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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70화 (70/257)

# 70

70화

“남자는 은원이 분명해야 합니다. 받은 게 있으면 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요. 우리 팽가는 이번 일과 관련해서 진무사와 척을 지지 않을 겁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팽자경도 한마디 했다.

“그럼, 은혜를 모르면 가운데 거시기를 잘라버려야 해.”

* * *

청운은 자룡궁에 있는 동안 강호풍 등과는 억지로 만남을 피했다. 괜한 구설수로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몇 가지 시급한 일을 처리했다.

먼저 스승인 묘청 선생에게 장문의 서찰을 보냈다. 자신이 백성을 위해서 살겠다며 지켜봐달라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로, 살아남은 백풍장 식솔들을 백풍장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황제가 내린 진무사 인장이 찍힌 서찰은 금의위를 통해서 중원 각지로 전해졌다.

송 천호장 휘하의 금의위들이 한 조씩 움직였다.

그들이 자룡궁으로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지급으로 시행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세 번째는, 송인호에게 지시한 대로 대대적인 전수조사에 들어갔다.

이 역시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특별히 외부의 압력을 무시하라는 말과 함께 외압이 들어오면 명단을 작성해서 보고하라는 말을 남겼다.

공가장 별채로 돌아온 청운은 오랜만에 느긋이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청운이 찻잔을 들어서 입을 축이고 나자 곁에 있던 혈황이 물었다.

[할 일도 많은데 굳이 그들까지 돌봐야겠느냐?]

청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혈황을 보았다.

지난 며칠간 잠잠히 있던 혈황이었다. 뜬금없이 묻는 말이지만 예상한 질문이기도 했다.

“제 마음이 그러라 시키고 있습니다.”

[말은 좋구나. 네 녀석이 당장 할 일은 원수를 갚는 일이라는 것을 잊은 것 아니냐?]

“어찌 그 일을 잊겠습니까? 제 원수와 혈황님의 원수를 갚는 일을요.”

청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혈황이 보기에는 못마땅했다.

[그 두 가지 일을 처리하는 일만 해도 무림 전체와 싸워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청운 역시 흑막에 가려진 자들의 규모나 힘이 엄청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혹 그렇다 할지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복수보다 혈황의 복수가 만만치 않았다. 다행이라면 둘의 복수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혁련휘만 제거할 거라면 당장 복수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했다가는 겨우 잡은 신비단체의 꼬리가 잘려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참고 기회를 엿보며 몸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혈황은 여전히 못마땅했다.

[옛말에 일로매진하라는 말이 있다. 잘 알 것이다.]

“예, 학문을 익힐 때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거침없이 한길로 나아가라는 말이지요.”

[설마 우리의 원수가 가볍게 느껴진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 한순간도 원수들을 가볍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끄응.]

혈황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앞뒤 꽉 막힌 벽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학사 놈들의 똥고집하고는…….]

혈황이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을 달랠 때 청운이 말했다.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들을 외면하자니 너무 아파서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룡궁 노역장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백풍장 식솔들을 보았다. 너무도 초라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자룡궁 일을 책임진 이상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저도 어릴 때는 그랬습니다.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돌봐주지 않았지요. 아마 스승님께서 어린 저를 찾으러 나서지 않았다면…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거나, 춘궁기 때 잡아먹혔을 겁니다.”

청운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던 혈황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혁련휘는 그런 나를 몇 년 동안 짓밟고도 모자라서 죽이려고 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복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할 겁니다. 아버지를 죽인 혁련종도도 법에만 맡기지 않을 겁니다.”

청운이 고개를 돌려서 혈황을 응시했다.

“하지만 말입니다, 복수를 하겠다고 저처럼 어렵게 살아온 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혁련휘와 뭐가 다릅니까. 지금 돌아서면 아마 제가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이번 한 번만 저에게 져주세요.”

주르륵.

청운의 두 눈에서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혈황묘에서 처음 만났을 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피눈물을 흘렸던 청운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어도 울지 않던 청운이 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떨어질 것 같지 않던 혈황의 입이 움직였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울지 마라.]

“제가 언제 울었다고…….”

[지금 울잖아, 인마! 그쳐!]

그런데 이상했다. 소리치는 혈황의 눈에서 뭔가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어? 혈황님도 우시는 겁니까?

[누가 울어, 인마!]

빽! 소리친 혈황은 홱, 고개를 돌려서 창밖을 보았다.

청운은 자신의 제자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고 있는 제자.

아직 부족하고 배워야 할 것도 많지만, 그가 자신의 제자라는 것에는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자신의 제자가 그리 힘들게 살아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제길, 묘청 선생인가 하는 놈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군.’

◈ ◈ ◈

영풍상단의 표행이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들이 어디에 들렀고, 누구를 만났는지, 그 모든 정보가 들어오려면 적어도 석 달은 필요했다.

그동안 청운은 개방을 활용해서 영풍장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영풍장은 여전히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사나흘에 한 번 포구로 향하는 물건을 나르는 게 일과의 전부일 만큼 하는 일이 없었다.

도대체 이러고도 어떻게 그 큰 장원을 유지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여러 의혹 속에서 영풍장을 감시하던 어느 날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무리가 영풍장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청운에게 전해졌다.

딱히 이상할 것 없는 방문이었는데, 감시하던 개방도 한 명이 일행 중 한 명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자의 정체가 곧 밝혀졌다.

-소흥객으로 보이는 자 출연.

처음 소식을 접한 청운은 소흥객이 누군지 몰라서 소식을 접한 이에게 물었다.

“이자가 누군가?”

“항주 아래 소흥이라는 곳에서 활동하는 자입니다.”

소흥은 습지대의 수로가 발달된 곳에 형성된 성이었다.

그 규모 역시 현을 넘어 부에 이를 만큼 크고 넓었다.

큰길을 벗어나서 주택가로 들어서면 수많은 수로 때문에 길을 잃기 쉬운 곳.

덕분에 흑도의 범죄자들이 숨어드는 곳으로 유명했다.

복잡한 수로 위에 지어진 건물과 길들 때문에 금군이 토벌하기도 쉽지 않았다.

가끔 위지휘사가 새로 부임하면 토벌을 강행했는데, 연례행사처럼 시끄럽기만 하고 실적은 미미해서 요즘은 토벌도 하지 않는 곳이다.

소흥객은 바로 그 소흥 암흑가를 손에 쥐고 있는 거물이었다.

“대단한 자가 왔군.”

“예, 대인,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입니다. 소인도 예전에 언뜻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얼굴의 상처 때문에 겨우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소흥객의 왼쪽 눈 위에는 이마부터 볼까지 찢긴 흉터가 있다. 무언가 둔기에 얻어맞아서 찢어진 상처였다.

“그자가 육로로 왔는가, 아니면 수로를 통해서 왔는가?”

“수로로 왔다고 합니다.”

이미 소흥객의 동선은 파악되었다. 함께 온 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소흥객의 측근들일 거라 예상했다.

청운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뒤에 개방도를 치하했다.

“수고했네. 나가는 길에 금의위가 상으로 은자를 줄 것이니 요긴하게 쓰게.”

“대인, 감사합니다!”

개방도는 연신 청운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저 사람 하나 알아본 것뿐인데 포상이 내려질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돌아가는 개방도를 보며 청운은 생각했다.

‘저자가 소문을 내면 영풍장 감시가 좀 더 강화되겠지.’

개방에 부탁했어도 빈자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분명 어딘가에는 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포상한 일이 알려진다면 감시하는 자들이 눈에 불을 켜지 않겠는가. 이제는 자신들도 포상을 받기 위해서 더 철저하게 감시할 것이다.

소흥객 일행이 영풍장에 들어간 다음 날.

그들이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준비하고 있던 청운은 곧장 그들의 뒤를 밟았다.

처음 그들이 들어갈 때는 우마차 한 대를 가지고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나올 때는 빈 몸으로 나왔다.

뭔가 이상했지만 일단은 뒤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올 때처럼 돌아갈 때도 수로를 이용하려는지 배에 탔다.

‘이상하군.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으니.’

어딘가 다른 곳에 들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곧장 나루터로 온 것을 보면 다른 용무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그들이 오른 지 한참이 흘렀는데도 배가 출발하지 않았다.

돌아갈 생각을 하던 청운은 조금 더 기다리자는 혈황의 말에 멀리서 그들이 올라탄 배를 감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루터에 사람들이 몰려들며 짐을 나르기 시작할 때 우마차 두 대가 짐을 싣고 나타났다.

[저길 봐라.]

혈황의 말에 청운은 그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풍상단 무사들이군요.

[그래, 내 생각으로는 저 짐을 소흥객이라는 자가 탄 배에 실을 것 같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풍상단 우마차가 배 근처로 움직였다.

지난번과 같이 십여 명의 무사들이 배 근처를 둥글게 막아섰다.

근처에서 일하던 이들은 알아서 다가가지 않았다.

-혹시 지난번에도 이런 상황이었을까요?

[그럴 확률이 높구나. 한번 확인해 보자.]

-알겠습니다.

청운은 곧장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뇌신룡의 모습으로 변한 상태였다.

중년의 사내가 된 청운은 다시 어기적거리며 영풍상단 무리에게 접근했다.

청운이 접근하자, 앞을 막아서려던 무사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청운을 알아본 것이다.

“뇌신룡께서 이곳은 어쩐 일이십니까?”

“강 구경하러 왔다. 막을 거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지나가시지요.”

무사는 서둘러 길을 비켜주었다.

청운은 지난번에 강을 구경하던 그 자리로 걸어가서는 조용히 강물을 보았다.

영풍상단 무사들은 청운의 모습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허튼짓한다면 큰일이었다.

‘저자식이 왜 또 나타난 거지?’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옆의 무사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슬쩍 끄덕여 대답한 무사가 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가 영풍장으로 달려간다는 것을 청운은 알고 있었지만 관여하지 않았다.

청운이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 혈황은 우마차의 짐을 살펴보았다.

영혼인 상태여서 짐을 풀어보지 않고도 내용물을 대충은 볼 수 있었다.

빠르게 우마차 두 대를 훑어본 혈황은 어느새 청운 곁에 와서 섰다.

[앵속이다. 지난번처럼 윗부분 짐은 비단 같은 물품이고 아래 상자는 전부 앵속으로 채워져 있다.]

-역시 앵속으로 돈을 벌고 있었군요.

예상한 대로 영풍장은 상단을 이용해서 앵속을 거래하고 있었다.

앵속이 어디까지 흘러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청운은 그들이 거래하는 것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무사 하나가 청운에게 말을 붙였다.

“가시는 겁니까?”

청운은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왜? 볼일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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