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화
백영상은 즉시 다른 이들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이대로 곧장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 명의 장로가 각기 스무 명을 거느리고 좌우로 빠져나갔다.
남은 본대가 곧장 내려갈 수도 있지만 피해가 생각보다 클 수가 있었다. 하오문은 허투루 상대할 자들이 아니었다.
‘선봉에 서서 놈들의 진형을 흐트러뜨릴 필요가 있다.’
청운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선봉에 서기로 마음먹고 백영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장로님, 놈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릴 것이 뻔합니다. 이대로 내려가면 피해가 클 수 있으니 제가 먼저 내려가서 놈들의 매복과 함정을 제거하겠습니다.
-혼자서 괜찮겠나? 정예를 붙여줄 테니 함께 내려가게.
-아닙니다. 혼자가 편하니 이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무공만 따지면 백가장이 뒤질 게 없었다. 그러나 독공과 암기는 무공만 강해서는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알겠네.
백영상은 결국 청운의 주장을 들어주었다.
청운은 계곡 안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백가장 무인들과 함께 천천히 이동을 하다가 한 지점에 다다르자 땅을 박찼다.
팟!
그는 비천무영신법을 최대로 펼쳐서 곧장 내달리며 적이 숨어 있는 좌우 숲에 검기를 뿌렸다.
쉐에에엑.
후두두둑.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숲의 나뭇가지들이 숭덩 잘려나갔다.
“컥!”
“으악.”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매복이 들킨 걸 알아차린 하오문 무인들이 숲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들켰다. 공격하라!”
“쏴라!”
예상대로 하오문은 숲에서 청운과 백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가장 식솔들마저 끌어들였으면 좋으련만 웬 이상한 녀석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청운은 그들 중 대여섯 명을 순식간에 베어버렸다.
슈슈슈슈슉!
후두두두둑!
날카로운 파공성이 계곡 안을 가득 메웠다.
나뭇가지를 뚫고 날아드는 암기가 은빛 물결을 만들었다.
청운은 맞서지 않고 곧장 솟구쳤다. 암기의 숫자도 숫자였지만 위력이 제법 매서워 보였다.
청운의 이러한 판단은 정확했다.
타다다당!
퍽퍼버벅!
청운이 방금 있던 자리가 걸레 조각이 될 만큼 박살 났다.
파밧.
청운은 허공을 박차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에 입을 쩍 벌리고 구경하는 자들이 생길 정도였다.
“허공이다! 쏴라!”
암기가 청운을 노리고 다시 발사되었다.
허공에 떠 있던 청운도 그냥 있지 않았다.
능공허도의 묘를 해서 몸을 비틀며 묵룡파천권을 펼쳤다.
크아아앙.
거대한 묵룡이 튀어나와서 날아드는 암기를 튕겨내고, 암기를 발출한 자들이 숨어 있는 숲속을 휘감았다.
하오문도 몸을 숨기고 있던 척살조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들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청운의 숨통을 노렸다.
쉐에에엑.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맞춰서 청운은 다시 허공을 박차며 재차 뛰어올랐다.
신기에 가까운 경신법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백가장 무인들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들의 눈에는 청운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영상과 일부 어른들의 눈에는 청운의 움직임이 여유로워 보였다.
“경고망동하지 말고 기다려라. 진무사의 신호가 있기 전에는 여기서 대기한다.”
이미 청운과 약속된 부분이었다.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면 그의 말을 따라야 했다.
팡 파방!
콰과과광!
청운은 비천무영신법을 펼치며 하오문을 유린했다. 허공을 자유롭게 노닐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라지망 속에서도 유유히 빠져나간다는 전설의 비천무영신법은 하오문에게 청운이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잡았다! 아니?”
“잔상이다! 오른쪽 위다! 쏴라!”
분명히 청운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미리 암기를 날렸다. 그의 몸에 분명히 암기가 박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암기는 허망하게 청운의 몸을 관통했다.
모두가 이형환위와 같은 잔상을 만든 청운의 움직임 때문에 벌어진 혼란이었다.
청운은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암기를 여유롭게 피했다. 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암기를 날리는 자들을 하나둘 찾아내서 목을 베었다.
하오문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상대가 좋지 않을 뿐이었다.
카앙!
서걱.
청운의 검을 막아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고작 한두 수가 다였다.
개중에는 청운에게 쉽게 밀리지 않을 강자도 있었다.
청운은 그런 자들을 뒤로하고 약한 자들을 먼저 처리했다.
한 명을 잡기 위해서 머뭇거린다면 포위당해서 집중공격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숱한 경험이 쌓인 청운이었다. 일 대 다수의 대결은 너무도 익숙했다. 하오문 천위대에게는 재앙과 같은 날이었다.
조금씩 전진한 백가장 무인들은 전장이 되어버린 곳이 잘 보이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워낙 치열한 접전이기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백가장 무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구경밖에 할 수 없었다.
숲속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계곡 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청운의 신위는 놀라움을 넘어서 경외감마저 들게 했다.
한동안 청운의 전투를 살피던 백영상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단하다는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무위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진무사를 상대하려면 가주나 그분들이 나서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운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오문을 상대로 전과를 올렸지만 다 믿지는 않았었다.
약관의 청운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냐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다. 그의 무공 못지않게 자신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광경은 믿지 못할 정도였다.
백영상은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이미 내공으로 형체를 만드는 경지라니.”
크아아아앙!
거대한 용이 숲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청운이 손짓할 때마다 거대한 용이 형상화되어 숲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화경 혹은 그에 준하는 상승 무공을 익혀야 가능한 현상이었다.
더욱이 청운은 얼마나 많은 무공을 익혔는지 가늠이 안 될 만큼 다양한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일검에 숲의 나무들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그의 주먹질 한 번에 한쪽 절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천신이 강림한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 준비하라!”
백영상은 전장이 되어버린 싸움터에 뛰어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신 하오문 놈들의 퇴로를 막을 작정이었다.
“모두 천라지망을 펼쳐라!”
“존명!”
백영상의 명령에 백가장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백가장 무인들은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계곡을 포위했다.
지난 이십여 일간 놈들 때문에 죽어간 식솔이 몇이던가.
그 피맺힌 원한을 풀 때가 다가왔다.
츠캉! 카가강!
하오문에도 고수는 많았다.
백가장 무인들을 막을 만큼 대단한 자들답게 실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가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거치적거리는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려라!”
첫째는 습격을 하려고 숨었던 숲속이었다. 자신들의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반대로 적 역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워낙 빠른 청운이었다.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였다. 나무들 때문에 순간순간 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기를 반복하다 보니 제대로 상대할 수가 없었다.
“암기와 독을 던져라!”
두 번째는 무기의 선택이었다.
본신의 무공으로 직접 상대했어야 했다. 청운을 붙잡고 물고 늘어졌어야 했다.
지금처럼 신법을 이용해서 활개 치지 못하게 발을 묶었어야 했다.
그러나 하오문은 암기를 쏘고 독을 뿌렸다.
청운의 자유로운 발을 붙잡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
암기를 피하고 검을 휘두르고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청운의 공격을 막아내면 다행이지만 막지 못하면 일검에 죽임을 당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백가장 놈들이 천라지망을 펼치려는 것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계곡 아래 조금 높은 곳에서 싸움터를 내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하오문의 천위대를 이끄는 천주와 핵심 인물들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물릴까요?”
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많은 부하가 청운에게 죽임을 당했다.
더 볼 것도 없는 자신들의 패배였다.
자신이 뛰어들면 상황이 변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가는 저 뒤에 있는 백가장이 달려들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손속을 겨뤘기에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놈이 나타나서 그 균형이 무너졌다.
자신이 나선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믿을 수가 없군. 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라니.’
사내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가 볼 때 청운은 이제 겨우 약관이나 되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화경의 고수인 자신이 경계해야 할 만큼 대단한 고수로 보였다.
‘과연 백가장이란 말인가?’
백가장은 천하제일인을 배출한 몇 안 되는 가문 중 한 곳이었다. 빛바랜 명성이건만 그들의 잠재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 그 저력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하오문 천위대 천주는 청운이 백가장 사람이라 생각한 것이다.
대단한 오해였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청운과 백가장이 손을 잡았으니 말이다.
삐이익!
긴 호각 소리가 계곡에 메아리쳤다. 퇴각을 알리는 하오문의 신호였다.
천라지망이 형성되기 전에 몸을 빼내야 했다.
그 역시 몸을 빼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청운이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저기 절벽 중간에 정예들이 모여 있다.]
-어쩐지 놈들이 약하다 했습니다.
하오문 천위대 전력이 처음 상대했던 자들보다 약했다. 의아한 마음이었는데 혈황 덕에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운은 빠르게 공격하며 한 명이라도 더 상대했다.
그러고는 땅을 박차며 비천무영신법을 극상으로 펼쳤다.
그는 허공에 긴 잔상을 남기며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놈들이 지켜보는 곳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번쩍!
무언가 빛이 번쩍이더니 곧장 한 마리 청룡이 길게 울음을 터트렸다.
“놈!”
청운을 지켜보던 천주가 호통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냥 물러서려 했건만 싸움을 걸어왔다.
놈이 이대로 설치게 놔둔다면 후퇴할 때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천주는 청운의 기세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다 판단하고 공력을 끌어 올렸다.
구오오옹!
쩌저저정!
그의 쌍장에서 가공할 거력이 쏟아졌다.
검붉은 흑룡이 청운이 만들어낸 청룡을 향해서 돌진했다.
콰과과광!
계곡이 폭음에 난장판이 되었다.
폭풍 같은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채재챙
뿌옇게 변해버린 허공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청운과 천주가 격돌하면서 발생한 소리였다.
천주는 예상대로 화경에 오른 고수였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강자의 출현이었다.
그가 화경에 올랐다는 것도 혈황이 조심하라며 알려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청운은 천주의 실력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크윽.”
청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비슷한 게 아니라 한 단계 위의 실력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싸움에서 밀린 적이 없었는데 상대가 너무 강했다.
청운이 천주의 기세에 밀릴 때 혈황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놈! 강자를 만나면 상대에 따라서 대응하는 법이 다르게 하라고 일렀거늘 무얼 하는 것이냐?]
천둥소리만큼 커다란 소리가 청운의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아주었다.
혈황이 혀를 차며 조언을 해주었다.
[쯧쯧, 강을 강으로 부딪치면 부러진다. 네 녀석이 강하긴 하지만 상대에 비해서 덜 여물었다. 이럴 때는 유의 묘와 쾌를 이용한 빠른 연격으로 놈의 움직임을 봉(封)해라.]
무거워졌던 청운의 검이 금세 변했다.
차자자장.
강하게만 맞서던 검격이 연환세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