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적지 않은 포상금이 내걸리자, 무림인이나 병사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상대의 무공이 강한 걸 알기에 무작정 그들을 사지로 몰 수는 없었다.
“무림 동도 여러분, 절대 무리하면 안 됩니다. 놈들은 흉악무도한 놈들로 무공이 고강합니다. 발견만 해도 은 천 냥이니 싸우려 하지 말고 먼저 수색에 힘써주시오.”
포상까지 걸린 일이기에 무림인들이 사방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일반 백성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 왜구를 잡지는 못하지만 멀쩡한 눈은 있었다.
주위에 오가는 이들과 상구 주변을 오가며 수상한 자들이 보이면 위소나 간이 검문소에 신고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선량한 자들이 곤욕을 지르기도 했다.
포상의 위력은 대단했다.
왜구로 보이는 무리가 숨은 곳이 밝혀졌다.
“대인, 놈들은 산동성 조현 인근의 장강 지류에 배를 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 척의 커다란 배가 산기슭과 맞닿은 장강의 지류에 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배를 상선으로 잘 위장했지만 인근에 사는 어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소식을 전해온 어부에게 포상하고 병사를 동원했다.
상구 위소의 병력을 그대로 두고 산동성 도지휘사사에 연락을 넣어서 협조를 구했다.
왜구의 침략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기에 조현과 단현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무장을 하고 움직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림인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미 산동성에도 왜구의 출연이 소문난 상태였기에 황보세가와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달려왔다.
모든 준비를 마치는 데 사흘이 걸렸다.
무림인들과 병사들이 합동으로 움직였다.
적들 역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도주를 시도했다.
청운 역시 예상한 일이기에 장강의 앞과 뒤를 틀어막았다. 곁가지로 이어진 지류에도 병사들을 보내서 경계했다.
왜구들은 장강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놈들에게 협력하는 길잡이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합류하는 병사들과 무림인들이 많아졌다.
포위망이 좁혀지고 왜구들과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청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백연우는 그가 보이지 않는 데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 * *
해가 중천에 뜬 시각.
개봉부 동문에 마차 다섯 대와 수레 열 대로 이뤄진 대륙상단이 들어섰다.
왜구로 인해서 검문이 강화된 탓에 일행이 성문에 멈췄다.
평소라면 대륙상단을 검문 없이 보내겠지만 어쩔 수 없이 길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멈추시오.”
선임으로 보이는 경비가 상단의 앞을 막았다.
맨 앞의 마차 휘장이 살짝 들렸다.
인상이 넉넉한 인물이 얼굴을 삐쭉 내밀었다.
“고 백장 아닌가? 날세.”
“아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깃발을 보고 황 지부장님인 줄 알고 있었는데 송구합니다.”
고 백장이라 불린 경비는 상단을 이끄는 황의중(黃倚重)과 아는 사이였다.
황의중(黃倚重)은 대륙상단 하남성 개봉 지부장이다.
넉넉한 뱃살과 후덕한 인상을 지닌 그는 셈이 정확하고 추진력이 상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고 백장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휘장 안쪽에서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고 백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황의중이 휘장을 조금 더 젖히자 안에 타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약관의 사내가 무언가를 내밀고 있었다.
고 백장은 사내가 내민 신분패를 알아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소란 떨지 말고 통과시키거라.
다시 고 백장의 귓가에 전음이 들려왔다.
고 백장은 제법 눈치가 있는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통과!”
막 상단의 마차를 살피려던 병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부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하라는 내용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잘 아는 일들의 봇짐까지 풀어서 확인했는데 살펴보지도 않고 통과시키라고 하니 의아한 것이다.
“뭣들 하느냐? 어서 통과시키지 않고.”
추상같은 호통에 부하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 모습에 황의중은 작은 소리로 고 백장에게 말하며 휘장을 닫았다.
“일간 들르게.”
“살펴 가십시오.”
고 백장의 인사 소리가 들렸지만 황의중은 말없이 눈앞의 사내를 보았다.
약관의 나이에 천하를 가슴에 담은 인물이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고, 천하 학사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한다. 더욱이 황실제일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랬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청운이었다.
청운은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황의중에게 포권하며 감사를 전했다.
“상단주 덕에 편하게 왔습니다.”
상념에 젖어 있던 황의중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마주 포권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대인, 이것도 다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백가장과 대륙상단의 도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둘이 만난 건 상구 위소에서였다.
위지휘사인 백연우가 청운의 요청으로 대륙상단과 연줄을 놓았다.
청운과 만남 후에 상행위가 결정되었다.
군부에서 사용하는 병장기도 취급하는 대륙상단이기에 아무 의심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덕분에 중요한 포로들만 따로 추려서 마차에 나눠 실었다. 수레에는 병장기와 식량을 실어서 위장했다.
혁련휘를 구하려고 계략을 펼치는 자들의 눈은 이미 왜구 소탕으로 돌린 상태였기에 의심받지 않고 개봉까지 올 수 있었다.
대륙상단은 천하 삼대 상단인 만큼 움직이는 물동량도 어마어마했다.
이곳 개봉지부만 해도 하루에 마차와 수레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린다.
오늘도 변함없이 이른 아침부터 마차와 수레들이 개봉지부를 빠져나갔다.
◈ ◈ ◈
어두운 실내에 둥근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내가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쾅!
천산에서 나는 철목으로 만든 탁자의 한 귀퉁이가 보기 좋게 부서졌다.
사내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불타오르는 그의 두 눈에서 흉흉한 안광이 줄기줄기 솟구쳤다.
“놈이 황도에 들어설 동안 무엇을 한 것이오?”
좌중을 둘러보며 그는 분노를 그대로 표출했다.
누구도 사내의 말에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그리 있다가 사내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자 한 노인이 말했다.
“칠야는 잠시 진정하시게.”
“흥! 이게 진정할 일입니까?”
칠야라 불린 사내의 분노를 그대로 받았지만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입을 열었다.
“일이 틀어졌지만 공자를 구할 기회는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끄응.”
칠야 역시 노인이 하는 말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황궁이라 해도 자신들의 눈과 귀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관한 자들에 대한 분노는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칠야는 한쪽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앉아 있는 사내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광존, 이번 일, 우리 흑야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끌끌, 놈의 격장지계에 잠시 혼선이 있었네. 내 사과하지.”
광존이라 불린 사내는 덩치가 다른 이들에 비해서 두 배는 되는 거구의 사내였다.
터질 듯한 그의 근육이 숨을 쉴 때마다 꿈틀거렸다.
광존이 맡은 임무는 혁련휘의 구출이었다. 그런데 청운의 계략에 보기 좋게 실패했다.
칠야는 이를 두고 책임을 묻고 있었다.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분을 어떻게 구할지가 중요합니다.”
“쯧쯧, 지금 흑야의 일야도 아닌 칠야가 나를 추궁하는 것인가?”
“흥, 나는 칠야의 신분이 아닌 흑야의 대표로 이 자리에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물론, 알고 있지. 그래서 건방진 모습을 보면서도 참고 있는 것 아닌가.”
광존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살기로 가득했다.
점점 격해지려는 분위기를 다시 잠재운 건 예의 노인이었다.
“둘 다 그만하게. 그보다 이청운이라는 어린놈을 어찌하면 좋겠는지 의견을 내놓게.”
청운의 이름이 거론되자, 장내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그동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다른 인물들도 변화를 보였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칠야였다.
“절대 살려둬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놈에 대한 척살령을 내려야 합니다.”
“제 생각도 칠야와 같습니다. 소림의 각원대사나 무당의 목유자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칠야의 곁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동의했다.
소림 무공을 완성했다는 각원대사.
천하제일검으로 불리는 무당 목유자.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자들 중 일 순위였다.
그런데 지금은 청운이 이들을 제치고 일 순위로 올라섰다.
다른 이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회의를 이끄는 노인이 다른 이들의 동의를 구했다.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은 안 계시는가?”
그때 다소곳이 앉아 있던 묘령의 여인이 나섰다.
교태 섞인 음성이 차가운 실내를 흔들었다.
“하는 짓이 귀엽지 않나요?”
“뭐라? 귀여워?”
“누구? 이청운 말씀이시오? 요희께서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드시오?”
“쯧쯧, 또 시작이군. 젊은 놈만 봤다 하면 암내를 풍기니.”
무엇이 못마땅한지 몇몇이 예의 여인을 보며 혀를 찼다.
요희라 불린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긋 웃었다.
“현재 거점이 세 곳이나 사라졌죠. 특히 자룡궁의 멸문은 저희에게 뼈아픈 일이에요. 그래서 조심하자는 말이에요. 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도 못 한 상태잖아요.”
요희의 말은 조심하자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흑야의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칠야였다.
이미 흑야는 청운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이번에도 뜻하지 않게 화경의 고수와 초절정이 포함된 일개 단이 전멸했다.
칠야는 조심스럽게 요희를 보며 말했다.
“화경의 고수 다섯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흑야에는 화경의 고수가 넘쳐 나나 보네요.”
“무슨 뜻이오?”
칠야의 미간이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얼굴에 걸린 웃음은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화를 낼 수 없었다.
“이미 흑야에서 파견한 화경의 고수가 여럿 당했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무슨!”
“아닌가요? 정보에 의하면 흑야대도 셋이나 박살 났다던데. 설마 방심했다는,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칠야는 요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입을 닫았다.
이때 노인이 노련하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놈이 예상보다 강해서 벌어진 일이오. 사실 여기에서 놈의 실력을 정확히 아는 이는 없지 않소?”
노인의 말에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한 명 있었다. 요희였다. 그녀는 교태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호홍, 그러니 알아봐야지 않겠어요? 전위대인 흑야대가 박살이 났는데, 또 보냈다가 다시 당하면 어쩌려고요.”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설마 요희께서 나서시겠다는 말씀이시오?”
“노야, 당연히 제가 나서야지요. 그 야들야들한 놈의 속살을 제가 봐야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있는 반면 몇몇은 벌레 보듯이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그때 학사의를 입은 사내가 나섰다.
“흠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조만간 자룡궁에 내려진 역모죄가 걷어질 것입니다.”
“오, 선생이 힘을 쓰더니 결국 해내셨구려.”
“별거 아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룡궁은 예전 성세를 찾을 것입니다.”
새로운 안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요희가 나서서 초를 쳤다.
“어느 세월에요? 자룡궁을 만드는 데 이백 년이 걸렸어요. 설마 또 기다리자는 말씀이신가요?”
요희는 묘수선생을 향해서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묘수선생이 반대했었다. 그런데 다시 반대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요희의 말에 묘수선생의 한쪽 볼이 실룩였다.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설마 이백 년이나 걸리겠는가? 대업이 시작되면 자룡궁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알지 않나?”
“흥, 이미 자룡궁의 핵심전력이 사라졌어요. 그들을 어찌 채우겠다는 말인가요?”
그녀의 말대로 궁주와 핵심 전력 태반이 청운에게 죽임을 당했다.
예전 같으면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룡궁의 빠진 전력을 채워 넣을 예비대가 있었다.
그러나 하오문을 지원하면서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묘수선생은 그의 이름처럼 한 가지 꾀를 내놓았다.
“혈룡단(血龍丹)이 있지 않나?”
“네? 지, 지금 혈룡단을 사용하겠단 말인가요?”
요희는 깜짝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