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인세의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겠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지옥도가 눈앞에 있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며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 저 멀리 높다랗게 걸린 붉은 깃발이 보였다.
‘찾았군.’
한참을 돌아다녀서야 객잔에서 만난 사내가 알려준 곳을 겨우 발견했다.
청운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곡물상회가 보이는 건물 앞에 당도했다.
이미 소식을 접했는지 하오문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다.
기세만으로 사람을 질리게 할 만큼 진한 살기가 청운을 압박했다.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소흥객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울 만도 하건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전면을 보았다.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힌 그는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향해서 장력을 뿌렸다.
쾅!
싸움이 시작되고, 일대 다수의 난전이 펼쳐졌다.
청운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느낀 불쾌감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지 무자비한 살수를 펼쳤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려달라며 도망치는 자들을 굳이 쫓아가서 죽이지는 않았다.
앞을 막아서는 자. 살기가 짙은 자만 골라서 목을 쳤다.
청운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것들.’
이곳까지 오면서 결심했다.
무공을 지닌 자, 살기를 품은 자는 모조리 죽여버리기로.
하오문은 약자를 돌보지 않았다.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지옥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삶의 의지가 없는 퀭한 눈으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를 보았을 때 자신의 어머니 모습이 겹쳐졌었다.
약에 취해서 자신을 보던 수많은 이들의 눈길이 가슴을 후볐다.
퍼버버버벙!
우지직!
청운의 앞을 막아섰던 자들이 처참하게 쓰러졌다. 그의 분노를 막을 자 아무도 없었다.
일부 뒤쪽에 남은 자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두려움에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게 보였다.
굳이 그런 자들까지는 손을 쓰지 않았다.
청운은 더 이상 막는 자가 없자 곡물상회 안으로 진입했다.
수십 명이 병장기를 들고 청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청운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쥐상의 꾀죄죄한 노인을 보며 말했다.
“소흥객을 불러라.”
자신이 지목되자 노인은 눈을 빛냈다.
한눈에 자신이 여기에서 가장 높다는 것을 파악하다니.
보통 놈이 아니었다.
“오늘 길보다 흉이 많다는 점괘가 나와서 불안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는군요.”
쥐상의 노인은 다른 이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청운을 이리저리 살펴본 그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한마디 했다.
“요즘 강호를 뜨겁게 달구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직 널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저희같이 정보를 파는 자들에게는 유명한 분이시지요. 어서 오십시오. 삼원 이청운 진무사님.”
노인은 허리를 숙이며 청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터였다. 그래서 청운의 용모와 무공을 보고는 정체를 짐작한 것이다.
하긴 오히려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자룡궁을 무너트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가는 곳마다 승전보를 올린 그의 신위는 유명한 이야깃거리였다.
청운은 미간을 좁히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백가장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면서부터는 역용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알아본 것 같았다.
청운이 역용을 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당히 밝히고 다니면 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청운이 쥐상의 노인에게 차갑게 물었다.
“소흥객은?”
“지금은 안 계십니다. 그런데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신지요?”
청운은 점포 안을 둘러보는 척하며, 안채 쪽에서 다가오는 혈황을 바라보았다.
[정말 없다. 백가장 때문에 떠난 것 같다.]
청운도 처음부터 소흥객이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그래서 손을 과하게 쓴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부족한 것 같았다.
하오문의 간부로 보이는 노인이 이처럼 유들유들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우우웅.
청운의 양손에 내공이 뭉쳤다.
한눈에 봐도 막대한 공력이었다.
그 모습에 쥐상의 노인이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대인!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청운은 기다리지 않았다.
파바바바방!
공력을 모은 그는 연속으로 장력을 뿌렸다.
하오문 무인들이건 집기류건,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청운의 장력을 맞은 물건들이 박살났다. 무인들은 제대로 막지 못하고 생을 달리했다.
청운이 공격을 시작하자 하오문도들도 반격했다.
“죽여!”
“우리가 겁 먹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놈!”
그들은 특기인 암기를 뿌리고 독주머니를 던졌다.
그러나 청운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그들 속으로 뛰어든 상태였다.
난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싸움은 곧 끝을 맺었다.
멀쩡하게 서 있는 이는 청운을 빼고 한 명뿐이었다.
청운은 고개를 돌려서 덜덜 떨고 있는 쥐상의 노인을 보았다.
“소흥객은?”
“모, 모릅니다. 다른 곳으로 가셔서 이곳에 안 계십니다.”
“그럼 내가 너를 살려주어야 할 이유를 한두 가지만 말해 봐라.”
차가운 한마디. 쥐상의 노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소흥객의 잔인함을 넘어서는 위엄이 눈앞에 있었다. 그 잘 돌아가던 머리가 돌머리가 되었다.
노인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내세에서는 평범한 삶을 살아라.”
서걱.
노인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살려줄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 그가 행했을 악행은 안 봐도 뻔했다.
짙은 피 냄새가 온몸에 밴 자였다. 그의 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생을 달리했을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런 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기에 단칼에 목을 베었다.
청운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들 중 한 사내 곁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앵속은 어딨느냐?”
그러나 사내는 고통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아픔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아픔을 참고 대답했어야 했다.
퍽!
사내의 머리가 터졌다.
청운은 다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살아 있는 다른 이에게 다가가서 똑같이 물었다.
“앵속은 어디 있느냐?”
질문을 받은 사내는 두 눈만 굴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청운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스르르 움직이는 소리가 나자, 쓰러져 있던 사내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창고! 저기 창고입니다.”
청운의 손이 멈췄다. 사내의 시선을 따라서 청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주방으로 연결된 문이 보였다.
그 안쪽에서 여러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청운은 주저 없이 이동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굳게 닫힌 문을 향해서 일장을 날렸다.
쾅!
문짝이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편은 안쪽에 있던 자들을 덮쳤다.
퍼버버벅.
파편이 암기처럼 날아갔다. 안에 있던 자들은 반항 한번 못하고 절명했다.
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청운은 수북이 쌓인 작은 주머니들을 볼 수 있었다.
청운은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주머니 하나를 잡았다. 안을 드려다 보니 백색 가루가 보였다.
툭.
주머니를 던져버리고 주위를 다시 보았다.
지난번에 옮기던 앵속의 절반가량은 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창고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정신을 차리고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는 자들이 보였다.
이들 역시 모조리 죽이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피는 많이 보았다.’
이미 이곳까지 오면서 백 명 넘게 죽였다.
싸울 의지가 없는 자들을 상대로 살수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청운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자들에게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저 안에 있는 앵속을 하나도 남김없이 길가로 내놓아라.”
청운은 할 말만 하고 곡물상회를 나섰다.
청운의 무위와 잔인함을 본 무인들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앵속이 담긴 주머니를 나르기 시작했다.
곡물상회 앞에 앵속이 담긴 자루가 수북이 쌓였다.
앵속을 나른 사내들이 어깨를 웅크리고 청운의 눈치를 살폈다.
도망이라도 치면 살 수 있을지 모르는데 두려움에 도망도 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안쪽에 돈주머니가 숨겨져 있다. 전부 가져오라고 해라.]
혈황의 말을 들은 청운은 사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안에 있는 돈주머니도 찾아서 가져와라.”
어딘가에 금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굳이 자신이 찾아서 일일이 나를 필요는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사내들이 돈이 담긴 자루를 가지고 나오기 시작했다.
안에 얼마나 많은 돈이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저 자루 안에 철전이 담겼는지 은전인지 모르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둘 곡물상회에 있던 돈이 밖으로 나와서 쌓였다.
짐마차 두세 대 분량은 될 것 같은 돈이었다.
도대체 이 많은 돈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휘익.
손을 휘저었다.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자루 하나를 띄우고는 반대로 부었다.
차라라라랑.
맑은 소리와 함께 돈 자루 위로 은전이 쏟아졌다.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설마 이 많은 돈이 전부 은전은 아니겠지?’
빈민가에 자리한 곡물상회에 쌓여 있을 돈이 아니었다.
족히 수십만 냥은 될 양이었다.
손을 다시 휘저었다.
찌익. 찍찍찍.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자루가 찢겼다.
그리고 드러난 은빛 물결.
전부 은전이었다.
“허.”
청운의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두 곡물이 아닌 앵속으로 벌어드린 돈인가 보군.’
곡물상회는 위장이었다. 하오문은 이곳에서 앵속을 거래했다.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건물 사이사이에서 이곳을 보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못 먹고 헐벗은 자들이 보였다.
청운은 돈 자루를 나르고 한쪽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하오문 무인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돈을 나눠준다.”
“…….”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각기 이십 냥씩 나눠준다. 그리고 너희들도 백 냥씩 가져라.”
맑은 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에 한 사내가 용기를 내서 청운에게 물었다.
“정말이시옵니까?”
“그렇다. 어서 나눠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청운은 돈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 사내들을 보다가 허공을 향해서 사자후를 터트렸다.
“곡물상회에서 은전을 나눠준다. 모두 이곳에 와서 은전 스무 냥씩 받아가라.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공평하게 나눠줄 것이다. 어서 이곳으로 모여라!”
내공을 실었지만 듣는 이들이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사자후를 조절해서 빈민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했다.
“모두 와서 은전을 받아라!”
“어서 와서 가져가라!”
살아남은 무인들이 사방에 외치기 시작했다.
청운의 무력을 지켜보았다.
소흥객이 무섭고 두렵긴 했지만, 청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장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 문제였다.
곡물상회의 대표였던 막노야가 그를 진무사라 불렀지 않은가. 진무사 이청운에 대해서는 익히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던 터였다.
그가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금의위들이 사방에 쫙 깔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살아야 했다. 살려면 그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목이 터져라 외치며 주춤주춤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은전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청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사자후를 터트렸다.
아니, 사자후라기보다는 천리전음술에 가까웠다.
“나는 황제 폐하께서 파견한 북진무사 이청운이다!”
청운은 자신의 정체를 만천하에 밝혔다.
그러고는 다시 외쳤다.
“살아남은 하오문도들은 들어라! 황제 폐하의 황명으로 소흥에 있는 하오문도 중 불법을 저지른 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할 것이다! 지금부터 내 눈에 띄는 하오문도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니 도망쳐라! 살고 싶다면 어서 도망쳐라!”
우르르르릉.
천둥이 치듯 하늘이 요동쳤다.
그 소리에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