”
청운은 난감한 표정으로 정 소감을 놓아주었다.
‘허허. 이것 참 큰일이로군.’
정원 태감이 또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펄쩍 뛰었다.
“네 이노오오오옴! 네가 또…!”
“하하, 태감 오해입니다. 오해! 어쩌다 보니 꼭 이럴 때만 들어오셔서…….”
“오, 오해? 내 네놈을 단매에 쳐 죽일 것이야!”
그렇게 청운이 깨어난 사실이 황궁에 널리 알려졌다. 청운이 환관을 좋아한다는 소문과 함께.
* *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홀로 남겨진 청운은 혈황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일단 심상 세계에서 겪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뒤에 심상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흐음, 언젠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알았다.]
“알고 계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일반적으로 너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다. 대부분 무인은 한 가지 내공만 몸에 담을 수 있다. 특별한 심법을 익히지 않으면 여러 가지 내공을 한 몸에 담을 수 없지.]
그것은 무림 정설과도 같았다.
[가끔 음양의 상반된 기운을 운용하는 이들도 있다. 조화를 이루면 상승작용이 생기게 되지. 또는 같은 성질의 내공을 부딪쳐서 더 강한 힘을 내는 심법도 있고.]
“양과 양을 부딪쳐서 극양을 이루는 이치군요.”
[그렇지. 그런데 네 경우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뇌기가 중재자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혈황의 말에 청운은 이해가 안 되는지 되물었다.
“천명신공이 아니라 뇌기입니까?”
[그렇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천명신공을 다른 말로 조화신공이라 부르기도 하니.]
천은자의 독문신공인 천명신공을 익히면 다른 성질의 무공을 익혀도 주화입마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동안 다른 심법으로 무공을 펼쳐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천명신공 외에 혈황신공 역시 조화를 중시한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혈황신공이 조화를 이룬다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느냐며 청운이 반문했다.
혈황신공은 조화보다는 파괴를 중시하는 무공이다. 마공이라는 악명이 아니라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정순하긴 하지만, 조화신공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다.
[원래는 네 말이 맞다. 그런데 뇌기와 합쳐지면서 이상하게 변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혈황신공은 그렇다고 치고, 뇌기는 또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확한 건 아닌데, 혈황신공과 합쳐지면서 뇌기 역시 변한 것 같다.]
“흠, 그럼 나중에 익힌 천명신공의 영향도 있겠군요.”
[그렇지. 세 가지 힘이 모두 조화의 기운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그러나 청운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혈황님의 말씀이 옳다면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세 가지 힘이 조화를 이룬다면 하나로 합쳐져야 하는 것 아닌지요?”
[끄응, 나도 그게 이해가 안 되었기에 그동안 말을 안 한 거다.]
조화를 이룬다면 하나로 합쳐지는 게 순리다. 혈황신공에 절반의 뇌기가 스며든 것처럼.
그런데 나머지 절반의 뇌기는 조화만 이룰 뿐 여전히 따로 존재했다.
백철군과의 싸움에서 밀린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만일 세 가지 신공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가 되거나, 하다못해 상승작용을 했다면 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부분을 연구하려면 지금처럼 돌아다녀서는 안 될 것 같다.]
“같은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황상과 담판 지어야겠습니다.”
세 가지 신공을 하나로 묶을 필요가 있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황상이 겁을 먹었으니.”
예전 같으면 자신이 수련을 떠나겠다고 해도 황제가 윤허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신비세력의 존재 때문에라도 놓아주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니 이야기를 잘 해봐라.]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그런 청운에게 혈황이 물었다.
[혹, 황제가 안 된다고 하면 관직을 내려놓을 생각도 해야 할 거다.]
청운은 이미 입신양명의 꿈을 이루었다.
가문의 원도 풀었고, 복수도 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얼마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느냐 하는 것뿐.
하지만 고위 관직에는 욕심이 없었다.
“예, 저도 그리할 생각입니다.”
* * *
건천궁은 황궁의 내궁에 위치해 있었다. 황제가 생활하는 곳이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청운은 건청궁에서 황제를 마주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 곁에는 정원 태감이 있었는데, 눈에 힘을 주고 청운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다른 한쪽에는 풍천호 대영반이 흐뭇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황제는 조금은 어두운 신색으로 청운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삼원의 말은 신비세력이 강하니 수련을 위해서 떠나겠다는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소관의 힘이 부족함을 이번에 느꼈습니다. 지금 실력으로 적을 상대하면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백철군에게 패한 일을 말하고 있었다. 신비세력 중에서도 백철군에 버금가는 자가 있다면 큰일이었다.
황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다, 아니야! 어찌 이번 일이 삼원의 잘못이겠느냐? 대장군이 원정을 떠난 상황에서 나를 지켜준 것은 삼원이 아니더냐? 그러니 자책할 것 없다.”
대장군은 황궁제일고수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명을 받아서 정예를 이끌고 멀리 오랑캐를 토벌하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백철군을 막지 못했지만, 그가 이곳에 있었다 할지라도 백철군의 상대는 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천하제일검이라는 목유자 역시 막지 못한 백철군이다. 대장군이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청운은 황제가 거듭 자신의 주청을 거절하자 물러서지 않고 강하게 말했다.
“황상, 만일 신비세력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면 늦을 수도 있사옵니다. 그러기 전에 놈들을 상대할 힘을 길러야 하옵니다.”
“끄응.”
청운의 연이은 간청에 황제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두려우시겠지. 자신을 지켜줄 자가 아무도 없으니.’
청운의 생각대로 황제는 두려웠다.
만일 백철군이 딴마음을 먹었다면 황궁은 피바람에 휩싸였을 것이고, 자신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황궁의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쳐들어온다면 자신을 지켜줄 무장이 필요했다.
청운은 그런 황제의 마음을 잘 알기에 떠나기 전 넌지시 말했다.
“황상, 소관이 백철군을 만나보겠사옵니다.”
“그, 그래 주겠느냐?”
황제는 반색하며 기뻐했다.
제갈신기가 나서서 설득했지만 백철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가 힘을 실어준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백가장 출신 무장들을 데리고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 삼원을 믿어 볼 것이야!”
황제의 승낙이 떨어지자, 청운은 그길로 건청궁을 나서서 백철군을 찾아갔다. 그는 보화전 좌측에 있는 전각에서 쉬고 있었다.
환관의 안내로 들어선 곳은 작은 정원이 딸린 곳이었다. 아담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가주, 이곳에 계셨습니까?”
“어서 오게. 몸은 좀 어떤가?”
백철군은 청운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둘은 환관이 내오는 차를 기다리며 서로를 보았다. 딱히 힘 싸움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살피는 시간은 되었다.
차로 목을 적신 백철군이 청운에게 물었다.
“내 궁금한 게 많은데, 몇 가지만 물어도 되겠는가?”
“하문하시지요.”
“흠……. 먼저 내 딸 청청이는 어떻게 만난 것인가?”
백철군은 대뜸 백청청에 대한 말부터 꺼냈다.
항주에서 야반도주를 택한 청운이기에 곤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전에 객잔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 뒤로 대향림에서 만나 소흥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래? 청청이도 비슷하게 말은 했는데, 내용이 조금 다르구먼.”
“그럴 리가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백청청이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청운은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별생각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백철군이 말했다.
“둘이 사랑한다고 하던데?”
풉!
청운은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