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화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대향림에는 십여 개가 넘는 암자와 절이 존재했는데, 그들이 있는 사찰도 그중 한 곳이었다.
“진무사님. 어서 오십시오.”
“도움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가장 어른들이 나서서 청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모두가 내공이 안으로 갈무리된 강자들이었다.
청운 역시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야 경내의 넓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둘러앉은 이들은 통성명하고 앞일을 상의했다.
“대인, 백가장의 삼장로 백영상이라 하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쭙고 싶소이다.”
“말씀하시지요.”
“이 험준한 곳까지 어쩐 일로 오셨소이까?”
백영상은 나이답지 않게 다부진 체격이었다. 그는 뜬금없이 나타난 청운의 저의가 궁금했다.
“백가장 어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종의 일로 하오문을 조사하던 중에 백가장과 하오문의 은원을 들었습니다. 하오문에서 고수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장 달려온 것인데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청운이 백가장의 어려움을 듣고서 달려왔다고 하자, 백가장 사람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한 말씀이구려. 그런데 진무사께서 하오문을 조사하시다니, 그들이 무슨 문제를 일으켰소이까?
백영상은 청운이 황제의 밀명을 받고 역적을 잡기 위해서 움직인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오문을 조사한다는 말에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청운은 백가장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곳에 온 터라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역모와 관련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 단지 하오문은 취급하면 안 되는 물건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앵속이라는 것인데,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이지를 상실하게 만들어서 폐인으로 만드는 물건입니다.”
“으음, 앵속이라면 이 늙은이도 들은 적이 있소이다.”
“저는 이번 일의 원흉이, 소흥을 지배하고 있는 소흥객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역시 그렇게 판단하고 있소이다.”
백영상은 현재의 대치 상황을 청운에게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하오문은 천위대를 파견해서 우리의 앞을 막고 있소이다. 인원만 해도 우리의 세 배가 넘고, 초절정의 무인도 여럿이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들을 이끄는 인물의 무위가 가늠이 안 되고 있소이다.”
“설마 화경의 고수라도 된단 말씀이십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리 예상하고 있소이다.”
“아직 싸워보지 못한 것입니까?”
“그자는 뒤에서 구경만 할 뿐 앞에 나선 적이 없소이다.”
청운은 백영상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다.
‘화경의 고수에 초절정에 이른 무인이 적어도 다섯이다. 여기에 절정급 무인이 수십 명이고, 일류 무인은 수백이나 된다. 그런데도 대치만 하고 있다고? 이해가 안 되는군.’
하오문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현재 백가장 전력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하오문이 그 전력으로 이들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백가장의 진법 때문인가? 아니면 싸움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서 적당히 대치만 하고 있는 건가?’
청운은 둘 중 하나라 생각했다.
이곳에 오면서 봤지만 백가장의 합격술은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 속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을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하오문이 싸움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백가장의 저력이 두려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흉계를 꾸미느라 전력을 다 드러내지 않는 걸까?
그런데 침통한 표정의 백영상이 말을 이었다.
“대인, 청이 하나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이곳 대향림을 벗어날 때까지 만이라도 함께했으면 합니다.”
백영상의 제안은 청운이 바라던 바였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면 당분간 항주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좋습니다. 이번 일에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대신, 저도 청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백영상 역시 크게 기뻐하며 청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항주 하오문의 힘이 알려진 것과 달리 강해서 고전을 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백영상은 주위에 있는 다른 식솔들을 돌아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청운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다른 일이라면 선조의 유훈 때문에 어렵지만 하오문의 일이라면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승낙을 받았다.
백가장이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면 항주에서 하오문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오대세가에 비해서 한 수 아래로 보았다.
그러나 청운은 백가장의 실체를 일부나마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이 속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이들의 전력은 천하 그 어떤 문파보다 강하거늘….’
남들 눈에는 다 망해가는 가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 눈에는 거대한 힘을 가진 문파로 보였다.
하오문 천위대를 상대로 그들이 보여줬던 합격진만 해도 놀라운 진법이었다.
다섯이 수십 명을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았었다. 그러한 진법을 지니고 있는 문파가 몇이나 될까.
청운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백가장이 이 기회에 다시 세상으로 나올지도 모르겠구나.’
수백 년간 웅크린 채 힘을 기른 가문이다.
혈황도 백가장을 마교와 쌍벽을 이룰 만큼 강한 가문이라고 평했지 않은가.
이들이 선조의 유훈을 무시하기로 작정하면 그 순간 강호의 세력이 재편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백영상이 동의하면서 청운과 백가장의 협상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대향림을 벗어나 소흥을 치는 일까지 함께하기로 했다.
백가장에서는 그 대가로 항주에 일 년간 무인을 파견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야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자 일단의 무리가 경내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외부로 정찰 나갔던 다른 이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정찰대는 십여 명의 남녀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년 사내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인원 가운데 한 명이 청운과 눈이 마주쳤다.
“응?”
“어?”
둘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막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묘령의 여인이 청운을 발견하고는 다다다 달려와서는 청운 앞에 섰다.
“어머, 매정하신 이삼원 공자님 아니세요?”
“묘 소저가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청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자룡궁이 있는 안휘성 탕산 객잔에서 마주쳤던 묘청청이었다.
당시에 묘청청 때문에 자룡궁 넷째 아들인 구용만과 객잔에서 시비가 붙었지 않은가.
묘청청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을 기억하네요. 저는 급히 떠나시길래 이름도 기억 못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 공자께서는 어쩐 일이세요?”
“백가장에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소저께서는 백가장과 어떤 관계입니까?”
청운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묘청청에게 물었다.
묘청청이 방긋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헤헤, 사실 제 성은 묘가 아니라 백이에요.”
“하하, 그럼 묘청청이 아니라 백청청이군요.”
“맞아요. 그때는 사정상 이름을 밝힐 수 없었어요.”
백청청과 청운이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묻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웠다.
둘이 무슨 관계인지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아참, 보고하고 금방 올 거니까, 지난번같이 도망가시면 안 돼요.”
백청청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는 휭하니 자리를 벗어나서 함께 온 정찰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청운을 힐끔 보더니 보고를 위해서 자리를 이동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무척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청운을 보았지만 접근해서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청운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백청청이 다시 나타났다.
볼을 부풀리며 도도도 달려오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 공자님.”
“가셨던 일은 잘 처리하셨습니까?”
청운은 새침한 표정을 짓는 백청청을 웃으며 맞았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흥.”
팔짱을 끼며 고개를 홱 돌리는 백청청이었다.
“소저,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삐진 표정을 짓고 있는 백청청을 보며 청운은 의아한 마음이었다.
청운의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이 공자님 얘기 다 들었어요. 어떻게 제게 이삼원이라고 거짓말을 하신 거죠?”
“아! 이름 때문이군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이름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자룡궁 문제가 있어서 본명을 밝힐 수 없었지요.”
백청청에게 왜 변명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변명을 늘어놓는 청운이었다.
“좋아요. 이번에는 제가 봐줄게요.”
“고맙습니다, 소저.”
청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사죄까지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청운의 한숨에 혈황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멍청한 녀석.]
백청청은 찰거머리처럼 청운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공자님…….”
청운은 그런 백청청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어지는 질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줘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 사이의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백청청이 청운과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이며 매우 친한 사이라는 소문이었다.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었지만 그녀가 워낙 붙임성이 좋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쪽에서 누군가는 두 눈에 불을 켰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사찰 경내에서 하룻밤을 보낸 청운은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이미 백가장 식솔들은 부산을 떨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서 단숨에 소흥으로 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청운은 걱정이 되었다.
‘이들이 이대로 소흥에 들어간다면 끔찍하군.’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안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그들이 혈겁을 일으킨다면 누구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청운은 백 명이 훌쩍 넘는 백가장 무인들과 함께 사찰을 나섰다.
그들은 소흥으로 향하는 산길 중 하나를 택하고 이동했다.
처음에는 하오문을 상대할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었다. 그들을 끌어들여서 공격하거나 함정을 파자는 내용이었다.
두 패로 나뉘어서 선발대가 먼저 가며 적을 유인하고 본대가 뒤를 치자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청운은 이를 전부 무시하고 정공법을 주장했다.
흩어져 있으면 서로 간의 유기적인 도움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유였다.
오랜 고심 끝에 백가장도 청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대향림은 숲이 우거져서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보지 못할 만큼 울창했다. 적이 숨어 있기 좋은 지형이 계속 이어졌다.
이런 곳에서 습격을 받는다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청운은 걱정하지 않았다.
숨어 있는 적을 발견할 자신이 있었다. 더욱이 자신 곁에는 아무도 모르는 혈황이 있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숨어 있는 적을 찾아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를 모르는 백가장 무인들은 온 신경을 동원해서 주위를 살폈다. 청운만이 산보를 나온 사람처럼 이동했다.
수색을 하듯이 이동하다 보니 이동이 늦어졌다. 보다 못한 청운이 나섰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놈들이 숨어 있다면 제가 먼저 찾아낼 것입니다.”
청운의 말이 있고부터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그 후로도 일행은 한참을 더 이동했다. 능선을 넘자 계곡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소로가 보였다.
선두에선 청운이 앞으로 나갈 때 혈황이 위험을 알렸다.
[계곡 아래 매복이 있다.]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자신의 기감으로 숨어 있는 적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혈황이 매복이 있다고 한 이상 저 아래 어딘가에 놈들이 웅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백영상에게 전음을 보내 위험을 알렸다.
-장로님, 계곡 아래에 놈들이 숨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