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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108화 (108/257)

# 108

108화

삼천을 회유하는 일은 성공했지만 남겨진 사안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제갈신기와 무림인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고수는 넘쳤고 인원도 충분했다. 놈들의 세력을 줄이는 데 실패했지만, 무림인들이 뭉쳤으니 반격할 때였다.

넓은 회의장에 무림인들과 청운이 함께했다.

청운은 무림인들 앞에 서서 말문을 열었다.

“이번 일로 놈들이 얼마나 대담한지 아셨을 겁니다.”

무림인들 역시 뇌옥에서 역적을 빼가는 그들의 신출귀몰한 실력에 깜짝 놀란 상태였다.

“놈들을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무림 역시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무림인들은 대부분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황궁과 무림은 결코 같지 않았다.

정파 무림에 위협이 될 자들이라면 벌써 세력을 형성하고 세상에 나왔어야 했다.

“혹시 사도맹이나 마교 놈들 아니오?”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청운은 그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비세력이 그들이라면 개방이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이 아닙니다.”

“험, 그럼 뭐…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것 같군. 놈들에 대한 대처는 우리에게 맡기시게.”

청운은 그들에게 신비세력 고수들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로 설명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놔둬라. 원래 저런 놈들이니까. 한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거다.]

청운은 혈황의 말대로 그 일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래서 말씀드립니다만, 당분간 무림도 미래에 해악이 될 자들을 처단한다 생각하시고, 황궁과 힘을 합해서 그들을 상대했으면 합니다.”

“진무사, 황궁과 힘을 합해서 상대하자 하셨는데, 설마 본 맹이 황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이번에는 푸른 청의를 입은 사내가 말했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잘 정련된 한 자루 검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무정옥검(無情玉劍) 안상철이란 고수로, 무림맹에서 보낸 대표 중 한 명이었다.

청운은 그의 목소리와 표정을 보고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는 황궁이 무림을 좌지우지하게 될까 봐 걱정인 듯했다.

“그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정도면 되니까요. 결정은 양측의 대표가 논의해서 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황궁은 중원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제거하길 원할 뿐입니다.”

무림인들은 서로를 보며 웅성거렸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삶을 살아가는 무림인에게는 황궁의 간섭이야말로 가장 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청운의 말대로 된다면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안상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요. 그런 정도라면 저희도 찬성입니다.”

“아, 사도맹에도 연락을 넣은 상태입니다.”

“사도맹?”

안상철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정파와 사파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그런데 황궁에서 사도맹에도 연락을 넣었다고 하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청운은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고 말을 이었다.

“그들은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나마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청운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회의를 진행하지요.”

무림의 고수들이 황궁에 온 후로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계속되는 불안감에 황궁 무인들의 실력을 끌어올리기로 마음먹었다.

황궁무고와 약고를 개방해서 금의위와 동창, 그리고 오군도독부에서 선발된 자들을 고수로 키울 작정이었다.

그들은 모처로 이동해서 수련을 하게 되었다.

그들을 가르칠 교관은 무림맹에 맡기기로 했다.

황제가 그에 상응하는 포상을 약속하자, 무림맹에서는 장로급 고수를 교관으로 내세웠다.

* * *

청운이 황도로 돌아온 지 한 달이 흘렀다.

그는 그동안 황실을 정비하며 신비세력에 대한 단서를 잡기 위해서 뛰어다녔다.

이미 신비세력을 적으로 지정했기에 무림인들도 손을 보탰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 기다리던 사람들이 도착했다.

강서백가로 알려진 백가장이 공식적으로 수백 년 만에 중원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동안 무림에 혈겁이 있을 때마다 무림은 백가장에 손을 내밀었었다. 그러나 선조의 유훈을 어길 수 없었던 백가장은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운의 기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가 집무를 보는 보화전에 다섯 명의 무인이 들어섰다.

중앙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는 들어서는 이들을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대에 못 미치는 외형 때문이었다.

그가 듣기로 백가장 무인들은 선풍도골의 인물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평범해 보였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었다. 황궁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문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황제의 얼굴에 실망감이 드리워졌다.

앞으로 다가온 사내들은 황제 앞에서 절을 했다. 그런데 맨 앞에 있는 사내는 절을 하지 않고 포권을 취했다.

“황제 폐하, 이렇게 용안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강서 백가장의 현 가주인 백철군이라 하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황제 주변에 있던 무인들과 관리들이 당장 호통을 치며 화를 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놈! 아무리 야인이라 못 배웠다지만 황제 폐하께 제대로 예를 올리지 못할까?”

스릉.

스르릉.

무관들 역시 검을 뽑아 들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일부는 내공을 실어 보내며 강제로 무릎을 꿇리려고 했다.

사방에서 전해지는 경력이 백철군을 압박했다. 그러나 백철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를 보며 말했다.

“오래전 중원을 다스렸던 제국의 황제는 백가장의 주인에게 절을 받지 않았습니다. 혹, 알고 계시온지요?”

백철군의 질문에 황제는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문관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한림원 원주도 있었다.

한림원 원주인 사마중맹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황상, 전조에 있었던 일이옵니다. 제국이 새롭게 중원에 자리를 잡았으니 상관없는 일이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철군에게 말했다.

“그렇다는군.”

시큰둥한 황제의 대답에 백철군이 다시 물었다.

“황상, 한 가지 여쭙겠사옵니다. 황실이 바뀌었으니 오랜 세월 이어온 황실과 백가장의 관계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지요?”

“관계가 있었나?”

황제는 시큰둥하게 말하며 사마중맹을 보았다.

한림원주인 사마중맹은 다시 읍하며 입을 열었다.

“황상, 전조의 기록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사옵니다. 신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백가장을 황실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황후로 맞아드린 적도 있사옵니다. 더군다나 황제와 호형호제하거나 스승의 예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흠, 그럼 이미 망한 제국의 황제와 친했다는 말이로군.”

황제는 백철군을 보며 ‘이제 와서 어쩌라는 말이냐?’ 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황제의 좌측에 있던 관리가 한 발 나서며 호통 쳤다.

“백가주는 듣거라! 백가장 출신 무장들의 재주가 뛰어난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무례하게 군다면 경을 칠 수가 있느니라. 어서 황상께 예를 올리거라!”

황제를 대신한 호통이었다.

그 속에는 까불면 출사한 관리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철군은 황제를 똑바로 보았다.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그의 두 눈은 일렁거리고 있었다.

예를 올리라는 명령에도 가만히 황제를 보고 있자, 무장들이 참지 못하고 다시 호통을 쳤다.

“이놈! 죽고 싶은 것이냐?”

호통이 신호라도 되는지 사방에서 백철군에게 가해지던 내력이 배가 되었다.

우웅, 우웅!

강제로 백철군의 무릎을 꿇릴 심산이었다. 무장들이 볼 때 바람 불면 훅 날아갈 것 같은 모습이었기에 깔본 것이다.

그러나 백철군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압박이 계속되자 이내 피식 웃음 짓더니 무장들을 향해서 손을 휘저었다.

획!

우당탕탕!

“헉!”

“크윽!”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백철군의 손짓 한 번에 압박하던 무장들이 바닥을 굴렀다.

황제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무장답게 절정에 오른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허망하게 날아갔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곁에서 소란이 일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인물들이 옥좌 앞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호신위.

황제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총 열둘로 이뤄진 황실 최고수였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황제의 신변에 위험이 생겼다고 판단했을 때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제는 무척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손짓 한 번에 믿었던 친위대가 날아가다니.

백철군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관리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당장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지 못할까?”

황제 앞에서 무력을 선보였다는 것은 역모에 준하는 행동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백가장은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백철군이 살짝 힘을 내보이며 호통을 쳤다.

“닥쳐라!”

우르르르릉!

그의 한마디에 대전이 흔들렸다.

그 모습에 관리들은 주저앉았고 무장들은 자신의 병기를 꽉 쥐었다. 다행이라면 사람들에게 영향은 주지 않았다.

백철군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백가장 가주는 친족 외에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이것이 오랜 전통이다. 왜 이런 전통이 있었는지 아느냐?”

누구 하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명만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청운이었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청아한 목소리가 들리자 백철군의 고개가 돌아갔다.

청운을 슬쩍 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 나이에 제법이구나. 네가 이청운이냐?”

“예, 제가 이청운입니다.”

잠시 말을 끊고 청운을 살피던 백철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문을 도와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따로 보상할 것이다. 그리고 너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느니 너는 물러서라.”

청운은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혈황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물러서라. 그가 마음먹는다면 황궁에서 살아 숨 쉬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강한가요?

청운은 혈황의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백철군의 경지가 짐작되지 않았다. 화경에 오른 자신이 상대의 경지를 짐작 못 할 인물이라면 한 가지뿐이었다.

이를 확인이라도 시키듯이 혈황이 말했다.

[입신의 경지에 들어선 자다.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입신이라면… 현경인가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혈황도 백철군의 정확한 경지를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제법 피가 끓어오르는군.’

천하제일검이라 알려진 무당의 목유자를 봤을 때 ‘제법 실력이 있군.’이라며 무시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백철군은 달랐다. 절로 호승심이 일었다.

청운이 머뭇거릴 때 백철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대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이 일은 황실과 백가장의 오랜 전통과도 같은 일이니 너는 물러서 있어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청운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지, 아니면 모두 들으라는 말인지 백철군이 이유를 설명했다.

“흠, 오래전부터 황실은 우리 백가장에게 절을 받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뜻을 이룬 황제는 한 명도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느냐?”

잠시 생각한 청운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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