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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74화 (74/257)

# 74

74화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며 말했다.

“양 사제, 오랜만이야.”

양 사제라고 지목당한 노인은 얼굴색을 굳히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화산파의 장로인 그는 양청호라는 자였다. 지금은 원로원에서 지내고 있는 화산의 숨은 고수.

“사저(師姐),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나야 늘 그렇지. 사제도 많이 늙었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이 둘의 대화에 끼어드는 이는 없었다.

“나를 잡으러 온 거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기로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게 벌써 삼십 년도 더 지났어.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강호 유람 좀 하려고 나온 거야. 그 정도는 눈 감아 줄 수 있잖아?”

양 사제라 불린 양청호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녀의 말대로 한매는 노파였다. 무공을 익혔기에 얼마나 더 오래 살지는 모르지만 천하를 돌아보고 싶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허락한다 할지라도 문파의 엄중한 규율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시다면 연통을 넣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저라도 설득했을 것 아닙니까?”

“흥, 이 나이에 그놈들에게 머리를 숙이기 싫었을 뿐이야.”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이미 한매는 모든 일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모든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법입니다. 제 검이 무정타 원망하지 마십시오.”

양청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한매 역시 차갑게 눈을 빛내며 일갈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던가? 내가 저지른 일, 내가 풀도록 하지.”

파밧.

한매가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양 사제에게 곧장 날아갔다.

양청호는 벼락처럼 검을 뽑아 들며 날아드는 한매를 향해서 쭉 찔러 넣었다.

채앵!

한매의 소매가 늘어나며 앞으로 날아갔고 양청호의 검과 부딪쳤다.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청호의 신형이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사방을 밟아나가며 검을 휘날렸다.

차자자자장.

한매의 소매가 부드럽게 양청호의 검을 감쌌다.

하나처럼 움직이던 둘이 떨어졌을 때 왜 쇳소리가 울렸는지 알 수 있었다.

찢긴 한매의 소매 사이로 한 자루 잘 벼려진 검이 숨어 있었다.

“한백풍월검법은 여전하시군요.”

“흥. 사제의 매화검 역시 매서운데.”

잠시 서로를 노려보더니 다시 한 몸이 되었다.

허공에 수십 송이의 매화가 떠올라서 한매를 향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갔다.

한매는 폭풍처럼 매화송이에 맞섰다. 그녀의 검은 매화송이를 쳐내기보다는 품에 안는 모습이었다. 그 장엄한 모습에 청운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둘이 만들어내는 풍경화에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할 때 일이 벌어졌다.

슈슈슉.

“크윽.”

한매와 같이 있던 몸종으로 보이던 여인이 쌍장을 휘젓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한기가 폭사되었다.

-빙혼마녀 한국이군요.

[호, 저년도 주안술이나 방중술을 익혔군.]

채양보음술(採陽補陰術)은 여성이 남성의 양기를 빨아들이는 방중술이다.

이 방중술을 익히면 무공이 강해지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정기를 빨린 상대는 나이에 비해서 노환이 빨리 오고 심할 경우 목내이가 되어 말라죽기도 한다.

소수마공을 접해봤지만 빙공을 처음 접하는 청운은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빙공의 고수들을 상대하기가 저런 이유로 까다로운 것이다. 실상 그들의 무공은 별것 아니다.]

혈황의 설명을 들으며 청운은 다시 한번 새로운 무공의 세계에 발을 드리웠다.

한편, 빙혼마녀의 개입으로 놀란 건 화산파였다.

둘의 대결에 빠져 있다가 뒤통수를 당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들은 대 화산파의 무인들이었다.

“갈! 정신 차리고 십방매화진을 펼쳐라!”

십방매화검진(十方梅花劍陳)은 화산파가 자랑하는 진법이다.

매화검수들이 하나가 되어 모든 방위를 점하고 적을 무찌르는 비전검진이었다.

소소검 한매를 상대하려고 준비한 검진인데 뜻하지 않게 빙혼마녀를 상대하게 되었다.

부상자를 뒤로 물리며 열 명이 하나가 되어서 펼치는 검진 속에 갇힌 한국은 이를 악물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매화를 닮은 검기에 기겁을 했다.

일대일로 맞상대한다면 이들 열 명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진법의 특성이 더해지자 감당하지 못할 만큼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십방매화검진을 펼치는 매화검수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단칼에 결판을 내겠다고 공격할 수도 있지만 상대는 빙혼마녀 한국이었다. 한순간에 주도권을 뺏길 수도 있었다.

양쪽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한매와 대결하는 양청호는 팽팽하게 맞섰다.

다른 화산파 무인들은 이들을 둘러싸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때 한쪽에 숨어 있던 자들이 움직였다.

함정을 판 건 화산파지만 정작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그들이 당한 꼴이었다.

수십 명이 바람처럼 경공을 펼쳐서 장내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달려오는 모습에 구경하던 화산파 무인들이 고함을 치며 맞섰다.

“적이다! 놈들을 막아라!”

“우아아아아!”

싸움은 순식간에 혼전으로 치달렸다.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뻔한 것 아니냐.]

화산파의 전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자룡궁의 정예들보다 떨어지지 않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몰려드는 영풍장 무인들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몇몇이 문제였다.

팽팽하던 균형을 무너트리는 데는 그 몇 명만으로도 충분했다.

양청호가 일갈을 터트리며 명령을 내렸다.

“십방매화검진을 풀고 만화천검진(萬花天劍陳)으로 바꿔라. 남은 매화검수들은 칠성검진(七星劍陳)으로 강적을 막아서 제자들을 보호하라!”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매화검수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한국이 그들을 붙잡아두려 했지만 전신요혈을 파고드는 만화천검진의 공세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양청호는 검끝을 하늘로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전면을 향해 휘둘렀다.

슈욱!

쓔슈슈슉!

화려한 매화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한매를 향해 날아갔다. 한매는 직접 맞서지 않고 빙그르르 몸을 회전시키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틈을 이용해서 양청호가 사방을 훑어보더니 다시 명령을 내렸다.

“매화검수는 매화검진(梅花劍陳)으로 진을 변형해 제자들을 보호하고, 다른 제자들은 육합검진(六合劍陳)과 삼재검진(三才劍陳)으로 짝을 이뤄서 적을 상대하라!”

화산파가 자랑하는 검진들이 연이어 펼쳐지며 검광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청운은 뜻하지 않은 눈 호강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공연하듯이 보여주는 검진이 아니었다. 목숨이 달린 생사대결에서 펼치는 검진은 정교하고 날카로웠으며 예리했다.

화산파가 가진 최고의 검진들을 한자리에서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혈황은 그런 검진들을 보며 일일이 설명을 해줬다.

기문둔갑과 역의 이치를 잘 아는 청운은 검진의 정수를 잘 살펴볼 수 있었다.

양측은 흥미진진한 대결은 물고 물리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미 양측의 사상자가 십여 명이나 되었다. 쓰러진 이들을 보살피지도 못할 만큼 격렬한 싸움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에서 다른 이들이 달려왔다.

[원군이 오는구나.]

혈황의 말에 청운은 기감을 더 넓혔다.

-영풍장 무사들이군요.

그들이 온다면 화산파는 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운형검 한죽도 있군.’

소소검과 짝을 이뤄서 평생을 함께했다던 한죽이 보이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이제야 달려오나 보다.

그런데 그들의 반대 방향에서도 다수의 무사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정파의 무사들이 화산파를 도와주기 위해서 달려오는 듯했다.

청운은 그들을 보고 눈을 좁혔다.

‘고수가 적다.’

숫자는 많았다. 그런데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인원이 적었다. 특히 운형검 한죽을 상대할 무인이 없었다.

“응?”

청운은 숨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깜짝 놀라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였다. 청운을 향해서 환하게 미소 지어주던 그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혈황은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청운을 보았다.

[후후.]

잔뜩 일그러진 청운의 모습이 신기한 듯 피식 웃음까지 지었다.

새롭게 나타난 영풍장 무인들이 장내에 뛰어들고, 곧이어 진설란과 함께 온 이들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차자자장.

챙챙 채채챙.

싸움이 점점 더 치열해졌다.

혈황이 전체를 살필 때 청운은 오직 진설란만 지켜보았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매화검수라 해도 일류 고수 서너 명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혈황이 천운을 보더니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걱정되면 도와주지 그러냐.]

청운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의 얼굴이 뇌신룡의 얼굴로 변했다.

“아무래도 일이 많이 틀어지겠습니다.”

[후후. 어떤 일이든 계획대로 흘러가면 재미가 없는 법이지.]

땅을 박찬 청운이 허공에 높이 뛰어올랐다.

그가 뽑아든 검에는 푸른빛의 영롱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하늘 위에 높이 뜬 청운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서더니 검이 날갯짓하듯이 펄럭였다.

이내 아래를 향해서 강하게 휘둘렀다.

“뇌룡출격!”

번쩍!

거대한 한 줄기 벼락이 지상을 향해서 쏘아졌다.

한 마리 용이 뇌기를 품고 지상을 향해서 나아갔다.

쩌저저정!

무인들의 머리 위에서 몸을 튼 용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빠지지지직!

콰과과광!

“크아악!”

“허억!”

갑작스러운 공격에 영풍장 무인들이 기겁했다.

한참 싸움을 벌이던 자들이 대경해서 뒤로 물러섰다.

혈황도 청운의 공격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호! 이놈 봐라.]

그동안 청운의 무공이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하던 혈황이었다. 그런데 청운의 혼신이 담긴 일검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했다.

전장의 중앙에 내려선 청운이 주위를 둘러보며 일갈했다.

“멈춰라!”

모든 시선이 청운에게 집중되었다. 청운의 역용한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놀라서 외쳤다.

“뇌신룡이다.”

“저자가 여기는 어떻게 나타난 거지?”

뇌신룡을 알아본 영풍장 사람들이 청운에게 말했다.

“대협, 강호의 은원을 해결하는 중이니 빠져주시오.”

곱지 않은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운의 일격에 쓰러진 십여 명의 인물은 모두 영풍장 무인들이었다.

청운은 차갑게 인상을 굳히며 영풍장 무인들을 보았다.

“나도 화산파와 관계가 있어서 그건 어렵겠고, 꼭 싸움을 이어가야겠나?”

“호호호.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청운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빙혼마녀 한국이었다. 그녀가 시리도록 맑은 소수로 청운을 가리키며 깔깔 웃었다.

“네놈이 요즘 이곳에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뇌신룡이렸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기는 하오.”

“듣기로는 한란이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던데, 우리를 돕지 않고 화산파 편을 들겠다는 것이냐?”

한국은 이미 청운이 펼친 무공이 예사롭지 않음을 지켜보았다. 이대로 화산파 편을 든다면 좋을 게 없었다.

“이 싸움이 그 여자와 무슨 상관인데?”

“뭐라? 깔깔깔.”

깔깔거리고 웃은 한국이 이내 표독스러운 얼굴을 하며 청운을 쏘아붙였다.

“네놈 하는 짓이 귀엽구나. 무슨 의도로 우리를 능멸하려는지 모르지만, 네놈이 적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구나.”

그동안 청운이 적인지 아군인지 의견이 분분했었다. 백살마녀 한란과 잘만 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격이기에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적이란 게 확실해졌다. 그리고 적이 확실한 이상 죽이는 것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찌잉!

한국의 주변이 급속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부터 시작된 하얀 서리가 주위로 뻗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영풍장 무인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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