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93화 (93/257)

# 93

93화

사내가 기분이 상한 듯 청운에게 막 한마디 하려는데 청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논어 학이편에 보면 절차탁마(切磋琢磨)해도 부족한 것이 학문이라 했다. 고작 한 줌도 되지 않는 재주를 믿고 이런 패악질을 일삼는다면 전시에서 합격하지 못할 것이다.”

청운의 진심 어린 충고였지만 사내들에게는 서슬 퍼런 악담과 비난으로 들렸다.

역시나 조언 한 번에 머리를 조아릴 자들이 아니었다.

“이거 학식께나 있는 학사였군. 네놈은 누구냐?”

지목당한 사내가 여인의 손을 놓고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제법 반듯한 외모를 지닌 사내는 흥을 깬 청운을 향해서 이빨을 드리웠다.

청운 역시 오랜만에 학식 대결을 펼쳐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며 앞으로 나섰다.

“천학비재하여 알려줄 이름은 없다.”

“하하하. 뭐라? 천학비재? 하긴, 학문이 얕고 재주가 변변치 않으니 그리 말하는 것이겠지.”

사내는 청운이 자신의 학식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가지고 딴지를 걸었다.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한 청운은 곧장 말을 했다.

“이곳 항주 뇌봉서원은 추로지향으로 유명한 곳이거늘, 어찌 너희 같은 자들이 학사라며 스승과 서원을 욕보이는 것이냐?”

추로지향(樞路之鄕)은 예절(禮節)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르는 말로 뇌봉서원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청운의 말에 사내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금 우리 뇌봉서원을 비난한 것이냐?”

“하아, 네놈들에게 한 말이다. 학문을 익힌다는 자들이 그리 해석을 못한대서야. 쯧쯧.”

청운은 사내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자기들에게 한 이야기를 뇌봉서원 전체로 확대해석 하고 있었다.

아무리 해석은 하기 나름이라지만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자들이었다.

청운은 이해가 안 되었다.

‘이런 자들이 어찌 뇌봉서원에 입관할 수 있었지?’

뇌봉서원은 물론이고 중원 십대서원은 아무나 입관할 수 있는 서원이 아니다.

시험을 통해서 기재라 할 만한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중원 십대서원이었다.

으드득.

“이놈! 감히 스승님과 서원을 욕보이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결단코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 사내가 외쳤다!

족보도 모르는 놈이 무시하고 있으니 화가 치밀었다.

사내는 길길이 날뛰며 다시 외쳤다.

“이런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이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은 버려라!”

청운은 이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었다.

사내들이 방방 뛰며 청운을 금방이라도 죽이겠다며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못했다. 모두가 거인이라는 사내가 말렸기 때문이었다.

거인 사내는 청운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함부로 할 자는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학사의를 입은 것도 그렇고, 뇌봉서원의 이름이나 자신이 거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거나 뒷배가 든든한 것이 분명했다.

‘곤란하군. 느낌이 안 좋은데….’

그도 마음으로는 청운을 뭉개고 싶었지만 꺼림칙했다.

그렇다고 학식을 논하자니 자신들이 한 일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 가지뿐이었다.

언제나처럼 문제가 생기면 스승과 뇌봉서원의 위세를 이용했었다. 이번에도 이를 이용해서 청운을 압박하려고 마음먹었다.

“형장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뇌봉서원과 스승님들의 얼굴에 먹칠하고도 무사할 성싶소?”

중원 천지에 뇌봉서원과 그곳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님들을 무시할 학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청운은 얼토당토않은 그들의 말에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힘으로 안 되니 배경으로 상대를 겁박하려는 놈들의 수작이 가소로웠다.

자신이 다닌 천향서원은 중원 십대서원의 수좌를 다투는 서원이었고, 자신은 백년 만에 하늘이 내렸다는 삼원진사가 아니던가.

상종할 가치도 없는 자들이었다.

당장 치도곤을 내주고 싶었지만 뇌봉서원 얼굴을 봐서 이번은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놈들에게 붙잡혀 있던 여인도 청운 곁으로 와 있었고.

어린 몸종이 여인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허허, 그놈 참.’

마치 상전이 아랫사람을 달래는 듯한 모양새였다.

기특하기도 하고 깜찍하기도 한 여아라 생각했다.

이때 한 소리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예서 무얼 하는 것이냐?”

빙 둘러선 인파를 해치고 중년의 학사가 나타나서 호통을 쳤다.

그런 중년 사내를 보며 사내 중 한 명이 시큰둥한 소리로 말했다.

“스승님께서 여기는 어인 일이십니까?”

“네 녀석들이 또 사고를 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중이다.”

“저희가 어린애도 아니고, 어찌 이리 딱딱하십니까?”

“뭐라? 그게 스승에게 할 소리더냐?”

사내의 말에 스승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창피하게 왜 이러십니까? 송일이가 내달에 전시를 보러 황도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우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스승은 사내들 곁에 있는 묘령의 여인을 발견하더니 인상을 구겼다. 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분명히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를 가르쳤거늘, 어찌 짐승 같은 행동을 한다는 말이냐?”

“스승님,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갈! 내 이미 네놈들이 길거리에서 여인을 강제로 희롱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거늘, 어디서 거짓을 고하려는 것이더냐! 그 여인은 어디 있느냐? 당장 사죄하지 못할까!”

중년 사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일을 저지른 자들은 따로 있건만 스승이 더 부끄러워했다.

스승이라는 중년 사내는 고개를 돌려서 송일이라는 사내를 보더니 타이르듯이 말했다.

“송일아, 호학불권(好學不倦) 하지 않으면 수이부실(秀而不實)이라 했다. 배움을 즐겨 하지 않으면 자라나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이다. 어찌 학문에 일로매진하지 못하고 또다시 방황한다는 말이더냐?”

“스승님,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것뿐입니다. 그러니 이쯤 하시지요.”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다. 이대로 스승이 더 꾸짖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나쁜 인식이 더 나빠질 터였다.

스승 역시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얼굴이 붉게 변했다.

제자들의 건방진 태도를 가지고 일장 연설을 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참았다.

“당장 서원으로 돌아가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

송일은 청운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제 할 말만 하고 사내들이 몸을 돌렸다. 장내를 빠져나갈 때 염원형은 청운을 보며 머리를 조아렸다.

“뇌봉서원의 염원형이라 하네. 불민한 제자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을 텐데 내 이리 사죄하겠네.”

부모와 스승은 자식과 제자의 잘못 때문에 욕을 얻어먹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염원형은 좋은 스승이었다.

청운은 마주 포권하며 인사했다.

“염 스승님,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응? 나를 아는가? 그러고 보니 낯이 눈에 익군.”

염원형은 청운의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에게 배운 제자라면 금방 알아차릴 텐데 직접 배운 제자는 아닌 것 같았다.

이에 청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 년 전 여름에 개봉에서 뵈었었지요. 당시 염 스승님께서 논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이해주신 게 기억에 남습니다.”

“아! 그래 기억이 나는군. 천향서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지. 가만, 그럼 공자는 천향서원 학사인가?”

“예, 천향서원의 이청운입니다.”

“머, 뭐라? 이청…… 으하하하하!”

염원형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호방하게 웃으며 크게 기뻐했다.

그 웃음소리에 장내를 빠져나가던 사내들이 멈춰 섰다.

염원형은 이내 청운에게 다가와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정 공자가, 삼원 이청운이란 말인가?”

스승의 말에 그의 제자들이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굳었다.

“이, 이청운?”

“사, 삼원진사 이청운?”

“저놈이, 아니, 저분이 개봉 천향서원을 나오신 이청운 대인이시라고?”

쿵!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다리에 힘이 쑥 빠져서 후들거렸다.

학문을 공부하는 이들치고 삼원 이청운을 모른다면 학사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천재로 소문난 이청운이었다.

꿈에서라도 한 번 뵙고 자문을 구하고 싶은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사내들은 얼이 반쯤 나간 채 중얼거렸다.

“이제 우린 어쩌지?”

“아이고.”

털썩.

사내 중 한 명이 털썩 주저앉으며 통곡했다.

알량한 권세를 믿고 까불다가 끝장나게 생겼다.

적어도 뇌봉서원을 다니려면 향시까지 기본적으로 합격한 자들이었다. 앞날이 탄탄했는데 진창길로 바뀌었다.

이들의 앞날에 태산이 생겨났으니 앞이 캄캄했다.

염 스승은 그런 제자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청운을 만난 기쁨도 잊고 다시 청운에게 사죄했다.

“내가 잘못 가르쳐서 생긴 일이네. 어려운 부탁인 걸 알지만 나와 뇌봉서원의 얼굴을 봐서 저들을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별일 아니었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청운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이내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다음에 뇌봉서원을 찾아가기로 약속을 했다.

사내들은 어느새 스승 곁으로 와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청운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사내들에게 말했다.

“내 마지막으로 충고 한마디 하겠네. 옥불마무광이라 했네. 옥은 갈지 않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 거라 생각하네. 그러니 부디 학문에 더욱 힘쓰게.”

옥불마무광(玉不磨無光)은 뛰어난 소질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학문과 수양을 쌓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사내들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연신 청운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그들과 헤어진 청운은 곁에 남겨진 여아와 여인에게 물었다.

“댁이 어디신지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제(白堤)의 내서호 입구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묘령의 여인은 눈을 빛내며 청운에게 인사를 했다. 곁에 있던 여아는 신이 나서 청운에게 재잘거렸다.

“공자님, 엄청 유명하신 분인가 봐요?”

“그렇지는 않단다.”

“그런데 그 불한당들이 공자님 이름을 듣고 왜 꼬리를 말아요?”

“하하, 그들의 스승님과 내가 인연이 있어서 그리된 것이지. 내가 대단한 것은 아니란다.”

“그렇구나. 근데 삼원은 뭐예요?”

“흠. 별거 아니란다. 그보다 너는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설란이에요. 주설란.”

“예쁜 이름이구나. 나는 이청운이란다.”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이청운은 하마터면 대소를 터트릴 뻔했다.

혈황이 히죽히죽 웃으며 주설란의 볼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이 녀석, 진짜 귀여운데?]

* * *

며칠이 더 흘렀다.

청운과 백가장이 나서자 항주에서의 일도 마무리가 되어갔다.

청운은 내친 김에 소주의 하오문까지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 여유가 없었다.

원행을 떠난 한란이 돌아올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사위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시각.

사락, 사락.

옷깃 끌리는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웠다.

잠시 후, 청운이 기거하는 곳에 한 여인이 시비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백청청이었다.

그녀는 무복을 벗어 던지고 너풀거리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껏 멋을 내고 입지도 않던 옷까지 갖춰 입은 그녀가 손수 만든 음식을 가지고 청운을 찾아온 것이다.

그녀를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랄 일이었다.

‘이 공자께서 내가 만든 요리를 좋아하실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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