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105화 (105/257)

# 105

105화

“응? 태감, 어서 오십시…….”

“당장 떨어지지 못할까!”

청운은 할 말을 다 하지 못했다.

그제야 정원 태감이 화를 내는 이유를 깨달았다.

측은한 마음에 어린 환관의 어깨를 다독이고 있었는데 정원 태감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태감, 오해입니다. 오해.”

“오, 오해?”

청운은 재빨리 어린 환관에게서 떨어져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그게 실책이었다. 청운에게 붙잡혀 있던 어린 환관이 정원 태감 발치로 달려가서 풀썩 쓰러지더니 서럽게 울부짖었다.

“태감님! 살려주십시오. 엉엉엉.”

그 모습에 정원 태감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청운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린 그가 호통을 쳤다.

“내 기필코! 네놈을 단매에 쳐 죽일 것이야!”

“하하, 오해라니까 그러십니다. 오해라니까요.”

그렇게 청운은 오해의 늪에 빠져들었다.

* * *

다시 한번 황궁에 소문이 퍼졌다.

오해로 비롯된 소문이었지만 이를 사실로 여기는 자들도 많았다.

덕분에 청운의 황궁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지금도 청운이 지나가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환관을 좋아하신데.

-이번엔 누구래?

-남자가 지조가 없이 다른 아이에게 눈길을 주셨다네.

그들은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청운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려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곁에서 함께 움직이는 혈황은 대소를 터트리기 일쑤였다.

[으하하하. 내 너의 취향을 존중하마.]

-그만하세요. 곁에서 보셔놓고도 그러세요.

혈황마저 청운을 놀리기 바빴다.

며칠이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황궁은 바쁘게 돌아갔다.

황제는 역모로 잡힌 혁련휘와 그 일당을 친국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내용은 별것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혁련휘는 한사코 결백을 주장했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는 순간 죽게 될 거라는 것을.

황제는 일부 무림 세력에게 은밀히 교서를 내렸다. 그들에게 신비세력의 존재를 알리며 도움을 청했다.

청운의 뜻을 받아들여서 각파의 실전된 무공이나 영약, 그리고 신병이기를 대가로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황궁무고와 약고에 있는 물건들을 풀기로 하자 무림인들이 반응했다.

그들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유실된 자파의 무공이 필요했다. 여기에 영약마저 더해지자 황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황제는 고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장로급이 포함된 일류 이상의 고수를 요구했다.

장로급도 절정을 넘어 초절정에 이른 이를 파견해 달라는 요구였다.

생각보다 조건이 까다로웠는데도 효과는 좋았다.

황도와 가까이에 있는 세력부터 무인들이 달려왔다.

제일 먼저 고수를 보낸 곳은 하북팽가였다.

덩치 좋은 무인들 사이에서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를 향해서 청운이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군.”

“언제 돌아온 거야?”

팽가의 무인은 팽도천이었다.

청운은 팽가의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일부는 자룡궁에서 인연을 맺은 자들도 있었다.

특히 이들을 이끌고 온 추혼도 팽자경을 알아본 청운이 인사를 건넸다.

“다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진무사의 활약은 익히 들었네. 언제 시간이 나신다면 자세히 듣고 싶은데.”

이야기를 듣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지금도 커다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당장 한판 붙어보고 싶은 것 같았다.

이를 몰라볼 청운이 아니었다. 고수와의 대결은 청운 역시 반가운 일이었다.

“시간을 내서 찾아뵙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청운은 팽가의 무인들을 황제에게 인도했다.

황제는 하북팽가를 치하하며 크게 기뻐했다.

“역시 팽가로다. 짐의 청을 저버리지 않고 달려와 주다니, 고마운 일이로다.”

“황제 폐하의 홍복이옵니다.”

팽가의 무인들은 군문에 많이 투신하고 있었다. 그들의 용맹함을 황제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을 이끌고 온 추혼도 팽자경은 현 가중의 동생이며, 차기 도왕으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황제에게 팽자경의 등장은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팽가의 무인들도 황제의 환대에 만족했다.

황제와 만남을 뒤로하고 팽가의 무인들이 안내된 곳은 뇌옥 근처의 숙소였다.

뇌옥 가까이에 무인들을 배치해서 유사시 즉각 대응할 수 있게 준비했다.

하북팽가를 시작으로 연락받은 무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무림세력들은 작게는 십여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파견해서 모인 인원만 벌써 수백이 넘었다.

자칫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무당파에서 한 인물이 파견되자 그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뭉쳤다.

현 무림 천하제일검으로 알려진 검왕 목유자였다.

무당파 장문인의 사숙으로 그가 펼치는 태극혜검을 끝까지 받아낸 인물은 아직 없었다.

선풍도골의 멋들어진 수염과 백색 도사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할 만큼 성스러웠다.

처음 목유자를 본 황제는 신선이 나타났다면 크게 기뻐했다. 그가 천하제일검으로 불리는 목유자라는 사실을 알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비세력이 황궁에 침입할까 봐 불안했던 황제는 그의 출연으로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냈다.

* * *

넓은 회의장에 수십 명이 모였다.

각파의 수장들과 청운을 비롯한 황실 사람들이었다.

양쪽에 의자를 길게 놓고 수장들과 황실 고위직이 앉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세력도 많았지만 회의를 늦출 수는 없었다.

청운은 좌중을 둘러보다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인사를 했다.

“진무사 이청운입니다. 여러 영웅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의 인사에 다른 이들도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인사가 끝이 나자 청운이 앞으로 나서서 신비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무림에 알 수 없는 암류가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몇 명으로 구성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일이 선하지 않고 수많은 백성과 무림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청운은 연이어서 자신이 겪은 일과 수집한 정보를 꺼내놓았다.

자신이 죽임을 당할 뻔한 이야기부터 하오문과 싸움까지 긴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무림인들의 안색이 수시로 변했다.

청운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조용하던 실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지만 청운의 행보를 들었던 이들이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때 학사모를 쓴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마디 했다.

“자자, 잠시 진정들 하게.”

그는 중년을 훌쩍 넘긴 사내였다.

사내의 출연에 주위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진무사, 저는 제갈세가의 신기라고 합니다.”

그의 소개에 몇몇 인물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대부분은 그를 아는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신기제갈로 불리는 천뇌 제갈신기였다.

무림에서는 천하제일뇌라 불리는 인물이다. 무림맹 군사를 역임한 그의 영향력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대단했다.

“진무사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몇 가지 의문이 있지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어찌 이렇게 신비세력을 공개하시는 것입니까?”

제갈신기의 의문은 당연했다.

어쩌면 청운을 나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배웠다는 학사가 그것도 연중삼원을 했다는 자의 머리에서 나올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자리는 공개적인 자리다. 보는 눈과 귀가 너무 많다. 보통 이런 중대한 사안은 은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상대가 알아차리기 전에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원이라는 작자가 적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고 있으니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청운은 제갈신기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천뇌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한 번쯤 뵙고 싶었던 인물이 천뇌 제갈신기였기에 예를 차렸다. 그러고는 질문에 대답했다.

“저는 이미 여러 차례 그들과 싸웠습니다. 살아서 도망친 자도 있기에 제 소식을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서로 알고 있는데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도 공개석상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만인 그들이 지금처럼 은밀하게 움직이지 않고 전면에 나서면 어찌 감당할 생각인가?”

만일 그리된다면 무림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청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제갈신기를 보며 말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겁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지금처럼 골머리를 앓지는 않을 것입니다. 놈들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작전을 짤 테니까요.”

“허허, 생각보다 배포가 큰 친구로군. 그러다가 감당 못 할 힘이라면 어찌할 생각인가?

“무림의 힘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충분하다?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힘이 부족하니까 숨어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군, 아직 그놈들이 무림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다는 말이군. 하하하.”

제갈신기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해했지만 다른 이들도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청운이다.

“그들은 수백 년 전부터 무림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황실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청한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속한 곳에도 그들의 마수가 뻗어 있을지 모릅니다.”

충격적인 말에 장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제갈신기는 손을 들어서 그들을 조용히 시킨 후에 입을 열었다.

“진무사, 방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그리고 증거는 무엇인가?”

“예,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특히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과 자룡궁의 역사가 이백 년을 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자룡궁? 그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예, 자룡궁주에게 직접들은 이야기이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제갈신기는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백 년간 중원 무림의 기둥이었던 곳이 암중세력이라니.

다른 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일 청운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의 말대로 무림 전역에 그들의 첩자가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미궁으로 빠진 사건의 전말(顚末)을 알게 되었다.

자룡궁주와 그의 측근들이 의문의 죽임을 당했었다. 그 흉수가 청운으로 밝혀졌다.

제갈신기와 청운의 두 눈이 허공에서 다시 얽혔다.

말은 안 했지만 둘은 수많은 대화를 했다.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둘 다 당대 최고의 두뇌였으니.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건 제갈신기였다.

“아무래도 따로 이야기해야겠군. 진무사 생각은 어떤가?”

“이 자리가 끝나면 따로 뵐 생각이었습니다.”

“하하하. 좋네. 그럼 나머지도 어서 조율하세.”

제갈신기는 호탕하게 웃었다.

이 자리에 그보다 높은 무림 서열을 가진 선배들도 있었지만, 이런 머리 쓰는 일은 언제나 그가 도맡아 왔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다.

이들이 전부 모인 것은 따로 불러서 다시 설명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혹시 놓친 부분을 잡기 위함이었다.

제갈신기는 할 말을 다 했는지 본격적으로 회의를 하기 위해 운을 띄웠다.

“진무사 이제 경비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나?”

* * *

이틀이 흘렀다.

그동안 추국이 이어졌고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이 결정되었다.

혁련장의 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청운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일부터 청운을 죽이려고 한 일까지 그 죄가 무겁게 다뤄졌다.

태화전 기단 위에 정원 태감이 섰다.

그 아래 광장에는 수십에 달하는 죄인들이 묶여서 판결을 기다렸다.

정원 태감은 좌중을 쓱 둘러보다가 교지를 착 펼치며 큰 소리로 읽었다.

차례대로 한 명 한 명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이곳에 끌려온 자치고 살아남는 자는 없었다. 전부 능지처참이 확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일의 원흉인 혁련휘가 남았다.

“역적 혁련휘에게 팽형을 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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