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화
강력하지 않지만 빠른 연격을 통해서 천주의 검로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변해버린 청운의 기세에 천주는 한 발 물러서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애송이 주제에 제법이구나.’
순식간에 변한 청운의 대처는 훌륭했다.
자신의 검이 나갈 길을 막아서며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고수 같은 청운의 대처에 천주는 눈에서 살기를 번뜩였다.
‘역시 살려둬서는 안 될 놈이야.’
그는 몸을 빼내려던 생각을 바꾸고 무리를 해서라도 청운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청운이 이대로 성장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자신과 동수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시간이 흐르고 놈의 무공이 깊어진다면 그때는 감당할 수 없는 고수가 탄생할지도 몰랐다.
‘오늘 네놈을 죽일 것이다.’
결심을 굳히자 그의 기세가 사납게 변했다.
우우우웅!
청운과 천주는 서로를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쾌검으로 겨우 천주와 떨어진 청운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청운은 격하게 달아올랐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머릿속에 수많은 무공이 떠올랐다.
자신이 익힌 수많은 무공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천주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절초를 준비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저 뒤에 이곳을 노려보고 있는 백가장 놈들이 눈에 거슬렸다.
저놈들이 합류하기라도 했다가는 좋은 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과연 천하제일세가라는 백가장답다. 너 같은 애송이가 벌써 나와 동수를 이루다니. 그러나 여기까지다.”
우웅.
짧고 굵은 울음과 동시에 천주의 검에 검붉은 기운이 서렸다. 하나둘 검기가 흘러나와서 검을 둘렀다. 초절정 고수만 되어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검사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찌이이잉.
천주의 검이 한 차례 검명을 토했다. 검사가 일정한 형태로 얽히더니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징!
빛이 번쩍이더니 천주의 검에 경이로움이 어렸다.
검강!
무엇이든지 잘라낸다는 검붉은 강기가 천주의 검에서 일렁거렸다.
천주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네까짓 것이 과연 나를 상대할 수 있겠냐는 무언의 시위였다.
도망치는 것이 가장 좋은 상황이었지만 청운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무림출도 이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기를 만들어내는 고수였다.
혈황 역시 천주가 검강을 만들어내자 긴장했다.
[조심해라. 검강이다.]
청운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직 검강의 고수와 겨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 있었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라면 검강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운은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환우구검의 기수식.
자신이 익힌 가장 강력한 검법을 꺼내 들었다.
여전히 머릿속에서 수많은 무공이 탄생했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초식과 초식이 어우러졌다.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초식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직 환우구검을 능가하는 초식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파앙!
먼저 움직인 건 청운이었다.
유령기환보를 펼치며 사방에 분신을 만들었다.
천주를 포위하고 동시에 공격해 들어갔다.
투캉!
천주는 정확히 청운을 찾아내고 방어했다.
처음으로 천주의 검강과 청운의 검사가 부딪쳤다.
‘크윽.’
청운의 검이 살짝 밀렸다.
검강과 검사의 대결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한 번의 격돌이건만 청운의 속이 울렁였다. 철벽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청운의 검사가 흩어지지는 않았다.
투캉! 챙!
연속으로 검이 부딪쳤다.
초식에서 청운이 앞섰다. 그러나 무기에서 손해를 보고 있었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반발력이 청운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무리해서라도 검강을 펼쳐봐야 하나?’
검강은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검사가 완숙의 경지였기에 펼칠 수 있을 거라고 혈황이 말했었다.
문제는 펼친다 할지라도 제대로 응용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손에 익지 않은 무기는 자칫 자신을 상하게 하는 법이다.
혈황 역시 무리해서 검강을 펼치게 하지 않았었다. 자칫 무리하다가 내상을 입을 수 있었다.
청운은 검사만으로 적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점점 초조해졌다.
초식의 정교함이나 운용만으로 넘기에는 상대의 실력이 뛰어났다.
그런 청운의 상태를 아는지 혈황이 조언했다.
[무공이란 경지가 전부가 아니다. 너라면 검강이 아니어도 저 정도 놈은 상대할 수 있을 거다.]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현 상황은 청운에게 무척 불리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패할 수도 있었다.
물론 백가장 무인들이 협공한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운이 원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천주 역시 어서 빨리 청운을 제압한 후 자리를 뜨고 싶었다.
‘백가장 장로 중 한 명만 합세해도 필패다.’
조급한 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특히 백가장이 자랑하는 그 지긋지긋한 협격술에 발목이 잡혔다가는 오도 가도 못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백가장 무인들은 흩어지는 수하들 때문에 이쪽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아니면 저 애송이 놈을 죽이지 못한다.’
마지막 기회였다.
놈을 이 자리에서 죽이지 못하면 대업에 큰 지장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놈을 죽여야 했다.
천주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의 독문검법을 펼쳤다.
검에 강기를 두르고 폭풍같이 몰아쳤다.
문제는 저 미꾸라지 같은 청운의 신법이 바람 같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놈! 경신법만 익혔나?’
절로 이가 갈렸다.
경공만 놓고 본다면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놈이었다.
청운은 아슬아슬하게 천주의 공격을 잘도 빠져나갔다.
유령기환보에서 선전보로 바꿨다가 다시 비천무영신법으로 천주의 공격을 흘리고 있었다.
자꾸 맞부딪쳐서는 답이 없었다.
벌써 내부가 진탕되어서 약간의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필패다.’
천주만큼 청운도 힘들었다.
위기의 순간 힐끔 혈황을 보았다. 도움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혈황이 호통을 쳤다.
[여기 보지 말고 앞을 봐!]
혈황 말대로 한눈을 팔면서 상대할 존재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압박에 청운의 특기가 꿈틀거렸다.
머릿속에서 계속 뭉치고 흩어지던 무공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천주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초식이 떠올랐다.
순간 청운의 검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천주가 볼 때는 청운이 대항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청운의 몸에 수없이 많은 허점이 보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뻗었다.
검강이 형성된 그의 검이 청운의 요혈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스르륵.
청운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옆으로 이동하며 천주의 공격을 흘렸다.
동시에 청운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그의 몸 주위를 이리저리 돌며 잔상을 만들었다.
재차 청운을 공격하려던 천주가 흠칫하며 눈을 치켜떴다.
“응? 저게 뭐지?”
청운의 몸 주위에 수십 개의 검이 떠 있었다.
마치 천수관음이 천 개의 손을 펼친 듯했다.
천주는 그걸 보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청운이 펼쳤던 환영과 같은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청운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그에게는 강기를 두른 검이 있었고 일격필살의 초식이 있었다.
‘이노오옴!’
천주는 한 줄기 유성이 되어 청운을 덮쳤다.
신검합일을 이룬 천주의 공격은 주위를 찢어발기며 날아갔다.
고오오오!
순간 청운의 주위에 만들어진 수십 개의 검이 꿈틀거렸다.
앞으로 쑥 밀어 넣는 단순한 동작에 수많은 검이 천주를 향해 뻗어갔다.
파앙!
슈슈슈슉!
수십 개의 검이 번개처럼 뻗어나가더니, 천주의 유성과 같은 공격과 차례차례 격돌했다.
콰과과과광!
연속으로 폭음이 들렸다.
쾅!
천주와 청운의 몸이 순간적으로 교차했다가 떨어졌다.
두 사람 모두 앞으로 검을 쭉 내밀고 있었다.
청운은 처음과 다름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격한 천주는 청운을 지나친 후 멈춰 서 있었다.
표정 변화 없는 청운의 입가에서 한 줄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천주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크크크. 애송이 놈, 여기……. 큭.”
득의의 웃음을 흘리던 천주의 두 눈이 커지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슴에서 전해지는 허전함에 고개를 숙였다.
시원했다.
뻥 뚫린 가슴, 자신감 넘치게 탄탄함을 보여주던 자신의 가슴에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스르륵, 털썩.
“이, 이런…… 개 같은…….”
무릎을 꿇은 천주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기를 두른 자신의 검강이 청운의 검사에 패하다니.
쿵!
천주의 상체마저 바닥에 쓰러졌다.
울컥!
청운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비틀거린 그는 한 움큼 검붉은 핏물을 쏟아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편으로는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축하한다. 어제의 깨달음이 이제야 효과가 나타났구나.]
어제 백가장과 천위대의 싸움 속에서 찾아왔던 깨달음이 청운을 한 단계 성장시켰다.
아마 그때의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오늘 쓰러진 사람은 청운일지도 몰랐다.
청운이 입술의 피를 닦으며 씩 웃을 때, 백가장 무인들은 흩어지는 하오문 천위대 무사들을 하나둘 쓰러뜨렸다.
* * *
청운과 백가장은 멈추지 않고 달려서 대향림을 벗어났다.
하오문 천위대는 많은 자가 도망쳤으나, 그럼에도 많은 이들을 죽이고 사로잡을 수 있었다.
백가장은 곧장 소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전투로 인해서 지친 상태였다.
포로로 잡은 자들 역시 문제였다.
그들의 혈도를 눌러서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만 뜻하지 않은 짐이었다.
더구나 일대에는 딱히 쉴 수 있는 거점이 없었다. 그 바람에 숲속 적당한 곳에서 잠시 쉰 다음 소흥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일부 경비무사를 남겨두고 숲속 공터에 백여 명이 자리했다. 장로들과 간부들이 청운과 함께 한쪽에 자리했다.
청운이 백영상에게 물었다.
“삼장로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진무사.”
“백가장에서 파견 나온 인물은 이게 다인지요?”
“예, 처음에는 이보다 적었소이다. 그런데 대향림에서 싸우면서 추가되었지요. 하오문이 생각보다 강하자 증원을 한 것입니다.”
백가장에서는 하오문이 이처럼 강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강호에서도 하오문이라면 무시부터 하지 않던가.
힘없는 자들이 모여서 하오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문파를 만들었으니 알아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알려진 것과 달리 하오문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정보나 취급하던 자들이 어느새 무공마저 갖추게 되다니, 앞날이 걱정입니다.”
하오문이 파견한 초절정과 절정급 무사가 수십이 넘었다. 일류에 든 자들 역시 수백이었다. 그들을 이끌던 자가 청운에게 패해서 죽었지만 화경의 고수였다.
그 못지않은 자가 하오문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오문 천위대 하나가 웬만한 대문파와 맞먹는 전력이었다. 그런데 그들 외에도 많은 고수가 하오문에 있을 것 같았다.
백영상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오문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청운 역시 동의했다.
고수를 키우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었다. 사정이 이럴 줄 알았다면 청운 역시 금의위를 대동하고 왔을 것이다.
‘신비세력이 하오문을 접수한 것일까?’
의문이 남았다.
비천한 자들이 모여서 만든 하오문이 수십 년 만에 고수를 거느린 방파로 크려면 무언가 사연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으로서는 자룡궁과 연관된 신비세력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백가장을 이끌고 있는 백영상은 걱정이 되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무사, 어쩌면 수십 년 전부터 하오문에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르오.”
그도 무언가 느끼는 점이 있는 것 같았다.
십여 년 전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왕팔의 말이 떠올랐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기에 이들에게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오문의 전력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청운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백영상에게 물었다.
“장로님, 소흥을 치는 일은 좋은데, 소흥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미 하오문 소굴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백영상의 무뚝뚝한 말에 청운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속에 살기는 없었다. 그런데 왠지 의미심장한 뜻이 깃든 듯 느껴졌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