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66화 (66/257)

# 66

66화

청운은 검도 뽑지 않은 상태에서 손등으로 상대의 검면을 튕겨냈다.

빠지지직.

검면을 타고 청운의 뇌기가 흘러 들어갔다.

무사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청운은 몸을 떠는 무사의 가슴에 일장을 날렸다.

펑!

콰당.

기세 좋게 공격했던 무사가 일 수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살짝 그을린 무사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선두의 무사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당했는데도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무사들 중에서 쓰러진 인물의 무공이 제일 높았기 때문이다.

청운은 주춤거리는 무사들을 뒤로하고 저 끝에 있는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지붕까지 만들어서 휘장을 달고 있는 마차에는 여럿이 타고 있었다.

영풍장 내원에 있는 고수들이었다.

[조심해라. 저기 있는 여자의 기도가 심상치 않다.]

혈황의 말이 아니어도 이미 청운은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보고 있었다.

청운이 마차를 향해서 말했다.

“그만 나오는 것이 어떤가? 기다린 사람 성의도 있는데.”

청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차에서 무사 셋이 내렸다. 맨 마지막에 묘령인지 중년을 넘겼는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인이 내렸다.

청운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낀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듣던 거와 달리 괴물은 아니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보시다시피 팔 두 개, 다리 두 개 달린 평범한 사람이오.”

여인은 묘한 시선으로 청운을 보며 한 발 한 발 걸어왔다. 함께 내린 무사들은 그녀를 호위하듯이 함께 걸었다.

청운의 지척까지 다다른 여인은 고개를 돌려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무사에게 일장을 날리며 표독스럽게 한마디 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

펑!

무사 한 명의 머리통이 박살 났다.

그러나 누구 하나 비명을 지르는 자는 없었다. 그저 바짝 엎드려서 덜덜 떨 뿐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다시 돌려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동생, 미안해. 아랫것들이 밥값을 못 하네.”

그 잔인한 손속에도 청운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여인을 보며 물었다.

“누구신지?”

“호호호, 누나야. 동생이 요즘 잘나간다는 뇌신룡이지?”

“뇌신룡?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그리고 누나라니? 내가 더 많아 보이는데.”

“호호호. 그럼 오라버니라고 부를까?”

여인은 무엇이 좋은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러나 상행을 따라나선 이들이나 호위하듯 서 있는 무사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호칭이야 어찌 되었든, 이름이 무엇이오? 내 듣기로는 영풍장에 백발미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 당신이 그 여자 아니오?”

청운은 여인의 정체를 짐작해냈다.

앞에 있는 여자는 매란국죽 중 백살마녀 한란이 분명했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죽었을 거라는 조심스러운 예상이 빗나갔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백살마녀라 부르지 않고 백발미녀로 고쳐서 불렀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는지 한란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몸을 비비 꼬았다.

“호호홋. 오라버니께서 듣는 귀만 좋은 줄 알았더니 말씀도 너무 찰지게 잘하신다.”

온갖 교태를 다 부리는 여인의 모습에도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혈황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버럭 화를 냈다. 도저히 못 봐주겠는 표정이었다.

[당장 저년의 주둥이를 뭉개버려라.]

그런 혈황을 청운이 살살 달랬다.

-혈황님, 그건 차후 문제입니다.

[차후 문제라니? 네놈은 비위도 좋구나. 다 늙은 쭈그렁 할망구가 교태를 부리는 것을 즐기다니.]

-알겠습니다. 그보다 어서 마차에 실린 짐을 조사해 주십시오.

[분명히 해! 사정 봐주지 말고 뭉개! 알았지?]

-예.

혈황은 못 미더워하는 표정으로 청운과 백발마녀를 번갈아보고는, 마차를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한란이 살랑살랑 둔부를 흔들며 청운에게 다가왔다.

청운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만 봤다. 혈황이 마차에 실린 물품을 살필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일 장 앞까지 다가간 한란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청운의 몸을 훑어보았다.

“몸이 무척 단단할 것 같아.”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청운의 아래쪽을 힐끔 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입술을 핥았다.

“오늘 너무 흥분되는데? 흐응.”

그런 한란을 향해서 청운이 부드럽게 말했다.

“흠, 동생이 있는 줄 알았으면 손속에 사정을 두는 건데, 미안하군.”

“흐응. 지난 일이라면 괜찮아. 그 정도는 내가 해결할 수 있어.”

이대로 말을 나누다 보면 대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알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두려움에 떨던 자들도 귀를 쫑긋 세웠다.

마차를 살피던 혈황이 들었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쭈그렁 할망구랑 대로에서 운운지락이라도 벌일 참이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 살피셨습니까?

시간을 끌기 위한 방편이라지만 계획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이들과 투덕거리는 사이에 혈황이 마차를 살피고 뒤로 물러서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뜻하지 않게 백살마녀가 끈적거리는 바람에 일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백살마녀도 갈등했다.

일 장 거리. 한 걸음이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이대로 공격하면 상대의 가슴에 손을 쑤셔 넣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흥분이 되었다. 강자를 만나면 느꼈던 기분이었다.

그들의 심장을 꺼내서 팔딱거리는 심장을 손에 쥐면 짜릿한 흥분이 손을 타고 온몸에 전해진다. 그런데 심장도 꺼내지 않았는데 벌써 온몸이 찌르르 울리고 있었다.

한동안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는데, 길거리에서 횡재해서 더욱 흥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러한 여운을 더 느껴보고 싶어서 손쓰는 것을 늦추었다.

그런데 청운이 말했다.

“동생과 더 있고 싶은데, 내가 지금 급히 할 일이 있어서 어렵겠네.”

“흐응, 어디 가려고?”

“집에. 내 차후에 찾아가도록 하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청운의 몸이 허공에서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제야 백살마녀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사라지는 청운의 몸을 잡으려고 했지만, 흩어지는 청운의 허상을 잡을 수는 없었다.

욕망에 일렁거리던 그녀의 두 눈이 차갑다 못해 만년빙설처럼 변했다.

그녀는 애꿎은 일행들에게 호통을 쳤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이냐? 당장 떠날 채비를 하지 않고.”

북풍한설의 한파가 일행을 덮쳤다.

일행들은 한차례 몸을 떨며 그녀의 명대로 이동을 준비했다.

백살마녀가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흐응. 다음에 만나면 심장을 꺼내봐야겠어. 이 손에 쥔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흐응.”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묘한 열기에 숨이 거칠어졌다.

백살마녀가 무슨 짓을 하든, 쟁자수들은 이미 죽어버린 무사를 길옆에 가매장했다.

돌아오는 길에 관을 준비하거나, 마을에 들려서 시체를 영풍장으로 옮기라고 부탁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청운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옆에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혈황이 서 있었다.

[왜 그년의 주둥이를 안 뭉갠 거냐?]

“그랬다가는 그자들이 표행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당장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 방 먹였어야지. 네 녀석은 그 할망구의 미친 짓이 그리도 좋던?]

“설마요?”

[흥. 내 다 지켜보았거늘, 이제 와서 발뺌해봐야 소용없다.]

“하하 아닙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뿐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해. 환관을 좋아하지를 않나, 다 늙은 할망구를 좋아하지를 않나. 쯧쯧.]

혈황이 화가 단단히 났는지 연신 청운을 놀렸다. 청운은 그런 혈황에게 더 말대답하지 않고 휭하니 몸을 돌려서 경공을 펼쳤다.

[이놈아 대답은 하고 가야지! 그래서 환관이냐? 할망구냐?]

혈황의 절규와 같은 소리만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 * *

청운은 장원에 돌아와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들이 가져간 물품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아니 특별하다면 특별한 물건이었다.

“황금이 마차 바닥에 깔려 있단 말입니까?”

[그래. 마차 아랫부분에 깔고 그 위를 비단이나 서책으로 쌓았다. 대충 따져보니 만 냥은 될 거 같았다.]

금자 만 냥. 은자로 이십만 냥이다.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들이 그 많은 돈을 갖고 가는 이유가 뭘까요? 물건을 사기 위해서라면 너무 많은 금액입니다.”

[글쎄다. 나도 그게 의문이다.]

사실 돈을 운송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갖고 가야 하니까.

단지 그 많은 돈을 가겨가서 구입하려는 물건이 뭔지 수상했다.

정보에 의하면, 영풍상단은 소규모의 짐을 나르고 그 정도 분의 물건을 가지고 돌아온다고 했었다.

금자 만 냥을 써서 가져올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일지 궁금했지만, 장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청운과 혈황은 답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청운은 조광을 불렀다.

“부르셨소?”

몸에서 묵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것을 보니 글공부를 하고 왔음이 분명했다.

청운은 자리를 권하며 조광에게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조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 정도 금액이면 못 살 것이 없소. 문제는 다섯 대 분량의 부피인데…… 생각할 수 있는 품목은 여러 가지가 있소.”

“그래요?”

“금의 무게로 거래되는 물품들이 있소. 특히 경면주사라는 것이 있는데 같은 무게의 금으로 거래가 되는 대표적인 물품이오. 보통 참기름에 섞어서 부적을 그릴 때 사용하오. 그런데 거래가 활발한 물품이 아니어서 파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소.”

“흠, 그럼 경면주사는 아니겠군. 다른 물품은 무엇이오?”

영풍상단은 두 달에서 석 달간 원행을 다닌다고 했다. 그 안에 팔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 경면주사는 아니었다.

조광은 연이어 여러 가지 물건을 이야기했다.

“다른 물품으로는 귀한 약재를 들 수 있소. 예를 들어서 동충하초 같은 약재인데 이 역시 같은 무게의 금으로 유통되오. 그런데 이런 상급 약재는 수요는 많은데 거래되는 양이 턱없이 부족하오. 그러니 단일 품목으로 다섯 대 분량을 구하기 어려울 거요.”

“그나마 가장 신빙성이 있는 물품이 상급 약재인가 보군. 조 공자, 그밖에 뭐 짐작되는 물품은 없소?”

청운은 혹시 몰라서 조광에게 다시 물었다. 조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룡궁과 관련이 있다면 가능성이 있는 물품이 하나 있소.”

“생각나는 물건이 있소?”

“앵속이오.”

“앵속?”

양귀비의 열매가 익기 전 대나무 칼로 갈라서 나오는 액을 말리면 아편이 된다.

그 아편을 흔히 앵속이라 한다.

약재로도 쓰지만, 많은 사람들이 약재가 아닌 엉뚱한 용도로 사용한다.

문제는 바로 그 잘못된 사용 용도였다.

앵속에 중독되면 결국 인생을 망치고, 집안까지 말아먹게 된다.

“앵속을 장기 사용하면 환각에 빠지게 되오. 그 때문에 죽을 때까지 끊기가 무척 어렵다 들었소.”

“끊기가 어렵다면, 가격이 비싸도 살 수밖에 없겠군.”

“그렇소. 그래서 어지간한 부자들도 집안이 망하는 경우가 흔한 거요. 게다가 무게가 가벼워서 여기 이 함을 가득 채울 정도면 족히 은자 천 냥은 나갈 거요.”

조광이 옆에 있는 가로세로 한 자 크기의 함을 가리켰다.

둘의 대화를 듣던 혈황이 한마디 했다.

[앵속은 교에서도 사용한 적이 있다. 심한 부상을 당한 무사들에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사용했지. 진통 효과가 좋거든. 그런데 저 아이 말대로 중독성이 심해서 계속 사용하면 큰일 난다.]

청운은 혈황의 말을 들으며 조광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앵속이 왜 자룡궁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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