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87화
“누, 누구십니까?”
한 사내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이들의 하는 행동을 보면 선한 의도로 보이지 않았다. 먼저 백가장 사람들의 저의를 알아야 했다.
“알 것 없다.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럼 대답하면 살려주시는 것입니까요?”
눈알을 굴리던 사내가 다시 물었다. 다른 자들에 비해서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를 아는지 칠장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단, 거짓이 있다면 죽을 것이다.”
다행히 살길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본거지를 말하는 것도 문제였다. 차후에 배신자로 찍힐 수도 있었다.
‘당장 죽는 것보다 낫지.’
나중에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잘하면 살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지금 말하지 않을 경우 당장 죽일 것이 뻔했다.
사내는 마음에 준비를 마치고 지부가 있는 곳을 말했다.
“여기서 가까운 지부가 세 곳입니다. 저 길로 쭉 가면 오른편에 붉은 대문으로 된 장원이 있습니다. 근데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야 하니 그쪽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하오문 지부로 간다면 알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 길로 가시면 별채가 딸린 객잔이 있는데 그곳도 지부 중 한 곳입니다. 그리고…….”
사내는 열심히 설명했다. 살려주겠다는 확답을 받긴 했지만 불안했다. 그래서 한 가닥 희망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말했다.
사내의 설명이 끝나자 약속대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풀어주지도 않았다.
“모두 포박해서 객잔에 가둬라.”
“대인! 살려주시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약속은 지킨다. 괜히 다른 곳에 소식을 전한다고 얼쩡거리다가 눈먼 칼에 목숨을 잃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끌려 나온 자들이 다시 객잔으로 끌려 들어갔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객잔 앞에 모인 백가장 무인들이 셋으로 나누어졌다.
세 장로가 각기 한 무리의 무인들을 거느리고 움직였다.
청운은 떠나가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들이라면 천위대와 비슷한 고수들이 몰려온다고 할지라도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청운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 안에는 살아남은 자들이 묶여 있었다.
뚜벅뚜벅.
청운이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청운에게 모였다.
그들은 약관이나 되어 보이는 청운이 걸어오자 긴장했다.
분명히 살려준다고 했는데 한 명이 남았다. 자칫 이대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청운의 행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청운은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 않고 다른 자들을 지나쳐서 안쪽에 묶여 있는 사내 앞에 섰다.
사내는 조금 전 정보를 알려준 자였다.
청운이 말없이 내려다보자,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시고 싶으신 정보가 있으십니까?.”
“역시 머리가 좋구나.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마음에 들어.”
청운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상대했던 하오문 사람들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배신하는 일을 쉽게 결정할 만큼 돈과 목숨을 중시했다.
청운은 품속에서 전표 한 장을 꺼냈다.
은자 천 냥짜리 전표였다.
사내의 눈앞에 전표를 들이밀며 말했다.
“갖고 싶으냐?”
“물론입니다요!”
“내가 원하는 것을 준다면 너를 풀어주고, 이 전표도 주마.”
은자가 자그마치 천 냥이었다. 무공도 변변치 않은 자신이 평생을 일해도 못 만져볼 거금이었다.
“무,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소흥객.”
“예?”
“왜 그리 놀라느냐?”
소흥객이라는 말에 사내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곳 소흥을 지배하는 인물이 소흥객이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안다면 당연히 저런 질문은 못 할 것이다.
“대인, 설마 소흥객이 어딨는지 알려달라는 것입니까?”
청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에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모릅니다. 거처가 일정치 않으셔서 어디에 계신지 아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청운은 겁에 질린 사내의 표정을 보았다.
‘거짓은 없는 것 같군.’
탐욕에 젖었던 눈동자가 겁에 질린 토끼 눈이 되었다.
탐욕을 넘어서는 공포가 사내를 휘감고 있었다.
“아는 부분만 말해라. 어차피 오늘 소흥 하오문은 멸문한다.”
“예?”
백여 명으로 소흥을 접수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전 하오문이 그저 그런 곳이었다면 모를까, 어디선가 나타난 고수들 때문에 그 힘이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강해져 있었다.
그러나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에게 다시 말했다.
“천위대를 알고 있느냐?”
“그거야 당연히… 압죠.”
“안다니 다행이구나. 그자들, 대향림에서 모두 죽었다.”
“예에?”
너무도 놀라운 소식에 함께 잡혀 있던 자들도 깜짝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들이 아는 한 천위대는 무적이었다. 그런데 모두 죽임을 당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사내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서, 설마 백가장……?”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근처에 있던 자들도 들었는지 저마다 한마디씩을 했다.
“원수를 갚으려고 백가장이 나선 것이여?”
“아이고! 그 일 때문에 다 죽게 생겼네.”
“아녀, 아무리 백가장이라 해도 천위대여, 천위대가 어떤 자들인데 백가장한테 진단 말여?”
믿지 못하겠다는 자도 있었지만, 백가장이 강하다는 것을 이들은 인정하고 있었다.
청운과 이야기를 하던 사내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인, 혹시 백가장에서 오셨습니까?”
“그렇다. 그리고 소흥객을 잡지 못하면 백가장에서 소흥의 모든 하오문 문도들을 죽일지도 모른다.”
꿀꺽.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두려움에 물들었던 두 눈은 이미 정상으로 돌아왔다. 무언가 계산을 하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생각 잘해라. 네가 소흥객이 어디 있는지 알려준다면 곧장 너를 풀어줄 것이다. 천 냥이면 어디에선들 못 살겠느냐?”
사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여전히 소흥객이라는 말에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빨리 이곳을 뜬다면 살길이 보일 듯했다.
사내는 마음을 굳혔는지 청운에게 말했다.
“대인, 돈을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런 도둑놈!]
혈황이 발끈해서 빽 소리쳤다.
하지만 청운은 못 들은 척하고 사내에게 물었다.
“소흥객이 어딨는지 아느냐?”
“정확한 건 아니지만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 소흥객의 거처가 일정치 않다고 하지 않았느냐? 난 정확한 일이 아니면 곤란한데.”
“아이구, 소흥객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공격하면 나타날 것입니다.”
사내의 말에 청운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소흥객이 숨으려고 마음먹으면 찾지 못한다. 그런데 그에게 약점이 있다는 말이었다.
청운은 품에서 전표 한 장을 더 꺼내서 사내에게 보여주었다.
“천 냥 더 주마. 이 정도면 되겠느냐?”
“무, 물론입니다요.”
사내의 두 눈에 남아 있던 두려움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탐욕에 두 눈이 돌아갔다.
[주지 마라. 저런 놈에게 뭐 그리 많이 줘?]
혈황이 씩씩거렸지만, 청운은 사내의 포박을 풀어주고 전표를 넘겼다.
사내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전표를 받아들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포에 질린 다른 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 역시 소흥객이라는 말에 떨고 있었다.
사내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친걸음이었다.
“소흥 북동쪽에 가면 수로가 정신없이 뻗어 있는 빈민가가 있습니다. 그곳 안쪽에 가시면 대나무에 붉은 기가 걸린 곡물상회가 있습니다.”
“…….”
“그곳에서 파는 물건은 식량만이 아닙니다.”
“판다는 물건이 무엇이지?”
“천상의 기쁨을 주는 물건입니다.”
“아! 앵속.”
청운은 사내의 말에 여러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소흥객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앵속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앵속을 거래하는 곳을 치면 놈이 나타날 거라는 것을 말이다.
획.
청운은 몸을 돌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필요한 정보는 얻었고 이들에게 볼일은 더 없었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서 객잔을 빠져나갔다.
몇 발자국 지났을까, 객잔 안에서 고성이 오가며 비명이 들렸다.
우뚝.
청운의 걸음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결국, 이리되는가?’
청운이 살려준 사내가 다른 이들을 죽이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도망친다면 소문이 날 것이다.
그가 묶인 자들을 전부 죽일지, 아니면 일부나마 살려서 같이 도망칠지는 모른다. 그러나 청운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탐욕과 삶에 대한 애착을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도 정파인이 되기는 틀린 것 같군요.’
[독한 놈…….]
* * *
소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잘 정비된 곳이 있는가 하면 얽히고설킨 복잡한 곳도 많았다. 수십 수백 명의 무인이 모여 있는 곳도 있었다.
청운은 그들이 하오문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공격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백가장이 소흥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굳이 자신까지 나서서 그들의 피를 볼 마음은 없었다.
사내가 알려준 북동쪽에 도착한 청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지나쳐 온 곳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허! 이런 곳이 있었다니.”
빈민가였다.
소흥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짜 소흥의 모습이 보였다.
청운은 천천히 빈민가로 들어섰다.
쓰러져가는 나무집이 얽히고설키며 복잡하게 이어져 있었다.
청운이 들어서자 사방에서 주시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이방인의 모습에 긴장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들에게서 강한 적개심과 탐욕스러운 끈적거림이 느껴졌다.
개중에는 살기를 뿌리는 자들도 있었다. 밝은 대낮에 강도질을 벌이려는 것인지 대놓고 살기를 흘렸다.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길 닫는 대로 걸으며 빈민가를 살펴보았다.
병자와 불구자들이 보였다. 헐벗은 어린아이들이 뛰어놀다가 그를 보고 후다닥 도망치기도 했다.
좀 더 으슥한 곳으로 들어서자 청운의 앞을 막는 자들이 있었다.
“이봐, 여긴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청운은 사내들을 보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따라붙었던 자들이었다. 흉흉한 기세를 뿌리고 있지만 노상강도는 아니었다.
‘하오문 놈들이군.’
이곳을 감시하고 지키는 자들 같았다.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곧장 윗선에 보고하고 제거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청운이 앞의 사내에게 물었다.
“곡물상회를 찾고 있는데, 혹시 아는 자가 있나?”
“뭐?”
그리 물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 사내는 미간을 찡그리며 주위 동료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곧 청운을 다시 보며 말했다.
“이런 외진 곳까지 와서 식량을 구하겠다니, 웃기는 놈이군. 그보다 네놈 정체가 뭐냐?”
“아는 자가 없나 보군.”
청운은 사내의 말을 무시하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휘익.
퍼버버벅!
우당탕탕!
가벼운 손동작에 앞을 막았던 자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격공섭물(隔空攝物).
청운에게 어려운 절기는 아니었다. 그가 끌어당기고 내칠 때마다 사내들이 제멋대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그래도 죽은 자는 없었다.
사방으로 날아가 쓰러진 자들은 신음을 흘리며 죽겠다고 뒹굴었다.
청운은 그들을 지나쳐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설수록 하오문도들이 앞을 막아서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미 청운의 존재가 알려졌는지 그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흉흉해졌다.
그러나 누구도 청운의 발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처음과 달리 제법 강한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도 청운의 상대는 아니었다.
청운은 새롭게 나타난 자 중 일류 이상의 고수들은 살려두지 않았다.
그들의 몸에서 진한 피 냄새가 났다. 악취와 같은 죽음의 냄새.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청운은 헐벗은 아이들의 슬픈 눈빛이 떠오르자 화가 치밀었다.
두 눈이 퀭해서 어딘지 비정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삶에 대한 의지가 그들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 와중에도 비명과 고성이 사방에서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비명이 허공에 울려 퍼질 때마다 청운의 얼굴도 조금씩 일그러졌다.
머리는 더없이 차가워졌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