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91화 (91/257)

# 91

91화

청운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왕야를 호위하고 왔다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 하거늘, 그런데 자신을 모른 체하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평소라면 왕야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들을 그냥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남경왕부와 관계가 앞으로 평탄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혈황의 말대로 한번은 제대로 혼을 내줘야 차후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청운은 무장을 내려다보며 냉랭히 말했다.

“지금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항주에서 연락을 받고 왕야를 호위해서 오는 길입니다.”

청운과 백가장이 소흥을 피로 물들일 때 하오문이나 천위소에서 구원을 요청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항주에 있던 왕야가 달려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도 문제가 있었다.

“북진무사에 속한 금의위는 위소에서 대기하라는 황명이 있었을 텐데, 어찌 왕야를 호위하고 이곳까지 온 것이냐?”

“그것이…….”

무장은 청운의 추궁에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운의 말대로 일반 금의위와 북진무사에 속한 금의위는 하는 일이 조금 달랐다.

기본적인 일은 둘 다 비슷했지만 이들은 특수한 임무를 수행한다.

북진무사에 속한 다섯 위소의 금의위는 진무사가 임무를 띠고 움직이면 위소에서 대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목이 거북 목처럼 푹 들어간 무장이 주천옥을 힐끔거렸다.

순간, 청운이 그의 앞으로 훌쩍 몸을 날리더니 그대로 발을 뻗었다.

퍽!

무장이 뒤로 훌훌 날아가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감히 상관을 무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다니!”

꿈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무장이 바짝 겁을 먹고 변명했다.

“그게 아니라, 저는 왕야를…….”

어느새 그의 앞으로 갔는지 청운이 재차 그의 가슴을 찼다.

펑!

무장이 떼굴떼굴 이 장이나 굴러갔다.

“일어서라! 엄살을 피우면 목을 치겠다!”

스릉!

청운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소리치고 검을 뽑자, 무장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청운이 그에게 검을 내밀며 물었다.

“그대 상관은 누군가!”

“그… 북진무사님이십니다!”

“그대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겼다! 인정하느냐!”

“요… 용서를…….”

갑작스런 상황에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주천옥이 다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진무사! 이게 무슨 짓인가?”

“보시다시피, 황명을 어긴 자를 추궁하고 있습니다만.”

주천옥도 그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호위를 부탁했네.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황족에 대한 호위는 요청에 따라서 금의위가 해야 한다는 것을.”

맞는 말이긴 하나 조금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왕야 말씀이 맞사옵니다. 황족에 대한 호위는 금의위가 해야지요. 그러나 이들이 아닌 남진무사 소속의 금의위에게 호위를 맡기셨어야 했습니다.”

청운은 왕야를 똑바로 보았다. 불경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이미 칼자루는 청운에게 있었다.

왕야는 자신을 호위하고 온 금의위들을 도와주려다가 낭패를 당했다.

그의 안색이 붉게 상기될 때, 청운이 바짝 긴장한 무장들을 둘러보며 다그쳤다.

“네놈들이 감히 황명을 거역하다니, 모두 죽고 싶은 것이냐!”

청운의 다그침에 주위가 싸늘하게 식었다.

주천옥이 서둘러 청운의 말을 막았다.

“진무사! 지나치지 않은가? 지금 내 앞에서 뭐하자는 것이야?”

“왕야, 황명을 어긴 자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볼 때는, 나 때문에 생긴 불만을 저들에게 푸는 것처럼 보이네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일은 왕야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

또다시 청운은 주천옥과 선을 그었다.

그가 연루되면 될수록 일이 복잡해지고 말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황제의 동생 아닌가.

주천옥도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정말 나와 끝까지 대적하겠다는 것이냐?”

주천옥은 내공까지 끌어올리며 청운을 압박했다.

그는 학사 출신의 청운을 얕보고 있었다.

소문은 거창한 고수라 알려졌지만, 설마 학사 나부랭이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랴 싶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청운은 화경에 이른 고수였다.

청운은 손짓 한 번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공격을 흩트리고 주천옥의 눈을 직시했다.

거꾸로 숨이 턱 막힌 왕야의 눈빛이 흔들렸다.

소문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축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청운이 그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왕야, 이번 일은 상당히 복잡하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역모가 될 수도 있사옵니다.”

“여, 역모? 미쳤느냐!”

“하오문은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저를 수차례에 걸쳐서 공격했사옵니다. 그런 그들을 비호하는 이곳 천호소의 모든 관리를 추국할 생각입니다.”

주천옥은 금의위 문제를 거론하다가 난데없이 천호소를 걸고넘어지는 청운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비약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그리고 자네가 받은 황명은 하오문과 관련이 없을 텐데.”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저기 쌓인 물건은 앵속이라는 물건이옵니다. 저 물건은 역모에 관련된 자들이 제국을 망치려고 유통하는 물건이옵니다.”

“뭐라? 앵속이 제국을 망쳐?”

청운은 왕야의 말속에서 그가 앵속을 이미 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앵속이 어떤 요물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청운은 앵속의 폐단(弊端)을 말하며 위험한 물건임을 알렸다. 더욱이 하오문이 이를 유통하며 소흥과 항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도 말했다.

“그래서 제가 조사차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런 저를 하오문이 공격한 것입니다. 제가 행한 일은 모두 황명에 따른 결과이옵니다.”

“끄응.”

주천옥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청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청운의 말에는 명분이 있었다. 자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명분이었다.

물론 자신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려면 남경왕부에 와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청운에 비해서 명분이 부족했다. 더욱이 자신은 남경왕부를 책임지고 있는 이왕야가 아니었다.

‘형님이 나설 일이군.’

주천옥은 자신이 청운을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천호소와 금의위가 다치게 둘 수는 없었다.

“그건 그대 생각이고, 이들을 처벌하려면 남경왕부로 와서 정식으로 항의하게. 그전에는 저들의 털끝 하나도 건들 수 없음이야.”

주천옥의 말은 떼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족 특유의 강짜였다.

청운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면 자신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황족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자신에게 무례를 범한 자들은 시간을 두고 죗값을 받게 하면 되었다.

“왕야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사옵니다. 다만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청운이 끝까지 막 나갔다면 곤란한 건 왕야였다.

다행히 청운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문제는 뒤에 붙은 단서였는데 찜찜한 기분이었다.

청운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왕야에게 전음을 보냈다.

-별거 아닙니다. 그저 이들을 추국하고 벌을 주는 일은 진무사 권한이라는 것만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만, 저에게는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황금인장이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이제야 드리는지 왕야시라면 잘 아실 것입니다.

“아!”

주천옥은 청운의 전음에 탄성을 터트렸다.

정말 황제의 인장이 있다면 왕야인 자신조차 청운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미리 밝혀서 자신을 압박하지 않았다는 건, 청운이 자신의 체면을 세워줬다는 뜻이었다.

학사 출신답게 꼬장꼬장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내 오늘 일은 잊지 않겠네.”

청운은 주천옥과 금의위를 돌려보냈다.

주천옥도 일절 토를 달지 않고 떠나갔다.

문제는 이곳 천호소였다.

이미 왕야 앞에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치하던 청운을 모두가 본 터였다.

귀가 따갑게 들었던 소문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천호 주만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저 칠왕야와 함께 떠나버린 금의위들이 부럽기만 했다.

청운은 천천히 몸을 돌려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천호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두려웠던지 천호장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인! 죽여주십시오!”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게. 기왕이면 방음이 잘된 곳이 좋겠지.”

청운의 목소리가 어찌나 차가운지 주만은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 * *

소흥에서의 일은 빠르게 처리되었다.

청운은 제일 먼저 백가장 사람들에게 인편을 보내서 천호소로 불렀다.

백가장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을 죽일지 모를 일이었다.

백가장 무인들이 천호소로 몰려온 뒤 청운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소흥에 남아 있는 하오문을 일망타진하기로 합의했다.

대신 이번에는 죽이지 말고 잡아 오기로 했다.

“피는 이미 많이 봤습니다. 남은 이들은 잡아서 추국하고 죄를 묻겠으니 이만 검을 거두시지요.”

청운의 제안을 백영상이 받아들였다.

천호소에서 벌어진 일을 그도 알고 있었다. 칠왕야까지 달려왔다가 청운에게 막혀서 돌아갔다고 했다. 그 와중에 청운이 백가장 편을 들어주었다고 했다.

당분간은 청운의 뜻에 따라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백가장 무인들은 잔당을 잡기 위해서 병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아직도 소흥에는 하오문 고수들이 남아 있었지만 백가장 무인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하오문 천위대가 대향림에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자 백가장을 견제할 힘이 없었다.

결국 칠 주야 동안 소흥에서 하오문이 쓸려나갔다.

추국장에서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죄가 무거운 자들은 일반 문도라 할지라도 죗값을 받아야 했다.

아직도 숨어 있는 하오문 문도들이 있겠지만 겉으로 볼 때 일망타진되었다.

남은 일은 억울하게 납치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이들의 처우였다.

청운은 압수한 하오문 재산을 그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 돈은 너희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될 것이다.”

“대인, 감사하옵니다.”

“고향에 돌아가거든 잘살도록 하고 혹 고향에서 살기 어렵다면 항주 흑검방이나 개봉 흑검방을 찾아가라. 그곳이라면 너희들에게 새로운 안식처가 될 것이다.”

이곳으로 온 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고향에 돌아가서 이곳보다 못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도 된다는 희망을 안겨주고 그들을 떠나보냈다.

대부분이 떠나갔지만 남은 이들도 있었다.

오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차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사연이 있었다.

청운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마음먹고 물었다.

“그대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저희는 고향이 없거나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청운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들에게 물었다.

“좋다. 그럼 어찌 살 것인지 생각해 둔 게 있느냐?”

“저희끼리 의지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어디가 좋겠느냐?”

“어디든 대인께서 정해주시는 곳으로 가겠사옵니다.”

청운은 대표로 이야기하는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항주도 괜찮지만, 차라리 먼 곳에 있는 하남성 개봉이 좋겠다. 그곳으로 가서 지난 일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라.”

털썩, 엎드린 여인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대인, 이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청운은 그들에게 사람을 붙여서 개봉으로 보냈다. 흑검방에 그들을 돌봐주라는 서찰도 써주었다.

그것으로 지난날의 아픔을 모두 씻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앞으로는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소흥에서의 일이 일단락되자 청운은 백가장 무인들과 함께 곧장 항주로 향했다.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모두가 무공을 익혔기에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서 도착할 수 있었다.

흑검방 항주 지부에 들어선 청운은 그간 항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흑검방주 장준에게 보고받았다.

“특별한 일은 없었느냐?”

“왜 없었겠습니까. 대인의 소문으로 항주가 떠들썩합니다.”

“소흥에서의 일 때문이냐?”

“예, 강서백가와 함께 소흥을 갈아엎었다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습니다.”

장준은 신나서 청운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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