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화
푹!
혈황의 손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온 세상이 검게 물들 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옥에 가면 염왕에게 알려라. 앞으로 바빠질 거라고……”
흑야대주는 혈황의 목소리를 다 듣지 못하고 쓰러졌다.
흑야대가 쓰러지고 남은 것은 영풍장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중에는 청운을 힘겹게 했었던 자들도 보였다.
“마무리 지어볼까?”
혈황이 신형을 움직였다.
허공으로 스르르 떠오르더니 그대로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 경이적인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혈인이나 마찬가지인 혈황의 몸 주위로 너풀거리는 붉은 아지랑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였다.
청운에게 그토록 독하게 달려들던 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무위와 공포는 살고자 하는 본능을 일깨웠다.
혈황이 손을 뻗었다.
턱!
그의 손에 한 사내의 목이 잡혔다. 영풍장주 고중월이었다.
목이 잡혀서 허공에 매달린 고중월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버둥거렸다.
내공을 일으켜서 혈황의 몸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혈황의 몸에 닿기도 전에 붉은 아지랑이에 막혀서 사라졌다.
빠각!
고중월의 목이 옆으로 꺾였다.
혀를 길게 빼문 그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획!
혈황은 아무런 감흥 없이 고중월을 한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앞을 보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혁련휘가 떨고 있었다.
“쥐새끼, 잘 있었느냐?”
“이, 이놈! 이 개 같은 놈!”
혁련휘는 청운의 몸을 사용하는 혈황을 향해서 이를 드러냈다.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두려움에 온몸을 벌벌 떠는 게 다였다.
혈황은 무심한 눈으로 혁련휘를 바라보았다.
‘그냥 죽일까? 아니면 청운이가 처리하도록 놔둘까?’
순간 죽일지 살릴지 고민이 되었다.
그때 혈황의 눈에 주저앉은 혁련휘의 바지 사이로 흘러내리는 노란 물이 보였다.
혈황은 경멸이 담긴 눈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쯧.”
그 모습에 혁련휘의 고개가 살짝 숙여지며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확인했다.
“어? 어어어.”
실어증에라도 걸렸는지 말을 하지 못했다.
혁련휘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눈과 코에서 주르륵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렸다.
혈황은 슬쩍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마치 더러운 것을 눈앞에 두고 피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칫 손을 더럽힐 뻔했군. 역시 복수는 본인이 해야지. 암!”
혈황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크아아아앙!
혈룡뿐만 아니라 청룡까지 튀어나와서 싸우고 있었다.
혈황은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혈룡과 청룡을 향해 외쳤다.
“이 똥개 새끼들아! 이제 그만해!”
* * *
전장 정리는 싸움이 끝날 때쯤 엄청난 굉음을 듣고 달려온 금의위가 맡았다.
청운을 대신한 혈황은 빠르게 전장을 수습하고 포로를 잡아들이라 명령을 내렸다.
자신이 혈황신공을 사용하는 걸 본 자는 모두 죽였다. 오직 둘만이 살아남았다. 포로로 잡힌 혁련휘와 무공 사부였다.
금의위에게 혁련휘와 무공 사부는 특별하게 다루게 했다.
한쪽에 서 있던 혈황의 몸이 흔들렸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몸 내부에 있던 뇌기가 다시 밀어내기 시작했다.
‘빅어먹을 놈. 실컷 살려주었더니 쫓아내려고 하네.’
순간, 부르르 떨리던 청운의 몸에서 혈황이 튕겨 나왔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청운이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대인!”
청운이 쓰러지는 것을 본 금의위가 급히 달려왔다.
“대인을 방으로 모셔라!”
금의위 두 명이 청운을 조심스럽게 들고 방으로 옮겼다. 누가 봐도 상세가 위중했다.
당황하기는 혈황도 마찬가지였다.
‘아, 제길… 내가 좀 과했나?’
뒤늦게 그는 자신이 기분에 취해서 너무 과도하게 공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청운의 몸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내상과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청운의 몸속에 잠재된 혈황신공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탈이 난 것이다.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간 혈황은 청운의 몸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푹 쉰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듯했다.
[쯧쯧, 허약한 놈 같으니라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청운을 내려다보며 혈황은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제자가 동네북처럼 처맞고 다닌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똑같은 몸으로 똑같은 적을 상대했는데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청운의 무공이 아직도 약한 것이다.
하긴 청마룡 다섯 마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아직은 혈황신공에 비빌 수 없었다.
[그래도 혈황신공이 운용되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진짜 죽을 뻔했어.]
혈황은 청운 곁을 지키며 앞일을 생각했다.
청운의 복수는 끝이 났다. 혁련종도와 혁련휘를 압송해서 참살하는 과정이 남았지만, 그 정도야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복수다.
보아하니 원수 놈들의 후예로 보이는 자식들도 음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긴 개가 개를 낳지 사람을 낳겠는가.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싹 쓸어버리고 말리라.
* * *
영풍장의 혈사는 많은 사람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진무사 이청운과 금의위가 영풍장을 멸문시켰다!
-영풍상단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리 많은 사람들을 죽였단 말인가!
처음에는 청운과 금의위를 성토하는 발언들이 들불처럼 퍼졌다.
무림맹 인사들은 당장 청운을 잡아서 황도로 압송해야 한다고 외쳤다.
강호풍과 팽도천, 남궁룡, 진설란 등 청운과 친한 사람들이 나서서 청운을 감쌌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곧 영풍장이 앵속을 전파한 주범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금의위가 증거까지 들이밀자, 성토하던 말들이 쏙 들어갔다.
청운을 잡아 죽일 것 같던 무림맹 인사들도 자신이 언제 무슨 말을 했냐는 듯 입을 닫았다.
청운이 깨어난 것은 그 직후였다.
청운은 사흘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한 표정이었다.
막 방으로 들어서던 의원이 상체를 일으킨 청운을 보고 득달같이 다가갔다.
“어이쿠, 일어나셨구만.”
맥을 짚고 상세를 살핀 의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날만 해도 그토록 약했던 맥이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내상 역시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거 내가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잠시 후, 웅천이 들어와서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청운은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일단 듣기만 했다.
“흑야대라 불리는 자들이 어디 소속이고,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붙잡힌 영풍장 인물들도 그들의 정체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청운의 몸을 빌린 혈황의 손에 의해서 흑야대는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몇몇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지만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대인, 송구한 일이 있습니다. 붙잡힌 자들 중 흑야대는 모두 자결을 했습니다. 대비하고 있었는데 송구합니다.”
흑야대 무인 중 붙잡힌 자들이 모두 자결을 하는 바람에 지키던 자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청운은 이마를 찌푸렸다.
패배 직전에 몰렸던 자신은 살아 있고, 영풍장은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그토록 강하던 자들도 모조리 죽었고.
거기다 혁련휘도 잡혔단다.
청운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생각하는 척하면서 혈황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혈황은 딴청을 피웠다.
[뭐가?]
-저는 분명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고, 저를 죽이려 했던 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혈황님이 아니면 누가 알겠습니까?
[네가 살았고,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됐지, 꼭 그 이유를 알아야겠느냐?]
-알아야 다음을 대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청운은 말을 던지고 혈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혈황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뒈지기 직전이 되니까 받아들이더라.]
청운은 그 말뜻을 곱씹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아마도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듯했다.
예상은 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다 끝나고 나니까 다시 쫓아내더군.]
그 점은 다행이었다. 계속 남아 있었으면 큰일 아닌가 말이다.
쓴웃음을 지은 청운은 다시 웅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되었네. 특수한 목적으로 키워진 자들의 입을 열기는 쉽지 않지. 그보다 영풍장은 어찌 처리했나?”
“예 대인, 영풍장 식솔 중 도망친 자들도 제법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상행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은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금의위를 파견해서 잡아들이라 명령을 내린 상태입니다. 그리고…….”
웅천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했다.
영풍장 혈사가 알려지면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일. 무림맹 인사들이 청운을 성토했던 일. 그리고 앵속을 증거로 내밀어서 상황을 무마시킨 일까지.
“이제는 진무사님 이름만 나와도 벙어리가 됩니다.”
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조용히 해결 되었다 하니 다행이었다.
“내가 부재중이었는데 일 처리를 잘했군. 그래 석 천호는 어디 있나?”
보고는 원래 석덕조가 해야 한다. 그런데 그가 보이지 않자 궁금함에 백호에게 물었다.
“천호장은 현재 식객으로 있던 자들을 추격 중입니다.”
“식객이라면 영풍장 내원에 있던 자들을 말하는가?”
“예, 대인.”
“석 천호에게 연락해서 무리하지 말라고 하게. 나에게는 그자들 열 명보다 석 천호와 자네들이 더 중하네.”
웅천은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대인.”
청운은 몇 가지 지시사항을 더 내린 후에 밖으로 나왔다.
영풍장은 여러 채의 건물이 부서지고 불탄 상태여서 흉물스러웠다.
일부 하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무너진 잔해를 치우느라 분주했다.
청운이 발길을 옮긴 곳은 내원에 자리한 연못가였다.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연못가에 자리한 전각에 오른 청운은 난간에 서서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없이 달려왔군.’
힘겹게 싸웠던 몇 달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어찌 되었든 불구대천지수인 혁련종도와 혁련휘를 모두 잡아들였다.
이제 혈황의 원수만 갚아주면 된다.
신비세력이 혈황과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목적도 알지 못했다.
‘무림 정복? 아니면… 황실 전복?’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아직 정체를 모르지만, 곧 알 수 있겠지.’
은밀하게 움직이던 놈들을 들쑤셔놓았다.
자룡궁을 처리했고, 하오문을 박살냈다.
그리고 영풍장에서 놈들의 주력으로 추정되는 자들과 한바탕 싸웠다.
‘이제 곧 또 다른 놈들이 움직이겠지.’
자룡궁은 오래전부터 자리한 곳이니 예외로 쳐도, 하오문은 급격히 세를 불린 곳이다.
하오문과 같이 두각을 보이는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 * *
일주일이 빠르게 흘렀다.
자룡궁의 일은 이제 청운의 손을 떠난 상태였다.
대신 무림맹이 뒤처리를 도맡았다.
청운은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순순히 넘겨주었다.
어차피 자룡궁에서 얻을 것은 대부분 얻었고, 더 이상 뒤처리에 매달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그에게는 신비세력이라는 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무림맹에 넘기는 대가로 자신에게 어떤 추궁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니. 손해라 할 것도 없었다.
자룡궁에서 손을 뗀 청운은 정보를 수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먼저 개방과 하오문에서 인연을 맺은 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포로로 잡은 자들을 직접 신문했다.
“하오문 쪽 소문을 들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목숨을 구하는 길인지 잘 알 거다. 살고 싶으면 아는 것을 말해라.”
청운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말했다. 적어도 함께 생활한 자들이니 오고 가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한 사람 한 사람 입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