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모두의 시선이 청운에게 모였다.
돈을 나눠주던 자들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이를 보고 청운이 힐난하듯이 말했다.
“네놈들에게 한 말은 아니다. 그러니 하던 일을 해라.”
“감사합니다. 대인!”
“어서 줄을 서라! 돈을 받아가야 할 것 아니냐!”
“거기 눈치 보지 말고 어서 와서 돈을 받아가!”
청운의 외침에 반발하는 자들은 없었다.
하오문 안방이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건만 누구 하나 막아서는 자는 없었다.
이쪽을 보며 멀리서 기웃거리던 자들은 보이는 족족 청운이 쏘아낸 지풍에 머리가 박살 났다.
모두 하오문 고수들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그들은 더욱 접근하지 못했다.
청운은 넓게 기감을 펼쳤다.
빈민가를 전부 살필 수는 없었지만 제법 넓은 곳까지 살폈다.
수십 수백의 무인들이 뭉쳐 있는 게 느껴졌다.
이곳으로 들이닥칠지, 아니면 청운의 말대로 도망칠지 고민하는 듯 망설이고 있었다.
팟!
청운은 망설임 없이 그들이 모인 곳으로 경공을 펼쳤다.
순식간에 청운은 그들이 모인 곳 옆의 건물 지붕 위에 내려섰다.
그들을 보며 다시 사자후를 터트렸다.
“두 눈으로 확인하라! 황명의 지엄함을!”
우르르르릉!
콰과과과광!
청운은 망설이지도 않고 검을 휘저었다.
뭉쳐 있던 자들을 향해서 살수를 펼쳤다.
일검에 서너 명의 목이 잘렸다.
일권에 십여 명이 휘말려서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한번 펼친 살계는 멈추지 않았다. 살겠다고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했다.
슈슈슈슉.
그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청운의 검풍에 몸이 잘려나갔다.
학살이었다.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청운은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에게 베풀 자비는 청운에게 없었다.
모두가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도 있었다. 굳이 다 죽일 필요는 없었다.
청운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런 학살을 벌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내세에서는 금수가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라.’
청운은 그들의 명복 아닌 명복을 빌어주며 몸을 돌렸다.
경공을 펼쳐서 다시 곡물상회 앞 공터에 내려섰다.
도망친 자는 없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청운과 저 멀리에서 들린 폭음에 이곳에 있던 무인들의 두 다리가 얼어붙어 있었다.
청운은 그들을 무시하며 다시 사자후를 터트렸다.
“보았느냐? 황명의 지엄함을! 악행을 벌인 하오문도는 살고 싶다면 도망쳐라! 끝까지 황명에 맞서려 한다면 그때는 한 놈도 살려두지 않고 추격해서 목을 칠 것이다!”
추상같은 외침에 빈민가가 부산스러워졌다.
그래도 남아서 눈치를 살피는 자들이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청운은 다시 사자후를 터트렸다.
“억울한 자! 납치되어 끌려온 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자! 모두 이곳으로 오라! 내가 너희를 집으로 보내줄 것이다! 이는 나 이청운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뜻밖의 말이 빈민가를 휘감았다.
청운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같은 내용을 외쳤다.
얼마나 외쳤을까?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여인들이었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부터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온 여자도 있었다.
청운은 그들이 모두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라 생각했다.
‘하아, 이들 말고도 더 있겠지?’
어쩌면 어딘가에 감금된 자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분명히 매음굴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있다고 했었다.
그들은 감금되어 있기에 이곳으로 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금의위들을 대동하고 왔어야 했다. 아니면 병사들이라도 거느리고 왔어야 했어.’
손이 부족했다. 소흥 가운데 이곳 빈민가만 살펴도 벌써 수십 명이나 몰려왔다. 제대로 살핀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위소의 병력을 이용하면 될 것 같은데…….]
혈황의 말에 청운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곧장 은전을 나눠주는 한 사내를 불렀다.
“너.”
“예? 저 말씀이시옵니까?”
은전을 나눠주면서 청운의 눈치를 살피던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청운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급하게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려고 미리 준비하고 다니는 명령서였다.
명령서에는 진무사의 인장과 말을 전하는 이의 명령을 따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청운은 사내에게 명령서를 쥐어주며 명령을 내렸다.
“소흥 위소로 달려가서 이것을 전하고 병사들을 끌고 와라.”
“알겠습니다.”
사내는 곧장 대답했다.
청운은 사내의 눈빛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도망치려는 모양이군.’
이 살얼음판 같은 곳을 벗어날 좋은 기회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청운의 이어지는 말에 사내는 생각을 달리했다.
“병사들을 이곳으로 데려온다면 은자 천 냥을 주마.”
“예? 은자 천 냥요?”
사내는 엄청난 금액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청운은 품속에서 천 냥짜리 전표를 꺼냈다.
그러고는 한가운데를 반듯하게 잘라서 한 쪽을 사내에게 건넸다.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면 이 반쪽을 마저 주겠다.”
엉거주춤 전표 반쪽를 받아든 사내는 누가 뺏어갈세라 얼른 품속에 전표를 넣고, 청운의 손에 들린 전표 반쪽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소인이 한달음에 다녀오겠습니다.”
사내가 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가 사라지자 청운은 자신의 말을 듣고 모인 이들에게 말했다.
“잘 왔다. 거기 너와 너는 이들을 안으로 들여서 쉴 수 있게 해라. 시체도 한쪽으로 치우고.”
은전을 나눠주던 자 중 한 명이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곡물상회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안에는 치우지 못한 시체가 많았다. 아니 치울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밖에 새워둘 수는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돈이 바닥 날 때까지 은전 나눠주기는 계속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들 역시 하나둘 더 모여들었다.
이곳을 염탐하기 위해서 위장을 하고 온 자는 청운이 단칼에 목을 베었다.
전부 솎아낼 수는 없었다. 무공이 강한 자들과 살기가 짙은 자들 위주로 손을 썼다.
그 바람에 살아남은 하오문도들은 이곳으로 오지 못했다.
근처로 모여든 하오문도들이 있다면 어느새 청운이 달려가서 모조리 박살을 냈다.
그렇게 두세 번 이어지자 더 이상 얼쩡거리는 자가 없었다.
척척척척.
“비켜라! 어서 길을 비켜라!”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운은 그들이 하오문도가 아닌 소흥 위소의 병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무장을 한 수십 명의 병사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병사들을 데리러 달려갔던 사내가 청운 앞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대인, 여기 병사들을 데려왔습니다.”
청운은 사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손에 쥔 전표 반쪽을 건넸다.
일에 대한 대가였다.
사내를 보내고 병사들을 둘러본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헐떡이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어찌 이런 자들이 병사란 말인가?’
너무도 허약한 모습이었다. 이곳까지 병사들을 데려온 사내가 훨씬 강해 보였다.
황당했지만 그들을 허리춤에 매 진무사 패를 보여주었다.
황금패를 확인하자 맨 앞에 무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군례를 올렸다.
“대인! 소장 소흥 천호소의 이왕신 백호이옵니다.”
“오느라 고생했네.”
청운은 이왕신 백호를 보았다.
이류 무인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딱, 지방 백호장 실력을 지닌 그는 덩치가 산만 했다.
외공을 익혔는지 몸이 단단했다.
청운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병사 반은 나를 따라 움직인다. 나머지 반은 자네가 통솔하고, 여기 있는 자들이 사람들에게 은전을 나눠주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게.”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말 그대로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사람들을 돕도록 하게.”
“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청운은 몸을 돌려서 떠나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그런 청운을 보며 그가 다시 말했다.
“대인, 이곳은 소흥입니다.”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청운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다시 말했다.
“대인, 이곳은 남경왕부 관할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래서냐니요? 대인, 왕부에 허락을 맡으시고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청운은 그제야 이왕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절강성과 강소성은 남경왕부 관할이었다.
자신이 황제의 명령을 받았어도 이곳에서 활동하려면 남경왕부 왕야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왕신의 말은 예의를 갖추는 일이지 절대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사실 청운도 처음 이곳에 올 때 남경왕부에 먼저 들렸었다. 왕야께 인사를 하고 움직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하오문 문제 때문에 후일을 기약했다.
문제는 이왕신의 태도였다.
일개 백호장이 청운에게 직언을 올릴 사안은 아니었다.
청운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왕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청운이 말했다.
“이보게 이 백호. 자네 무언가 크게 잘못 알고 있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황제의 명령을 받은 진무사는 황족도 조사할 수 있다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까?”
황망한 소리에 이왕신은 깜짝 놀라며 청운에게 물었다.
청운은 그가 놀라건 말건 사실을 알려주었다.
“제국법이 그렇다네. 그래서 황족과 관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진무사지.”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부드럽지 않았다.
잠시 청운의 얼굴을 보던 이왕신은 이를 악물었다. 억울하다는 표정과 알 수 없는 반감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청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명백한 도전이었다.
일개 지방 천호소 백호장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는 진무사에게 대들고 있었다.
청운은 그가 왜 이러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소장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곳 소흥은 왕야께서 특별히 신경 쓰는 곳입니다. 진무사께서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 곳이 아닙니다.”
“하하하. 자네는 황제의 병사가 아니라 왕야의 병사였군.”
청운은 이왕신의 말에 크게 웃었다.
충언이라면 말단 병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충언이 아닌 경고를 하고 있었다.
무림 출두 후에 자신에게 이처럼 핏대를 세우며 대든 인물은 없었다.
아니 한 명 있었다. 하남성 도지휘사가 혁련장 일로 자신과 대립했었다.
그러나 그의 말로가 어찌 되었는지 안다면 이렇게 안하무인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운은 더 상대하지 않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왕야와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자네는 신경 쓰지 말고 명령에 따르게.”
“그럴 수 없습니다.”
청운은 이를 악물고 대드는 이왕신 백호를 보았다.
어깨를 당당히 펴며 가슴을 내밀고 청운에게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대들고 있었다.
“그럴 수 없어?”
청운은 냉랭히 되물으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퍽!
이왕신의 커다란 덩치가 붕 뜨더니 철퍼덕하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이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상관이 쓰러졌지만 자신들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런 병사들을 향해서 청운이 차갑게 말했다.
“네놈들도 황제 폐하의 명령에 반기를 들겠단 말이냐?”
털썩.
누군가 무릎을 꿇었다. 연이어 다른 병사들도 무릎을 꿇었다.
남경왕부의 힘이 절대적이라지만 황제 앞에서는 안 될 말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제국의 주인은 황제였다.
병사들이 모두 부복하자 청운은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포박해서 한쪽에 가두어라. 선임 중 한 명이 병사 절반을 통솔해서 이곳을 지켜라. 나머지는 나를 따라 움직인다.”
“충!”
“명을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