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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86화 (86/257)

# 86

86화

하오문 소굴이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인즉 싹 쓸어버리겠다는 뜻과도 연결되었다.

‘다 죽이겠다는 건 아니겠지?’

청운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백영상을 바라보았다.

가족이 처참한 죽임을 당했으니 그 원한이 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청운도 백가장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일반 하오문도까지 죽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청운은 직선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살짝 돌려서 다시 의도를 물었다.

“소흥에 사는 자들이 전부 하오문은 아닐 것입니다.”

“흐음.”

백영상은 청운이 하는 말의 의미를 금세 알아들었다.

그라고 해서 어찌 죄 없는 자들을 죽이고 싶을까.

“진무사님.”

백영상은 청운을 부르더니 곧장 말하지 않고 잠시 무언가 생각했다. 그러고는 결심을 굳힌 듯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강호에 단일 문파로 천하를 상대할 수 있는 곳은 마교뿐이라고 알려져 있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저희 백가장이 마교에 뒤진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소이다.”

“…….”

청운은 가만히 백영상을 보았다.

너무도 무서운 말이었다.

[내가 전에 뭐라 했느냐? 원래 저런 놈들이라니까.]

혈황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혈황님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세월이 흐르며 유명무실해졌다고 알려진 백가장이다. 그런데도 천하를 오시할 힘이 남았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백가장이 마교와 비등한 힘을 지녔다니.

세상 사람들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백운룡 선조님의 유훈이 없었다면 우리 백가장은 천하를 오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오.”

강서성을 넘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후인들은 수백 년간 지켜왔다. 천하가 어려움에 쌓여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나서지 않았다.

백운룡의 제자들이 하나둘 쓰러질 때도 백가장은 피눈물을 흘리며 침묵했다.

“참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강호는 언제부터인가 백가장을 업신여기기 시작했소이다. 우리 가문의 선조가 음지에서 백년 넘게 지켰던 강호거늘. 그들이 우리를 욕하며 손가락질했지만 괜찮았소이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백영상은 말을 잠시 쉬었다.

무언가 울컥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 된 아이들이었소이다. 서호십경이 보고 싶다며 떼를 쓰기에 허락한 나들이였지요.”

청운은 그 대목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백영상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노안에 맺힌 눈물은 한 서린 피눈물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염라대왕의 선고와 같았다.

“하오문은 무림에서 사라질 것이외다.”

“아!”

청운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몇몇 그릇된 자들의 선택이 피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피를 말이다.

“그 결정… 가문의 뜻입니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백가장의 뜻이라면 막아야 했다.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백가장의 힘이 사실이라면 수십만 명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황실에서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황실이 막는다 할지라도 마교만큼 힘이 있다면 백가장은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다.

혈황이 예전에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해준 말이 있었다.

[그분이 글쎄 홀로 황궁에 쳐들어가서 황제의 엉덩이를 걷어찼다지 뭐냐. 크하하하하! 멋지지 않으냐? 나도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더구나. 껄껄껄.]

감히 상상도 못 할 불경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황제가 백운룡에게 스승의 예를 다했다고 하며 혈황이 껄껄 웃었었다.

청운은 힐끔 혈황을 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저 멀리 보이는 소흥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벌어질 혈겁을 알기라도 하듯이.

어쩌면 이번 일이 천하에 피바람을 몰고 올지도 모를 일이다.

백영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가주께 받은 명령은 이 일에 관련된 모두의 척살과 소탕이외다.”

“소탕이라시면 어디까지입니까?”

“소흥입니다.”

결국, 소흥에 있는 하오문 사람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이는 아니 될 말이었다.

청운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불가합니다.”

“진무사!”

백영상이 처음으로 화난 표정이 되었다.

그의 호통에 모두의 이목이 모였다.

그러나 청운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백가장의 슬픔은 만분의 일이나마 이해합니다. 저라 할지라도 그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과 관련 없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탁드리오니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실 수 없는지요.”

“불가합니다. 이미 가문의 뜻이 확고합니다.”

“그 명령 돌리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청운의 물러서지 않는 말에 백영상은 입을 닫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만들었다.

다른 이였다면 백영상은 당장 살수를 펼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를 하며 앞을 막고 있는 자가 백가장의 은인인 청운이기에 참고 있었다.

입을 먼저 연 건 백영상이었다. 그는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청운에게 물었다.

“진무사께서도 하오문과 문제가 있다고 알고 있소이다. 그런데 왜 막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제 스승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불필요한 살생만큼 후회되는 일이 없으시다고요. 백가장 역시 어쩌면 이번 결정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스승님을 두셨군요. 나 역시 같은 생각이외다. 어쩌면 가문도 이번 일로 후회할지도 모르지요. 아니, 분명히 후회할 것이외다. 그러나 피맺힌 가족의 원한은 풀어줘야 하지 않겠소이까?”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쉽게 뜻을 돌릴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는 결론을 지을 수 없었다.

[네가 백가장에 가서 가주를 만나봐라.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혈황이 한 가지 방법을 내놓았다.

청운도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제가 백가장에 방문하겠습니다. 어떻게든 가주와 가문의 어른들을 설득할 것이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은 살려주십시오.”

“진무사, 어찌 이러십니까?”

“삼장로님, 백가장의 피맺힌 원한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하오문의 대부분이 갈 곳 없는 불쌍한 이들입니다. 그들을 붙잡아서 죄질을 따지고 죽일 자는 죽이십시오. 그리고 살려줄 자는 살려줬으면 합니다.”

백영상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결정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내용이었다.

가문에서 청운이 말한 부분을 가지고 갑론을박을 했었다.

결론이 나지 않자 가주의 명령으로 행하는 일이다.

청운은 백영상이 고민할 때 마지막 말을 했다.

“만일 모두를 죽인다면 황제께서 제게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백영상의 감겼던 눈이 떠졌다.

청운이 할 말을 예상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예상대로 청운이 말했다.

“분명히 황제 폐하께서는 토벌을 명할 것입니다.”

“진무사, 진무사의 무공이 뛰어남을 나도 인정하고 있소이다. 그러나 백가장에는 천하를 오시할 만한 분들이 계심을 아셔야 하오.”

청운 역시 어느 정도 예상하는 부분이었다. 혈황 역시 천하를 오시할 고수가 백가장에 있을 거라 말을 했었다.

분명히 지금의 천운이 상대할 수 없는 강자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황궁의 백만 금군을 백가장이 막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정녕 전쟁이 나는 걸 원하십니까?”

백영상의 두 눈에서 불길이 일렁거렸다.

그도 모르지 않았다. 백가장이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가문이라 해도 백만 금군 앞에서는 풍전등화일 뿐이다.

청운이 입을 꾹 다문 백영상에게 다시 부탁조로 말했다.

“장로님, 제가 백가장에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번만 잠시 유예(猶豫)해 주십시오.”

그는 백가장 무인들을 하오문 천위대에게서 구해준 일을 꺼내 들었다. 당장 쓸 수 있는 패가 그것뿐이었다.

백영상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생각을 하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사께서 백가장에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뜻대로 한발 물러서겠소이다. 그러나 직접 백가장에 가셔서 가문의 어른들을 설득하셔야 할 것이외다.”

“아! 감사합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렸는데 이렇게 선뜻 허락을 해주시다니요.”

천만다행이었다. 일단은 소흥이 피바다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을 막았다.

물론 차후에 다시 혈겁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백가장에 가서 가주와 어른들을 설득하면 혈겁을 막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혈황은 속으로 안도하는 청운을 보며 코를 찡긋거렸다.

[그놈, 갈수록 말발만 세지는군.]

하루하루가 달랐다. 이제는 자신이 끼어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결했다.

◈ ◈ ◈

항주에서 전당강 건너에 있는 소흥은 두 가지가 유명했다.

소흥주라는 중원 팔대명주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운하였다.

워낙 복잡하게 뻗어 있어서 초행인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리는 곳이기도 했다.

잘 발달된 항주와 달리 소흥은 낙후된 곳이었다.

관리의 부패가 심하고 길이 복잡해서 범죄자들이 많이 숨어 사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점심이 지났을 무렵 일단의 사람들이 소흥으로 들어섰다.

백여 명이나 되는 무림인이 우르르 몰려들자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긴장했다.

병사들은 몰려온 자들이 백가장 사람들임을 알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난번에 백가장 출신 백인장이 죽임을 당한 일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경비병 중 선임으로 보이는 자가 백가장 사람들에게 방문 목적을 물었다.

“소흥에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볼일이 있어서 왔네. 무림 일이니 관은 나서지 않았으면 하네.”

병사는 그 대답이 못마땅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어주었다.

관부에서 백가장은 유명했다. 백가장 출신 무장들은 하나같이 출중했다. 여러 지역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병사의 힘으로는 앞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도 백가장 사람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에 벌어진 사건 때문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위에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아서 하게.”

백가장 무인들의 출현은 예정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미 관부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이 소흥에 들어오면 서둘러 보고하라는 명령도 얼마 전에 내려왔었다.

성문을 통과해서 소흥에 들어선 백가장 무인들은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청운도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

청운과 백가장 사람들이 향한 곳은 대로변에 자리한 큰 객잔이었다.

그곳은 백가장이 파악한 하오문 소흥지부 중 한 곳이었다.

객잔 앞에서 걸음을 멈춘 백영상이 청운에게 말했다.

“진무사, 지금부터는 나서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는 이곳을 시작으로 하오문도를 상대할 것입니다.”

청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싸늘하게 변한 백영상과 백가장 무인들의 눈에 담긴 살기는 결연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안에 있는 무인들을 잡아라. 반항하는 자는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죽여라.”

“존명!”

한목소리가 되어 외친 백가장 무인들이 객잔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입구로 뛰어드는 이들도 있었고 이층 창문으로 뛰어올라서 공격하는 자들도 있었다.

비명이 들리며 집기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각이 되기도 전에 싸움이 끝나고 수십 명이 끌려 나왔다.

객잔 앞에 끌려온 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하나같이 강한 자는 없었다. 잘해야 이류 몇 명에 대부분 삼류로 보였다.

하오문 사람들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무인들이 흉흉한 기세를 흘리고 있자 겁을 집어먹었다.

다짜고짜 객잔에 들어와서 지부 무사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자신들도 무기를 버리고 바짝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백영상 곁에 있던 칠장로가 끌려온 자들을 다그쳤다.

“소흥에 있는 하오문 본거지가 어디냐?”

선풍도골의 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그의 말은 차갑다 못해 냉기가 뚝뚝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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