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화
소흥을 지배하던 하오문의 멸문이 몰고 온 바람은 항주를 비켜 가지 않았다.
항주에 남아 있던 하오문도들이 숨을 죽였다.
기세가 오른 건 흑검방이었다.
전통 흑도 인물들답게 거침없이 일을 벌였다.
하오문이 운영하는 점포를 찾아가서 온갖 패악질을 서슴지 않고 벌였다.
기물을 부수고 점원을 희롱하며 손님들을 내쫓았다.
하오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행보였다.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어서 고개를 숙이라는 압박이었다.
하오문은 관청에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누구 하나 그들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청운의 권세와 백가장 출신 무장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도 사방에서 잘 부탁한다는 서찰이 날아들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청운의 존재가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하남성에 있다고 알려진 청운이 어느새 이곳에 나타나서 제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휘하 금의위가 아닌 강서백가를 이용한 움직임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특히 칠왕야와의 담판은 관리들 사이에서 주로 퍼졌다.
덕분에 혈겁을 일으킨 백가장의 죄를 묻기보다는 가족의 복수로 미화되었다.
설명을 다 들은 청운은 흡족한 얼굴을 하는 장준에게 말했다.
“백가장 일이 마음에 걸리니 한 가지 소문을 내줘야겠다.”
“무엇이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청운은 백가장 일을 더욱 미화시키라고 지시했다.
장준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대인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러실 줄 알고 이미 소문을 내고 있었습니다.”
“호, 그래?”
“예, 척하면 척 아니겠사옵니까.”
백가장 소문이 혈겁이 아닌 복수로 보이게끔 만든 것이 장준이라니, 의외였다.
“잘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더욱 소문을 퍼트리거라.”
“예, 대인.”
청운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준이 눈치가 빠른 것은 알았는데 이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갈 줄은 몰랐다.
* * *
늦가을이다 보니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서호의 두 제방 중 하나인 소제(蘇堤)에 학사의를 입은 사내가 걷고 있었다.
한 자루 섭선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이곳 서호의 가을은 물푸레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호면에 흐른다. 난과 국화가 피어나서 천하 절경을 이루기에 시인 묵객이 많이 찾았다.
저 멀리 단교잔설(斷橋殘雪)이라 불리는 곳이 보였다.
겨울에 눈이 녹으면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곳이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군요.”
사내의 입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는 나들이를 나온 청운이었다.
잠시 짬을 내서 이곳 서호에 바람을 쐬러 나왔다.
너무 많은 이들을 죽였기에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심지어 영풍장에 있는 혁련휘를 처단하는 일조차 급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두세 달 사이에 강호를 이렇게 뒤집어 놓은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놈들이 서서히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늦군요.”
[지금이 좋은 줄 알아라. 놈들이 나타나면 쉴 시간도 없을 테니까.]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가 봅니다. 얼마 전만 해도 관리가 되어 가문을 일으키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관리라는 게 참 사람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킁, 조금만 더 지나면 산속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겠다고 하겠구나.]
“혁련종도와 혁련휘를 압송해서 참수하고 혈황님의 복수를 해드리고 나면 태행산으로 들어가서 몇 년 쉴까 생각 중입니다.”
[세상이 너를 놔주지 않을 거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이제 스물한 살인 놈이 별걱정을 다하는구나. 헛소리 말고 운공이나 열심히 해라. 지금 실력으로는 천위대 천주 같은 놈이 둘만 나타나도 꼼짝없이 목을 내놓아야 할 거다.]
“예, 열심히 해야지요. 그런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무, 무슨 말이냐?]
“요즘 말씀하시는 게 부쩍 줄어드신 거 같아서요.”
[그거야 네가 혼자서도 잘하고 있으니 내가 참견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청운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혈황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뭔가 이유가 있다면 언젠가는 말해주지 않겠는가.
“흐음, 저쪽으로 가보지요. 나온 김에 바람이나 실컷 쐬고 들어가야겠습니다.”
혈황은 슬쩍 청운의 표정을 살피고 뒤따라갔다.
‘아직은 이놈이 알아선 안 돼.’
서호는 서호십경이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항주의 자랑이었다. 그 경치를 눈에 전부 담을 수는 없었다.
계절마다 새로운 절경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청운은 한참 동안 서호 주변을 돌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당장 비키지 못하겠어요?”
“어허, 누가 길을 막았다고 그러시오?”
잠시 귀를 기울였던 청운은 젊은 남녀가 어울리는 소리에 피식 웃음 지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보니 청춘남녀의 실랑이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청운이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는데 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공자들에게 볼일이 없으니 그만 비키세요.”
“소저, 그러지 마시고 잠시 시간 좀 내주시오.”
“아씨가 싫다는데 왜 자꾸 이래요? 당장 비켜요!”
“어허! 아랫것은 저리 비켜라. 네 상전하고 이야기하고 있지를 않으냐?”
“뭐예요?”
“소저, 그러지 마시고 우리랑 뱃놀이나 합시다. 이 청명한 날에 뱃놀이만큼 좋은 것도 없다오.”
청운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한 여인이 몸종으로 보이는 여아와 함께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묘령으로 보이는 여인은 어쩔 줄 몰라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어린 여아가 이리저리 여인을 보호하듯이 돌며 사내들을 밀쳐내기 바빴다.
“감히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이리 무례하게 군단 말이에요.”
“하하하, 어린 계집년이 앙칼지구나. 우리도 낮은 신분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너는 비켜 있어라.”
“어어어.”
꽈당.
한 사내의 손길에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서던 여아가 바닥에 넘어졌다.
묘령의 여인은 깜짝 놀라서 여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앞을 막아서는 사내들에게 제지당했다.
“소저, 몸종은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는 뱃놀이나 합시다. 하하하.”
“소저, 함께 갑시다. 이 좋은 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 아니겠소.”
사내들은 여인을 몰아붙였다.
여인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덥석.
“자자, 그만 갑시다.”
“꺅!”
끝내 손목을 잡힌 여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서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혀를 찼다.
“쯧쯧. 저 못된 놈들이 또 지랄하는군.”
“어쩌자고 저런 개망나니들 눈에 들어서는.”
“한동안 조용하더니 또 시작일세.”
안타까운 탄성이 주위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누구도 앞에 나서서 도움을 주는 이는 없었다.
사내들이 가진 힘이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어서 아씨를 놔줘요!”
여아가 사내들에게 달려들었지만, 사내들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니 근데, 이년이 주제도 모르고 누구에게 달려들어!”
일행 중 한 사내가 여아에게 발길질했다.
퍽!
여아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살짝 들렸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사람들이 눈살을 찡그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여아는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웬 학사가 여아를 안아 들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뭐여? 언제 나타난 거여?”
“왕 씨, 봤어?”
“그게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났는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구경꾼들이 자신의 눈을 의심할 때 사내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아에게 말했다.
“괜찮으냐?”
“앙앙, 아파요.”
사내의 발길질에 가슴을 얻어맞았다.
사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일 무공을 익힌 자가 발길질을 했다면 여아는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수도 있었다.
우웅.
청운은 급히 여아에게 내공을 흘려 넣었다.
따스한 기운이 등에서 전해지자 가슴을 짓누르던 통증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여아의 찡그렸던 두 눈이 동그라졌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인 여아가 청운을 올려다보더니, 아픈 것도 있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아! 잘생기셨네요.”
“하하, 고맙구나.”
여아는 가벼운 타박상이어서 잠깐의 진기요상으로도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청운은 여아를 내려놓았다.
“호위 없이 둘이 온 것이냐?”
“아 참! 예, 제가 우겨서 몰래 나왔어요. 잘생긴 공자님, 우리 아씨 좀 도와주세요.”
“흠, 원래는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이것도 인연이니 이번에는 도와주도록 하마.”
“정말이세요?”
“그래, 대신에 다음부터는 호위도 함께 와야 한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여아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혀를 쭉 내밀었다. 청운은 아이가 무척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청운과 여아가 잠시 이야기를 나눌 때 사내들은 이미 저만치 이동한 후였다.
여인은 안간힘을 쓰며 따라가지 않으려 했지만 사내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멈춰라!”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여인을 끌고 가던 사내들의 귓가에 충분히 들릴 만한 소리였다.
사내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여아는 서둘러 청운의 등 뒤로 돌아가서 고개만 삐죽 내밀며 한마디 했다.
“네놈들은 이제 다 죽었어!”
청운은 그런 여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아는 헤헤 웃음으로 답했다.
청운은 다시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내들을 보았다.
넷이나 되던 사내 중 한 명이 청운에게 몸을 돌려서 말했다.
“우리를 부른 것이냐?”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인지 알았더니 다행히 말귀는 알아듣는군.”
청운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자신들을 짐승에 비유하다니.
그러나 청운이 고급스러운 학사의를 입고 있기에 무작정 달려들 수도 없었다.
“겁 없는 놈.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백주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을 보니 명가의 후손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알아야 하느냐?”
청운은 이들의 정체가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다.
주위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뇌봉서원 학사들이다. 저기 있는 저분은 이번에 진사가 되실 분이시다.”
“아! 항주 뇌봉서원.”
청운은 뇌봉서원을 알고 있었다.
중원 십대서원 중 하나인 뇌봉서원은 항주 서호 주변 뇌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래전 한림원주를 지낸 사영철 원주가 세운 유서 깊은 서원이었다.
“알아보는구나. 그렇다면 우리 서원이 지난번 전시에서 진사가 셋이나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예의 사내는 득의한 표정으로 청운에게 말했다.
한 서원에서 진사가 셋이나 나왔다면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모르고 있었다. 그 전시에서 장원을 한 인물이 청운이라는 것을.
청운은 사내를 보며 물었다.
“뇌봉서원의 학식은 익히 알고 있다. 지난번에 세 명의 진사가 나온 것도 알고 있고, 그런데 그것과 지금 네놈들이 하는 행동과 무슨 상관이냐?”
“쯧쯧.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이번 전시에서도 우리 서원에서 진사가 나올 것이다. 그중 한 명이 저기 있는 우리 거인 친우라는 말이지. 으하하하.”
사내는 짐짓 호방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내의 지적을 받은 사내는 거만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지방시험인 향시를 합격하고 다음 시험인 회시에 붙으면 거인이라는 칭호를 내려주고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황제가 주관하는 전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전시에 합격한 자를 진사라 불렀다.
청운은 사내들의 행동에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 거인이라는 자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동무들과 어울려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좋으나 패악질이라니, 그런 마음으로 진사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청운의 탄식에 지목받은 사내의 검미가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