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기대 반, 걱정 반. 가슴을 두근거리며 방문을 열고 들어선 백청청은 눈이 커져서 방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응?’
방안에 청운이 없었다.
“공자님께서 어디 가셨는지 아느냐?”
“이상하네, 아까까지 계셨는데.”
시비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 말에 백청청은 방안을 다시 살펴보았다.
분명히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방을 비운 지 오래되지 않은 듯했다.
한 시비가 백청청에게 말했다.
“아씨, 촛불이 켜져 있는 것을 봐서는 잠시 나가신 듯하오니 기다리시지요.”
“그래? 그럼 음식을 놔두고 가보아라.”
“예, 아씨.”
그렇게 시비가 나가자, 백청청은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서 청운을 기다렸다.
한편,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지붕 위에 한 인영이 우뚝 서서 자신이 방금 나온 방을 지켜보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 아이가 싫은 것이냐?]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백 소저가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많아서 여인을 곁에 둘 수가 없습니다.
[쯔쯔쯔, 이거 덩치 크고 무공만 강한 어린애가 따로 없군.]
-……혈황님.
요 며칠간 청운은 백청청의 애정 공세에 진땀을 흘렸다.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았기에 청운도 그녀를 멀리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녀의 애정 공세의 수위가 점점 올라가자 청운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어서 그녀가 올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며칠 그렇게 피한다고 피했는데 오늘은 작정하고 온 것 같았다.
우연히 시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다행히 피하긴 했는데, 서운해하지는 않을지 모르겠군.’
고개를 빼고 방을 쳐다보는 청운을 보며 혈황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놈아, 자고로 남자는 여자를 알아야 어른이 되는 법이다.]
-언젠가는… 그럴 때가 있겠지요. 좌우간 그러려면 빨리 복수를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볼 때 괜찮은 아이다. 그러니 한번 잘 생각해봐라. 집안도 좋고, 인물도 좋고, 무공이야 조금 부족하지만 내가 가르쳐 주마. 하하하.]
-하아, 그만 놀리시고 어서 움직이시지요.
깊은 한숨을 쉰 청운이 먼저 몸을 날렸다.
* * *
청운은 항주를 떠나서 남경으로 가려던 발길을 멈췄다.
관도를 통해 북상하던 중 하남 영성(永城)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금의위를 만난 것이다.
참으로 운이 좋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혹, 나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것이냐?”
“대인,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금의위는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청운에게 건넸다.
청운은 서찰을 펴서 읽고는 이내 금의위를 보며 물었다.
“그들의 일정이 한 달이나 당겨지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개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백살마녀 한란이 서둘러서 돌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좋지 않았다.
그녀가 급하게 돌아올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분명히 여러 곳을 들렀다가 오는 여정이었다. 그런데도 곧장 돌아온다는 것은 영풍장 소식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청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 정도면 하남성에 들어섰겠군.”
“예, 그들의 속도라면 영성까지 사흘 정도 남았습니다.”
청운은 빠르게 계산을 했다.
그녀가 가져오는 물품이 앵속인지 확인해야 한다. 또한 앵속 때문이든 아니든 자룡궁 배후의 신비단체가 움직일 가능성도 컸다.
‘남경왕부는 다음에 가야겠군.’
처음 계획은 남경에 들러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한 후 영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이 틀어졌다.
청운은 봇짐에서 긴 통과 종이를 꺼냈다.
통 안에는 먹을 갈아서 넣은 먹물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급할 때 사용하려고 가지고 다니는 물품이었다.
그는 종이를 펼치고 일필휘지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
글을 전부 적은 뒤에 인장을 꺼내서 한쪽에 찍었다.
“자네는 곧장 남경왕부로 가서 이왕야께 서신을 전하고 송구하다는 말씀을 올리게.”
“알겠습니다. 대인!”
금의위가 떠나고 청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혈황님. 하늘이 도왔습니다.”
[그렇구나. 자칫 길이 엇갈릴 뻔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서둘러 떠난 항주였다. 만일 그곳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었다면 이렇게 빨리 금의위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달리겠습니다.”
팟!
청운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림자가 잔상을 남기며 바람결에 흩어졌다.
◈ ◈ ◈
청운이 소식을 접하고 영성에 도착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안휘성 끝에서 끝까지 경공을 펼쳐서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 청운은 지친 기색도 없었다.
혈황은 청운의 경공 실력에 감탄하며 한마디 했다.
[네 녀석이 익힌 무공 가운데 경공이 제일이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청운은 혈황과 함께 공가장으로 향했다.
공가장 별채에는 개봉에 있던 금의위들이 돌아와 있었다. 지난 두 달간 용맹정진 했는지 제법 실력이 늘은 것처럼 보였다.
“대인, 어서 오십시오.”
“다행입니다. 이렇게 빨리 오시다니.”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청운은 금의위들을 치하하며 보고를 받았다.
“백살마녀가 박주에 들어섰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내일 오후면 이곳 영성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그래, 지난 두 달간 영풍장은 어찌하고 있었는가?”
전서구를 이용해서 중간중간 연락을 받았었다.
다행히 큰 변화는 없었지만 다시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드나든 일은 있었지만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드나든 자들 중에 처음 보는 자들이나 특이한 고수는 없었는가?”
청운의 물음에 웅천 백호가 한 발 나서서 대답했다.
“예, 개방에서 아쉽게도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마차를 타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아.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군.”
천하의 개방이라 할지라도 얼굴을 보지 못하면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직접 들어가서 몰래 확인을 할 수도 있지만, 개방 제자들의 실력으로 고수들이 포진한 영풍장에 침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그보다 내일 준비를 잘하도록 하게.”
“예, 대인.”
금의위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물러섰다.
청운은 공가장 별채를 나서서 백풍장으로 갔다.
백풍장에는 조광과 청운에게 구원을 받은 조씨 일가가 기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노역으로 몸도 마음도 망가진 상태였다.
백풍장에 도착한 청운은 곧장 조광을 볼 수 있었다.
“안색이 좋아졌구려.”
“모두가 대인의 배려 덕분이오.”
조광은 소수마공을 익히고 있어서 안색이 파리했었다. 청운이 한 가지 심법을 알려주었고, 그 심법을 익히면서 무너진 몸의 균형이 돌아오고 있었다.
‘혈황님이 알려주신 신공을 익히더니 많이 좋아졌군.’
청운은 조광의 변화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상단 일은 잘되고 있소?”
“가문의 어른들이 도움을 주고 있어서 몇 달 안에 괜찮은 결과가 나올 것 같소.”
“벌써 결과가 나온단 말이오?”
“예전 저희 백풍장과 연이 있던 상단들이 있소. 그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다행히 우리를 잊지 않고 있었소.”
백풍장은 십여 년 전만 해도 잘나가는 상단을 운영했었다. 그들과 거래했던 상단은 중원에 많았다.
더욱이 자룡궁에서 가져온 돈의 일부를 조광에게 맡긴 상태였다.
자본이 받쳐주고 거래처가 있으니 상단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고생이 많았소. 그래 필요한 것은 없소?”
“아직은 없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인께서 맡기신 돈을 크게 불릴 수 있을 것 같소이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오. 돈이란 건 쫓아가서 잡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게 해야 한다지 않소.”
“알겠소이다.”
백풍장 사람들마저 확인한 청운은 공가장으로 돌아왔다.
공가장 주인이었던 공야승은 다른 곳에 상행을 하기 위해서 떠난 상태였기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점심 무렵, 영성의 근교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열 대나 되는 마차가 길게 늘어서서 빠르게 이동했다. 중간쯤에는 휘장이 처진 마차가 있었고, 수십 명의 무사들이 호위하고 쟁자수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전진하는 길의 앞쪽에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내는 뇌신룡으로 역용한 청운이었다.
그는 무심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두의 수레가 어느새 청운 앞으로 다가왔다.
앞을 막아선 이가 뇌신룡인 것을 알아본 표사가 기겁해서 행렬을 세우고 중간에 있는 마차로 뛰어갔다.
마차의 휘장이 걷히며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인이 입가에 미소를 드리운 채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앞쪽에 서 있는 청운을 보더니 경공을 펼쳤다.
가볍게 청운 앞에 내려선 백살마녀 한란은 청운을 보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동생, 오랜만이야.”
“상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물론이지. 원래는 조금 더 시일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동생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지 뭐야.”
“영광입니다.”
뇌신룡으로 역용한 청운과 한란은 한가로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때 곁에 있던 혈황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함정인 것 같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저 뒤에 숨은 자들이 있구나.]
청운은 혈황이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한란의 두 눈에 빛이 번쩍이더니 금세 사라졌다.
청운은 담담한 시선으로 한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준비하신 게 있으신가 보군요.”
“동생이 나타날 것 같아서 선물을 준비했지.”
한란은 말을 함과 동시에 오른손을 들었다.
뒤쪽에 있던 표사 중 한 명이 품에서 호각을 꺼내 길게 불었다.
삐이익! 삐이익!
연이은 호각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려는지 저 멀리 뒤쪽에서 같은 호각 소리가 울렸다.
수십 명이 하늘을 날듯이 경공을 펼치며 날아왔다.
검은색 장포에 흑립을 쓴 자들이었다.
그들은 청운을 중심으로 넓게 포위하듯 내려섰다.
그 모습에 청운은 투덜거리듯이 한란에게 말했다.
“이거 선물이 과한 것 아닌가요?”
“호호호, 이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다니,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그만큼 자신이 있는 거야?”
“뭐, 둘 다라고 해두지요.”
척 보기에도 새롭게 나타난 자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선두에 선 다섯은 절정을 넘어선 자들이었다.
스르릉.
청운은 검을 뽑았다. 이미 자신이 올 것을 알고 함정을 팠다면 가볍게 상대할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란은 곧장 공격하지 않고 청운에게 질문을 했다.
“얘기는 들었어. 동생이 화산파와 영풍장 일에 나섰다고. 덕분에 동료 여럿이 죽었다지? 그 소식을 듣고 생각을 해봤는데 조금 이상하더라고.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 강호에서 은원이야 흔한 일이니까.”
한란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렸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재밌는 소문이 또 들리데. 그래서 그 빌어먹을 놈이 설치는가 보다 하고 서둘러서 돌아온 거야.”
“설친다는 자는 누구고, 어떤 소문을 들었습니까?”
“흐응, 별건 아니야. 우리와 거래를 하던 곳이 있었는데, 이청운이라는 관리에게 박살났대.”
한란은 콧소리를 내며 말하고는 청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청운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히 말했다.
“안타까운 소식이군요.”
“에이,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별거 아니라니까. 여기 오면서 생각했지. 혹시 그 관리가 우리도 습격하는 건 아닌가 하고,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무엇이 말입니까?”
“오라는 관리는 안 오고 동생이 나타났어. 내가 돌아올 시간은 한 달이나 남았는데.”
한란의 눈에 달렸던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이내 두 눈에서 흉흉한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