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82화 (82/257)

# 82

82화

이론으로 알던 글이 살아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청운은 그 길을 향해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만물의 생과 사.

사멸과 생성의 이치.

천지만물이 창조되고 소멸하는 법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

절로 환희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깨달음에 청운은 무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우우우웅.

내공이 천지의 기운과 공명하는 모습에 혈황은 깜짝 놀라며 청운을 보았다.

청운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안타까웠다.

[하필 이런 자리에서 깨달음이라니.]

안정된 자리에서 깨달음이 찾아왔다면 보다 높은 경지를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었다.

누군가 청운이 숨어 있는 곳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리된다면 청운에게 찾아온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순간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문제는 백가장이 버티기 힘들 것 같다는 것이다.

“크윽.”

아니나 다를까 무적의 방어를 보이던 백가장의 진법 한 축이 무너졌다.

한 사내가 옆구리를 파고든 암기를 미처 쳐내지 못하고 상처를 입은 것이다.

“질긴 새끼들, 드디어 끝나는군.”

진법이 흔들리자 공격하던 자들이 득의의 미소를 날렸다.

혈황은 힐끔 싸우는 자들을 보다가 다시 청운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직 시간이 있군.]

진법이 무너졌는데도 혈황은 안도했다. 아니, 걱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금세 나타났다.

하오문 무인들이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차자자자장.

백가장 무인들이 진법에 변화를 줬다.

그들은 상처 입은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사방을 점했다.

오행이 사상으로 변했다.

“젠장! 이번엔 사상진이야?”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의 말대로 진법이 달라졌다. 다시 얼마나 공격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서둘러라! 놈들의 증원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

대장인 듯한 중년인이 명령을 내렸다.

웅, 우우웅.

청운은 여전히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청운을 보고 있는 혈황은 속이 타들어 갔다.

그도 지금이 청운에게 다시없을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놈들이 다 죽어도 모른 척할까?]

생각 같아서는 백가장 무인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백가장 무인들이 죽거나 진법이 깨지면 주변에 큰 변화가 오고 청운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 뻔했다.

[진법이 깨지면 저 녀석도 깨어날 텐데.]

변화가 일어나면 무아의 경지가 깨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저들이 말한 대로 백가장을 돕기 위한 증원군이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확 내가 나서서 쓸어버릴 수도 없고.]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일장에 쳐 죽이고 싶었다.

어디 감히 자신 앞에서 되지도 않는 무공을 뽐낸단 말인가? 그것도 이 중요한 시간에 말이다.

초조한 혈황만큼 백가장의 무인들 역시 지치고 힘들었다.

“버텨!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했다. 이미 다섯 가운데 둘이 상처를 입었다. 당장 목숨에 지장이 없지만 이대로 둔다면 병신이 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남은 넷이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넷 명이서 펼치는 사상진 역시 강했다.

마지막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최후에 남은 두 명 중 한 명이 쓰러졌다.

남은 건 혼자였다. 그 역시 진이 깨지면서 균형을 잃고 말았다.

풀려버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를 앙다물며 부르르 떨리는 손아귀에 힘을 주고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후우.”

심호흡하며 자세를 낮추고 하단으로 검을 내렸다.

백가장이 자랑하는 일검파천황의 기수식이었다.

“아! 여기까진가?”

무인의 삶은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이런 마지막을 꿈꾸지는 않았다.

“불꽃같은 삶을 살고 싶었거늘.”

언제 죽어도 화려하게 죽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았다. 눈앞에 개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일검이라도 펼쳐서 한 명이라도 데려가야 하건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다가오는 검을 피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챙!

사내의 목을 공격하던 검이 튕겼다.

연이어 사내의 몸을 파고들던 공격들마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차자자장.

“웬 놈이냐?”

백가장 무인을 공격하던 하오문 무사들은 사방을 둘러보며 외쳤다.

전의를 상실한 사내가 막아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이때 장내로 내려서는 인물이 있었다.

허공을 밟듯이 내려서는 인물은 청운이었다.

스르륵.

극상의 경공술을 펼치며 내려선 청운은 백가장 인물을 한 차례 보더니 수십 명의 하오문 무인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스릉.

청운의 허리춤에 메인 검이 시리도록 맑은 검신을 드러냈다.

검이 뽑힘과 동시에 무언가 번쩍이더니 오른쪽에 있던 하오문 무인 셋이 풀썩 쓰러졌다.

“무슨?”

“고수다!”

단 일수에 셋이 쓰러지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잠시 공황 상태에 빠지자 청운은 주저 없이 움직였다.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가며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서걱.

채재쟁!

청운이 움직이는 곳마다 검광이 번득였다. 그의 검을 막아내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막지 못하고 썩은 집단 쓰러지듯이 쓰러졌다.

잠깐 사이에 하오문 무인 십여 명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천위대 조장은 청운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전력을 다해서 반격했다.

직선으로 파고드는 그의 공격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청운은 밀고 들어오는 조장을 향해서 강한 일격을 뿌렸다.

차자자장.

허공에서 둘의 검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서로의 요혈을 노리는 칼날이 햇살에 반짝였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공방이 펼쳐졌다.

그렇게 오 초식쯤 지나자 승산이 명확히 갈렸다.

천위대 조장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내상을 입은 듯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다 결국,

“컥!”

외마디 비명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검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가자 천위대 조장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청운의 검에서 뻗어나간 거센 검기가 천위대 조장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조장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상체가 허리에서 분리됐다.

쿵!

“조장님!”

“이 자식 죽여버리겠다!”

일격에 조장의 몸이 두 쪽이 나자 천위대 무사들의 두 눈이 돌아갔다. 그들은 청운을 향해서 달려들며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청운은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하오문 무인들을 지옥으로 보내주었다.

짧은 순간에 하오문 천위대를 전멸시킨 청운은 허공에서 검을 털며 착검했다.

그런 청운을 살아남은 백가장 무인들이 바라봤다.

마지막까지 서 있던 사내가 포권을 취하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저희는 강서백가 사람이고 저는 백상우입니다. 은인께 목숨 빚을 졌습니다. 누구신지 알려주신다면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청운 역시 백가장과 인연을 만들고 손을 잡기 위해서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백상우의 반응에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이청운입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 했습니다. 저 역시 하오문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은혜랄 것도 없습니다.”

청운의 인사에 사내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그는 기뻐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형제들의 부상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 후에 드리겠습니다.”

그는 서둘러서 형제들의 상세를 살폈다.

모두 중상이었는데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응급처치를 마친 둘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대협. 혹시, 관에 계신 분이십니까?”

“어찌 아셨습니까?”

“동생이 관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인물이 황실에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이름과 용모가 대협과 비슷합니다. 혹시 맞는지요?”

청운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속으로 놀랐다. 설마 백가장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지, 지금 역용하고 있는데.’

용모가 비슷하다는 말은 이해가 안 됐다.

분명 중년인으로 역용하고 있었다. 자신 말고 황실에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무관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청운의 의문에 혈황이 한마디 했다.

[역용 풀린 지 오래다.]

‘아!’

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자신의 역용이 풀렸다면 백상우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혹, 동생분이 하남성 상구의 백연우 위지휘사 아닙니까?”

“맞습니다. 기억하시는군요. 한 번 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청운은 상구의 위지휘사가 백씨 성을 쓴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와의 만남은 부드럽지 않았었다.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었기에 조금은 강압적이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그가 강서백가 인물일 줄이야.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러니 잠시 이들을 돌봐주실 수 있으신지요?”

응급처치를 했지만 사람을 불러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제대로 된 곳으로 보내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불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청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군요. 아무래도 백가장 사람들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백상우는 자신의 기감에 아무것도 포착되지 않았기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곧 청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백가장에서 보낸 지원 무사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일단의 무리가 경공을 펼치며 내려섰다.

“괜찮으냐?”

후두두둑.

남녀로 구성된 백가장 사람들은 주위에 널려 있는 시체를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시체들이 이제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았던 하오문 무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더욱이 정찰을 나간 다섯이 수십 명이나 되는 자들을 상대로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실력이 있었다면 진작 놈들을 물리치고 소흥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의문도 잠시였다.

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노인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청운을 발견하고 백상우에게 물었다.

“상우야. 그런데 이 소협은 누구시냐?”

“예, 이분은 이청운이라는 황실분이십니다. 연우가 전에 알려온 진무사입니다.”

“아! 삼원을 하셨다는 그분? 그럼 진무사께서 도움을 주신 것이더냐?”

“예, 진무사께서 이들을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허허. 가문에서 큰 은혜를 입었구나.”

장로 신분의 노인은 수염을 한 차례 쓰다듬더니 몸을 돌려서 청운에게 포권했다.

“대인, 백가장에서 장로 신분을 가진 백영귀요. 이처럼 아이들을 살려주시고 적을 물리쳐 주시다니 뭐라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극진한 인사에 청운 역시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깊이 숙여 화답했다.

다친 자들을 들것에 옮기고 죽은 하오문 무인들을 수습했다.

“아무리 적이라 하나 이대로 산짐승의 먹이로 둘 수는 없다.”

백영귀 장로가 손짓하자 한쪽 땅거죽이 비명을 지르며 솟구치더니, 땅이 일 장 가까이 파였다.

그가 이번에는 시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신들이 구덩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공섭물을 가볍게 펼치다니, 내공이 대단하군.’

청운은 백영귀의 내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백가장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대단한 가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뒷수습이 끝나자 청운은 그들을 따라서 본대가 있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과연 백가장 본대에는 또 어떤 고수가 있을까?

청운은 기대감에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혈황이 그 모습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 뜨거운 맛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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