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화
자룡궁은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사실 자룡궁의 힘이 남아 있다면 유야무야 넘어갈 일이었다.
힘 있는 자의 목소리가 크면 당연시되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그런데 그 힘 있는 자가 없어지자, 숨죽였던 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인, 백풍장과 비슷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잘 정리된 수많은 자료가 그 증거를 대신했다.
자룡궁이 행했던 정의수호라는 명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확한 증거가 부족했다.
심증은 분명히 자룡궁이 수작을 부렸다고 외치고 있었다.
사건의 당사자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오래된 사건이라 재조사를 한다 해도 제대로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빠드득.
청운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보고를 받는 내내 불편한 심기가 얼굴에 드러났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모조리 쳐 죽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청운은 분을 참지 못하고 혈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혈황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통이 난 그가 혈황에게 물었다.
-혈황님은 화도 안 나세요?
[내가 왜 화를 내야 하는 거지?]
-억울한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힘 있는 자에게 짓밟힌 자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쯧쯧, 아직 어리구나. 세상이 그런 것이다. 힘없으면 밟히는 것이고, 힘 있으면 밟는 것이다. 그게 싫으면 너처럼 성공하면 되는 것이고.]
너무도 냉정한 혈황의 말에 청운은 할 말을 하지 못했다.
혈황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죄 없이 당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자신도 어려서 힘없이 당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아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했고 공부를 잘한다고 두들겨 맞았다.
억울하고 분했기에 학문을 익힐 때 두려움 없이 용맹정진(勇猛精進)했었다.
그런데 자신만 바보처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너무도 많은 이들이 당하며 살고 있었다.
빠드득.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결국 청운은 무언가를 결심하고 석덕조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당장 자룡궁 사업장에서 노역하는 자들을 모조리 불러들이게. 자룡궁의 사업장을 잠정 폐지하고 그들을 다시 조사하게.”
“대, 대인.”
석덕조는 깜짝 놀랐다.
자룡궁에서 운영하는 사업장은 자룡궁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죄지은 자들을 불러서 강제 노역을 시키는 곳은 나라에서 허락한 사업장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일정한 세금을 내고, 뒤로는 상납을 하면서 관리들과 한통속으로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그 사업장을 건드리면 수많은 관리와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인,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장 자룡궁 문제도 해결이 안 되었는데 일을 벌이시다니요. 수많은 관리가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석덕조의 걱정 섞인 말에도 청운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당장 시행하지 않고 무얼 하는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석덕조는 청운의 불호령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청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봐도 노역에 끌려간 자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청운의 마음이 확고하니 더 말릴 수 없었다.
석덕조가 물러가자, 청운은 송인호를 불렀다.
잠시 기다리니 송인호가 들어와서 예를 갖췄다.
“대인,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시게.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힘들지 않은지 모르겠군.”
청운은 적당한 말로 송인호를 위무했다.
잠시 인사말이 오가고 난 후, 청운은 송인호를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자룡궁이 역모를 꾀한 일도 있지만, 백성들을 수탈한 정황이 잡혔네. 한둘이 아니어서 내 마음이 아프군.”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까?”
청운은 백풍장 이야기를 해주었다. 앵속과 조광 이야기는 빼고 그럴싸하게 설명했다.
“더욱이 서류를 확인해보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네.”
송인호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석연치 않은 몇몇 사건이 적힌 서류였다.
송인호는 청운이 건넨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송인호는 청운을 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대인, 위험합니다.”
“자네도 석 천호와 같은 말을 하려는 것인가?”
“이 정도 증거로는 자룡궁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대인께서 이 사건들을 들추시면 상대방은 분명히 꼬투리를 잡을 겁니다. 더구나 이 일에는 수많은 관리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과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분명히 역풍을 맞으실 것입니다.”
청운은 반박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인호의 말처럼 흘러갈 것이 뻔했다. 석덕조 역시 같은 말을 했으니 확실했다.
청운이 순순히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송인호는 다른 문제점을 꺼내들었다.
“대인, 그렇지 않아도 정파인들이 이곳에 남아서 사사건건 토를 달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그들이 아직 떠나지 않았는가?”
“떠나긴요. 오히려 구대문파 인물들이 새롭게 와서 조사를 같이 하는 중입니다.”
청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칫 황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대문파라면 충분히 관여할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송인호의 얼굴은 오히려 즐거운 표정이었다.
“자네는 정파의 개입이 즐거운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관여하는 바람에 서류작업이 한결 수 월해졌습니다.”
“허, 뭐라?”
청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관리라는 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호통이라도 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문제점이 발견되면 서로 비교하며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서류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있어서 일거리가 확 줄었습니다. 몇 가지 문제점을 그들이 찾아내서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흠…….”
듣고 보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빠졌을 문제점을 그들이 짚어준다면 그만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청운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어찌 되었건 원칙에서 벋어난 일이었기에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는 건 좋지만, 그들이 결정적인 증거를 누락시킬 수도 있는데.’
그들은 자룡궁과 얼마 전까지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아무리 정파라지만 그들을 온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자룡궁 역시 정파를 수호하는 세력이었지만 뒤로는 나쁜 짓을 일삼고 있었지 않은가.
생각을 마친 청운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정파 무인들은 내가 따로 만나보지.”
정파문제는 여기서 결정 내리기 모호했다. 자신이 그들을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송 천호, 잘 듣게.”
“예, 대인. 하명하십시오.”
“나는 말일세, 불의를 보고 그냥 넘기는 사람이 아니네. 한때는 힘이 없어서 숨을 죽이며 살았었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네.”
“…….”
송 천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온몸에 알 수 없는 전율이 휩쓸고 지나갔다.
애써 외면하며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청운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자네가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죄 없는 백성을 생각해서, 이번 일을 조사해줬으면 좋겠네.”
“…….”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한 점 의혹도 없이 조사해주게.”
송인호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청운의 의기가 담긴 말에 할 말을 하지 못했다.
청운을 위한다면 응당 반대함이 마땅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무모했다.
하지만 끝내 반대하지 못했다.
“대인, 그리하겠사옵니다.”
“고맙네.”
청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송인호의 손을 잡았다.
청운의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 송인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자룡궁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넓은 대전에서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많은 무인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진무사의 의중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자의 의중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안하무인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좀 더 강하게 맞서야 할 것입니다.”
청운이 무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면담을 요청했다. 그래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를 비롯한 많은 무인이 대전으로 몰려와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청운이 나타났다.
비어복을 차려입은 청운은 한 명의 무장처럼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청운에게 모였을 때, 한쪽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 형 아닌가.”
청운은 자신을 알아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몇 달 만에 다시 보는 인물들이 있었다.
진강장에서 대련을 했던 청성의 강호풍과 남궁세가의 남궁룡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하북팽가의 소가주 팽도천도 자신을 알아봤다.
“응? 네놈은 광마!”
청운은 그들을 향해서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다.
반가움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만남은 뒤로 미루었다.
오룡 중 셋의 곁에 있는 승려 역시 오룡 중 한 명으로 생각되었다.
‘소림이라고 했었나?’
그가 바로 소림사 출신으로 강호에 위명이 쟁쟁한 광표인 듯했다.
청운은 태사의가 있는 앞으로 걸어가서 뒤돌아섰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청운에게 집중되었다.
황제의 명으로 파견된 진무사이며, 이번 자룡궁 흉사의 원흉이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청운은 담담하게 무림인들에게 말했다.
“이청운이오. 만나서 반갑소.”
굳이 하대를 하기보다는 평대로 이들을 맞이했다.
그 이상의 높임말을 쓸 수는 없었다. 자신은 황제의 명으로 공무를 보고 있는 북진무사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청운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 있는 자들의 면면이 허술하지 않았다.
구대문파의 장로도 있었고, 오대세가와 무림 정파의 간부들도 여럿이 있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인사를 하는 중에도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들의 대표로 나선 이는 구대문파의 수장인 소림 승려였다.
“소승은 소림의 공야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공야대사.”
청운은 반장으로 인사하는 공야를 상대로 포권을 취했다.
공야는 소림 방장의 사제로 소림사에서 특별한 직책은 맡고 있지 않았다.
공야대사 곁에는 지난번에 보았던 청죽대사 공덕이 보였다. 그 뒤로도 여러 소림승이 함께하고 있었다.
“자룡궁의 혐의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일은 지인을 도운 일이지 역모에 가담한 일은 아닙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운을 직접 공격한 이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자룡궁은 그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었다.
“그럼 대사께서 생각하실 때 이번 일이 연좌제를 적용했다고 보시는 것이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자룡궁이 직접 행하지 않았고, 혁련장과는 사업적으로 연관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적당한 벌금과 관련자들의 처벌로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외공을 단련해서 그런지 다부진 육체를 지닌 포근한 인상의 공야대사를 보며 다른 이유를 물었다.
“대사. 자룡궁의 셋째제자가 역도인 혁련휘의 무공 사부라는 것은 어찌 생각하시오?”
“그건 대인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혁련휘를 가르친 자는 한때 자룡궁주의 제자 신분이 맞습니다. 그러나 일 년 전쯤 잘못을 저지르고 일반제자로 내려선 자입니다.”
“대사, 무슨 말씀이시오?”
청운은 처음 듣는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 보고받지 못한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